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달리던 개성공단이 멈춰 섰다. 휴전선 너머 개성시 외곽 허허벌판에서 첫 삽을 뜬 지 꼭 10년 만이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개성공단 드림’에 올라탔던 중소기업들은 패닉 상태다. 현재로선 정상화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금강산 관광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남북경제공동체로 가는 디딤돌로, 국내 중소기업의 마지막 탈출구로 각광받아 온 개성공단 10년을 정리했다.
북한이 개성공단 출경을 불허한 3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2013.4.3
북한이 개성공단 출경을 불허한 3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2013.4.3
개성공단에서 봉제 공장을 운영하는 A 사장은 요즘 ‘멘붕’ 상태다. 그는 몇 년 전 국내 공장을 접고 제품을 개성공단에서 전량 생산해 왔다. 개성공단 의존율이 100%인 셈이다. A 사장은 “사업하던 모든 것, 전 재산을 고스란히 두고 왔다”며 “대안이 전혀 없고, 대안을 세우고 싶은 의욕조차 잃었다”고 말했다. 경협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보상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개성공단 사업이 중단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에 진출해 있는 123개 한국 기업의 상황은 대부분 마찬가지다. 북한 핵실험과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사건 속에서도 힘차게 돌아갔던 개성공단의 생산 라인이 하루아침에 멈춰 선 것이다. 모두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이번 사태의 파장은 이들에 그치지 않는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에 부품과 원자재를 공급해 온 전국 5800개 중소기업도 피해 대상이다. 개성공단에 후발 주자로 진출해 착공식만 하고 발이 묶인 곳도 적지 않다.

그동안 개성공단은 남북 관계의 부침 속에도 꾸준히 성장 가도를 달려 왔다. 입주 업체들의 공장 가동이 본궤도에 오른 2005년 1491만 달러였던 공단 매출이 2012년 4억6950만 달러로 30배 이상 증가했다. 개성공단에 고용된 북측 근로자도 같은 기간 6000여 명에서 5만3000여 명으로 9배 가까이 늘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작년부터 흑자 기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는 단계였기 때문에 개성공단 기업들의 아쉬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YONHAP PHOTO-1024>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답답한 심정'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개성공단기업협회 임시총회에서 한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123개 회원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번 회의에서 비대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 철수한 주재원들의 처우 문제 등을 논의한다. 2013.5.3
    jieunlee@yna.co.kr/2013-05-03 14:54:30/
<저작권자 ⓒ 1980-201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답답한 심정'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개성공단기업협회 임시총회에서 한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123개 회원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번 회의에서 비대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 철수한 주재원들의 처우 문제 등을 논의한다. 2013.5.3 jieunlee@yna.co.kr/2013-05-03 14:54:30/ <저작권자 ⓒ 1980-201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작년부터 흑자 기조 정착

개성공단 사업은 10년 전인 2003년 6월 30일 착공식과 함께 깃발을 올렸다. 착공식 당일에는 여름 장맛비가 그치고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게 갰다. 착공식에 참가하는 남측 대표들은 경북궁 주차장에서 버스에 오르기 전 간단하게 기념 촬영했다.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 박주선 의원과 정세균 의원, 김창성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영수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 김진호 한국토지공사 사장, 철학자 김용옥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개성공단의 첫 출발은 착공식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방북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듬해인 1999년 10월 1일 또다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정 회장이 제안한 서해안공단 조성 사업에 김 위원장이 큰 관심을 보이면서 합의서가 전격 체결됐다. 하지만 공단 입지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정 회장은 내심 해주를 원했다. 북한은 군사적으로 민감한 곳이라며 신의주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정 회장은 원부자재 수송이나 해외 수출에 물류비용이 많이 든다며 맞섰다.
[개성공단 10년의 기록] 날개 꺾인 ‘중소기업 드림’… 6월이 정상화 마지노선
이때 김 위원장이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개성을 공단 후보지로 점찍은 것이다. 자신이 직접 나서 군부 강경파를 설득했다. 이후 현지 답사, 지질 조사, 측량 등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지만 2001년 정 회장 사망과 남북 관계 침체기를 거치면서 답보 상태에 빠졌다.

개성공단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2002년 4월 대통령 특사의 방북이었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토지공사(현 LH)가 개성공단 개발에 공동 사업자로 합류했다. 애초 그해 12월 30일이 착공식 날짜로 잡혔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통과에 관한 군사 보장 합의서가 체결되지 못해 해를 넘겨 2003년 6월 30일에야 착공식이 열린 것이다.

