[비트코인 A to Z]
-‘현실과 만나는 순간’이 가장 취약…화폐의 한계 넘으려면 ‘기업’과 함께하는 게 최선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암호화폐 ‘이오스(EOS)’가 블록 프로듀서(BP) 담합 논란에 휩싸였다. 이오스는 비트코인과 달리 모든 노드가 기록 진실성을 가리기 위해 경합하지 않는다. 위임된 소수가 투표를 통해 블록을 생성한다. 그런데 서로 경쟁하도록 돼 있는 엘리트들끼리 교차 투표를 했다는 정황이 폭로됐다. 암호화폐 거래소 ‘후오비’의 직원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에는 후오비가 다른 BP와 표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살 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사건은 이오스의 작업 증명 방식인 위임 지분 증명(DPoS)의 옹호론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최초의 블록체인 네트워크인 비트코인은 전 세계 1만 개의 노드에서 동일한 데이터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분산 시스템이다. 데이터의 복사본이 1만 개 존재하기 때문에 데이터를 공격해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산성을 양보하는 대신 효율성을 선택한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비트코인처럼 코인의 거래를 기록하는 장부 기능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용도로 확장하려면 많은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풀 노드를 운용하는 비용이 증가하고 자발적으로 풀 노드를 운영하려는 의지가 꺾인다.

하지만 블록체인에서 말하는 분산성은 아직까지는 지향성 개념이지 수학적으로 정리된 이론이 아니다. 즉 풀 노드가 몇 개 이상 있어야만 분산된 시스템이라고 양적으로 경계를 긋기 어렵다. 적어도 블록체인의 신뢰 문제에 관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려면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상대로 하여금 탄창에 총알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 확신시킨다면 총구를 겨누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바둑에서 말하는 축과 같이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도 귀결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와 관련해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양태는 학습이 일어나기 전과 학습 이후가 다르다. 학습 이후에는 신뢰할 만한 분산성의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 수준의 분산성은 블록체인에 대해 학습이 덜된 정부나 해커들을 상대할 때 꼭 필요했다.

하지만 분산화의 힘을 확인한 정부라면 끝장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축이라면 따라 가봐야 상대의 집만 키워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부도 비트코인 자체를 없애겠다고 겁 없이 나서지 않는 이유다.
'최초의 1마일 문제’와 블록체인의 한계
(사진) 이오스의 핵심 개발자 댄 라리머.

누군가 반드시 네트워크에 정보를 입력해야

만약 비트코인이 없는 세상에서라면 이오스의 엘리트주의는 정부들의 공격에 취약할 것이다. BP들을 인신 구속하겠다고 수배하거나 그런 으름장만으로도 대중은 이오스 블록체인에 대해 신뢰와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10년 동안 건재한 상태에서라면 이오스에 대한 정부들의 공격은 맥락을 놓친 일이 돼 버린다. 외부자들의 공격에 대해서라면 이오스의 엘리트주의도 강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이 사실이라면 역시 절제하기 어려운 엘리트의 탐욕 때문에라도 분산성은 양이 중요한 이슈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줄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계약하고 특별한 자격을 갖춘 이들만 장부를 공유하는 식이라면 담합도 의미가 없다. 은행이나 IBM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추진하는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블록체인 노드를 운영하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

원래 블록체인은 중앙 서버를 관리하는 특별한 권한을 없앤 네트워크이므로 기업들이 주도하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블록체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정보 입력 단계에서는 특별한 권한이 누군가에게 주어지므로 그 특별한 누군가가 타락하거나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차단할 수 없다.

정보의 입력 단계에서 잘못된 정보를 심는다면 블록체인은 오류를 쉽게 고칠 수 있는 전통적인 데이터베이스보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거짓 정보가 입력됐다고 하더라도 블록체인은 그 거짓 정보가 변경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블록체인은 등록된 정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하는 시스템이지 애초에 심어지는 정보 자체가 진실한지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문제가 아니라 블록체인 자체의 문제다.

현실에서 ‘신뢰의 상징’은 기업

블록체인은 현실과 만나는 접점에서 가장 취약하다. 이를 ‘최초의 1마일 문제’라고 하며 스마트 콘트랙트에서는 특별히 ‘오라클 문제’라고도 한다. 스마트 콘트랙트가 작동하려면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사건을 인지해야 한다. 현실세계의 조건들을 시스템 내부적으로 유추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누군가 네트워크에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오라클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쟁이나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신에게 묻던 신탁을 연상시키는 단어다. 하지만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나온 블록체인이 이름을 그럴듯하게 붙였다고 해도 오라클을 믿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계약의 조건 값을 입력하는 외부 시스템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오라클 문제는 스마트 콘트랙트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 콘트랙트의 현실화가 ‘오라클 문제’의 관리 여하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다.

서로를 신뢰하기 어려웠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심지어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만든 신뢰 시스템이 바로 비트코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산업화는 결국 엘리트들의 몫이기도 하다. 비트코인처럼 아래로부터 구축해 올라가는 블록체인들이 한 축이라면 거대 기업들이 자신들이 이미 확보한 신뢰에 기반해 위에서부터 만들고 확산시키는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한 축이다.

블록체인에 돌아가는 가치물이 비트코인과 같은 화폐라면 정부의 입김 아래 놓인 대기업을 조금도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역과 금융이 융합된 복잡하고 고도화된 권리 관계를 담는 블록체인이라면 불특정 다수가 배타적으로 만든 블록체인보다 신뢰가 생명인 기업들이 배타적으로 만든 블록체인 쪽이 더 현실성이 있다.

비트코인과 달리 산업의 표준을 지향하는 이더리움과 이오스가 예상외로 고전하는 이유도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기업이라는 변수를 엔지니어들이 간과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돋보기] 결국 시장이 해결하게 될 오라클 문제

블록체인은 그 자체가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특정 시간을 조건 값으로 삼는 계약이라면 오라클이 필요 없다. 하지만 수학이나 시간 조건이 아니라 종합주가지수, 날씨, 환율, 스포츠 경기의 승패나 회사의 파산, 이혼 여부, 화물의 선적 같이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시스템 내부 완결이 불가능하다. 이때 기상청이나 국세청, 가정법원, 해운회사의 화물 기록과 그 입력 주체를 신뢰할 수 있는지 등 네트워크 외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발생한다.

블록체인에서는 정보 조작이 발각될 확률을 높이므로 참여자들이 규칙을 지킬 유인을 획기적으로 높이지만 참여자들이 경쟁의 압박에 시달려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오라클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은 경쟁 시장이다. 경쟁 시장이 해결책이라는 명제는 다른 말로 하면 오라클 문제와 관련해 사업 기회가 크다는 의미다. IBM이 세계적 해운사인 머스크나 싱가포르의 PIL(Pacific International Lines)과 손잡는 이유도 글로벌 공급 사슬망 블록체인에서 오라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센서나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하면 선적에서부터 하역까지의 정보들이 자동으로 블록체인에 입력된다. 물론 센서나 IoT도 조작할 수 있지만 머스크나 PIL과 같은 거대한 해운사는 자신의 명예를 걸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5호(2018.10.22 ~ 2018.10.2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