개성공단 사업은 북한 개성직할시의 개성시와 판문군 평화리 일대 약 6610만㎡(2000만 평)-공단 2644만㎡(800만 평), 배후도시 3961만2000㎡(1200만 평)-를 3단계에 걸쳐 개발하는 것이다. 사업 주체인 현대아산과 한국토지공사가 북한으로부터 50년간 토지를 임차해 공업단지로 개발한 다음 이를 국내외 기업에 분양하는 방식이다.

1단계 330만5000㎡(100만 평)는 노동집약형 중소기업, 2단계 661만㎡(200만 평)는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3단계 1652만5000㎡(500만 평)는 첨단 산업을 유치한다는 구상이었다. 착공에서부터 3단계 완료까지 8년을 예상했다. 2011년께에는 대규모 첨단 산업 공단과 신도시가 이미 들어섰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현재 개성공단은 1단계 사업이 60% 정도 진행된 상황이다. 애초 구상의 3%만 실현된 채 사업 자체가 좌초 위기에 빠지고 만 셈이다.
개성공단, 뒤로 송악산이 보인다. 개성=조용철 기자
개성공단, 뒤로 송악산이 보인다. 개성=조용철 기자
2004년 첫 제품 생산

개성공단은 가동 전부터 국내 중소기업의 ‘마지막 희망’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많은 중소기업이 고임금과 인력난으로 중국행이나 동남아행을 택해야 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개성공단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거리로 수도권 공단과 똑같은 입지 조건이다.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굳이 먼 외국 땅에 나가 마음고생할 필요가 없다. 물론 가장 큰 매력은 낮은 인건비다. 북한은 최저임금 월 50달러, 주 48시간 노동, 임금 인상률 연 5% 미만 등을 약속했다. 중국의 3분의 1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노동력 확보가 가능해진 것이다.

2004년 5월 1단계 시범 단지 분양 공고가 나오자 136개 업체가 뛰어들었다. 이 가운데 로만손·신원·리빙아트(현 소코노쿠진웨어)·SJ테크 등 15개 기업이 선정됐다. 9 대 1이 넘는 경쟁률이었다. 주방 용품 업체인 리빙아트가 그해 9월 가장 먼저 공장 건설에 착공해 연말 준공식과 함께 제품 출하식을 가졌다. 개성공단 생산품 1호였다. 이날 만든 냄비 1000세트는 서울로 운송돼 롯데백화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하나둘 공장 가동에 들어가면서 원산지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개성공단 제품은 남북 합의에 의해 국내에서는 ‘한국산’으로 판매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수출은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가 개성에서 생산된 제품을 ‘한국산’이 아니라 ‘북한산’으로 분류한다. 세계무역기구(WTO) 미가입국인 북한 제품은 한국산보다 훨씬 높은 고율 관세를 물어야 한다. 게다가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간주하는 미국은 최고 100%에 가까운 초고율 관세를 매기는 데다 수입마저 엄격하게 통제해 시장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진->개성공업지구 첫 제품 반출 
   북한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첫 제품인 리빙아트의 주방기기세트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 등 남측인사와 주동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 등 북측인사들의 환영속에  15일 남측으로 갈  8t트럭에 실려나가고 있다. /황광모/북한/ 2004.12.15 (개성=연합뉴스)
  hkmpoo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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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개성공업지구 첫 제품 반출 북한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첫 제품인 리빙아트의 주방기기세트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 등 남측인사와 주동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 등 북측인사들의 환영속에 15일 남측으로 갈 8t트럭에 실려나가고 있다. /황광모/북한/ 2004.12.15 (개성=연합뉴스) hkmpooh@yna.co.kr <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2004 Yonhap News Agency All rights reserved.
[개성공단 10년의 기록] 날개 꺾인 ‘중소기업 드림’… 6월이 정상화 마지노선
상당수 업체들이 개성공단 제품을 일단 국내 내수용으로 돌리고 있지만 수출 길이 계속 막히면 반쪽짜리 공단이 될 수밖에 없다. 2004년 11월 정부가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규정을 집어넣어 이 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2005년 한·유럽(EU) 자유무역협정(FTA), 2007년 한·아세안 FTA도 이 선례를 따랐다. 하지만 가장 큰 수출 시장인 미국과 유럽은 여전히 협의가 진행 중이다. 한미 FTA(2007년), 한·EU FTA(2010년)에 역외 가공 지역에 관한 내용이 포함됐지만 개성공단을 역외 가공 지역으로 지정하기 위해 필요한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05년 3월 개성공단 1단계 본단지 1차 분양이 진행됐다. 93개 업체가 신청해 일반 공장 용지 17개 업체, 협동화 단지 6개 업체, 아파트형 공장 용지 1개 업체가 선정됐다. 이듬해 6월에는 개성공단 1단계 330만5000㎡(100만 평)에 대한 부지 공사가 마무리됐다. 입주 기업이 늘어나면서 남한 인력과 차량들이 비무장지대를 넘나드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됐다. 그동안 끊어져 있던 전력선과 통신선도 다시 연결됐고 개성공단에서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2006년은 개성공단의 첫 번째 시련기였다.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7월 5일)하고 핵실험(10월 9일)을 단행하면서 한반도 정세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국내외의 시선이 개성공단에 쏠렸다. 개성공단은 남북 관계의 긴장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출입 인원과 생산량이 계속 증가했다. 생산액은 7400만 달러로 전년보다 4.9배 뛰었으며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측 근로자 수도 1만 명을 돌파했다. 해외 기업인과 정치인, 언론의 발길이 이어졌다.

북핵 위기가 끝나자 전성기가 찾아왔다. 2007년 4월 그동안 연기됐던 개성공단 1단계 2차 분양이 2.3 대 1의 경쟁률 속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183개 기업이 새롭게 개성공단 입주 자격을 따냈다. 이 중에는 외국계 기업도 3개가 포함됐다. 인조 손톱을 만드는 천진진희미용실업유한공사(한국법인 데싱디바), 봉제 업체인 성거나복장유한공사(한국법인 SW성거나) 등 중국계 두 곳과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독일계 업체 한국프레틀이 그 주인공이었다.
<YONHAP PHOTO-0307> 인디에프 개성공장 준공
    (개성=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15일 개성공단에서 준공된 (주)인디에프(대표 김기명)의 개성공장에서 북한 직원들이 분주히 의류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jihopark@yna.co.kr/2008-10-16 09:50:12/
<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인디에프 개성공장 준공 (개성=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15일 개성공단에서 준공된 (주)인디에프(대표 김기명)의 개성공장에서 북한 직원들이 분주히 의류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jihopark@yna.co.kr/2008-10-16 09:50:12/ <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2010년 이후 추가 투자 중단

외국 기업 유치는 개성공단의 국제적 신뢰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북핵 문제 같은 예기치 않은 사태가 생길 때 개성공단을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립스전자 등 국내 외국 투자 기업 대표들이 개성공단을 방문하고 다국적기업인 킴벌리클라크가 투자 의사를 보이면서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다.

10·4 남북 정상회담은 하이라이트에 해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그해 말 남측 지역인 문산역과 북측 지역인 봉동역을 연결하는 철도 화물 수송 시대가 열렸다. 문산역과 판문역, 개성역을 잇는 통근 열차 운행도 예고됐다.

분위기가 반전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8년 2월 ‘비핵 개방 3000’을 내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관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후 개성공단에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7월 한국인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이 갑작스레 중단됐다. 무려 200만 명이 다녀간 관광 프로그램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그 후 영영 재개되지 못했다. 북한은 금강산 리조트의 자산을 몰수하고 현대아산의 사업 허가를 일방적으로 최소했다.

개성공단에도 점점 위기감이 고조됐다. 북한은 그해 12월1일 개성공단 육로 통행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개성공단 상시 체류 인원을 880명으로 줄이고 출입 횟수, 하루 출입 인원도 대폭 제한했다. 문산~봉동 구간의 경의선 화물열차도 1년 만에 중단됐다.
 개성공단 본단지 1층에 대한 분양신청이 분당 토지공사에서 18일 실시되었다. 관심이 있는 중소기업관계자들이 신청서류를 제출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
개성공단 본단지 1층에 대한 분양신청이 분당 토지공사에서 18일 실시되었다. 관심이 있는 중소기업관계자들이 신청서류를 제출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
상황은 이듬해인 2009년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한미 군사훈련 ‘키리졸브’를 이유로 북한인 3월에 3회에 걸쳐 개성공단 육로 통행을 차단했다. 체제 비난과 북한 여성 종업원 회유를 이유로 현대아산 직원이 137일간 억류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북한은 개성공단 입주 기업에 대한 모든 특혜를 무효화한다는 일방적인 선언(5월)으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2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도 이어졌다. 북한 근로자 임금을 4배인 월 300달러로, 토지 임차료는 이미 납부한 금액의 31배 수준인 5억 달러로 각각 인상하라는 황당한 요구안도 등장했다.

해외 공단 합동 시찰단 구성으로 한때 화해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지만 이듬해 터진 천안함 침몰 사건이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개성공단 신규 진출과 투자 확대를 금지하고 체류 인원을 축소하는 5·24 대북 조치를 꺼내들었다.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에는 개성공단 출경을 차단하고 귀환만 허용했다.

5·24 조치로 개성공단 개발 사업은 사실상 중단됐다. 2007년 1단계 2차 분양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추가 분양이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2차 분양 기업 중 상당수도 착공식만 한 채 손을 놓고 있다. 공장 증설이 필요해 방을 동동 구르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당초 입주 예정이던 외국계 기업 중 SW성거나는 지분을 회수했고 한국프레틀은 착공식만 겨우 끝냈다. 데싱디바는 그나마 착공도 못한 상태다. 2011년 내내 답답한 경색 국면이 이어졌다. 이듬해 2월 국회 대표단이 개성공단을 방문하면서 겨우 숨통이 틔었다.

올해 파국은 4월 3일 남측 근로자에 대한 개성공단 출입 제한 조치로 시작됐다. 작년 12월 은하3호 로켓 발사와 지난 2월 3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긴장 지수가 한껏 치솟은 상황이었다. 북한은 5일 만인 4월 8일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선언하고 북측 근로자 전원을 철수했다. 4월 26일 박근혜 대통령도 개성공단에 잔류하던 국내 인력에 대해 귀환 조치를 내리면서 맞대응했다. 2004년 첫 제품 생산이후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았던 개성공단이 텅 빈 죽음의 공단으로 돌변한 것이다.



북한, 중국 인력 수출에서 대안 찾았나

현재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의 최저임금은 2007년부터 매년 인상돼 월 67달러까지 와있다. 폐쇄 직전 북측 근로자들이 받던 월 평균 임금은 개인당 134달러 정도였다. 우리 돈으로 15만1000원 정도다. 400~800달러에 달하는 중국 인건비에 비해 여전히 매력적인 수준이다. 개성공단 입주 업체들은 남북 관계가 정상화되면 즉각 복귀해 생산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육성해 놓은 북측 기술자들도 엄청난 자산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이 대북 압박에 매달리는 사이 북한이 새로운 대안을 착착 준비해 왔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 결과가 개성공단 폐쇄라는 것이다. 북한의 새로운 돌파구는 대중국 인력 송출이다. 개성공단 근로자를 중국으로 돌리면 임금으로만 3배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다. 북한으로서는 아쉬울 게 없는 셈이다.

이 분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제 개성공단 문제만 따로 떼어내 해결하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개성공단의 운명은 남북 관계 혹은 북미 관계라는 더 큰 구조 속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개성공단 10년의 기록] 날개 꺾인 ‘중소기업 드림’… 6월이 정상화 마지노선
인터뷰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너무 늦으면 의미 없어…재발 방지도 필요”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남북 경협과 중소기업 전문가다. 동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소기업진흥공단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과 LH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조 연구위원은 “너무 늦어지면 정상화돼도 의미가 없다”며 “6월이 마지노선”이라고 말했다.

개성공단 10년은 뭘 남겼나.

개성공단을 계속 성장했다. 생산액이나 입주 기업, 근로자, 수출 등 모든 수치가 말해준다. 개성공단은 123개 입주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부품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5800개 중소기업이 있다. 부산 신발 산업, 대구 의류 산업, 인천 기계 산업 등 지역 경제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다. 개성공단은 한반도 리스크를 완화에도 가치가 있다. 위기가 고조되면 외국 투자자들은 항상 개성공단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지 먼저 본다.

북한쪽은 어떤가.

개성공단은 5만3000명 북한 근로자의 일터다. 가족을 포함하면 20만 명이다. 개성 시내와 인근 군을 다 합해도 인구가 20만 명 남짓이다. 개성과 인근 지역을 먹여살린 것이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많이 습득했다. 개성공단이 있었기 때문에 나선이나 황금평 특구도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개성공단이 ‘저임금 따먹기’라고 불만을 나타내는데.

가장 빨리 효과를 볼 수 있는 노동집약적 중소기업으로 출발해 2~3단계에서 첨단 기술 등으로 확대하는 것으로 돼 있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내줄 때 김정일이 나서 군부를 직접 설득했다. 3단계 완공까지 청사진을 보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막상 1단계에서 진행이 막혔다. 그래서 원래 기대만큼 성과가 없다는 불만이 나온다.

정상화 가능성은.

개성공단은 남북 경협의 시금석이다. 개성공단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향후 남북 경협은 불가능하다. 타이밍도 문제다. 정상화가 돼도 빨리 돼야 한다. 너무 늦어지면 의미가 없다. 6월까지가 마지노선이다. 그 시기를 넘기면 설비 교체 등에만 투자비가 10억~20억 원이 들어간다. 비중이 높은 섬유 업체들은 계절성 상품을 만들기 때문에 6월을 넘어가면 올해 장사는 물 건너 간 것이다.

정상화 조건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시작해야 한다. 확실한 안전장치를 강구해야 한다. 개성공단 국제화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유엔이나 국제기구를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제2 개성공단도 검토해 볼만하다. 북한 지역이 아니라 접경 지역이나 파주에 조성하고 북한 근로자가 출퇴근하는 형태다. 북한 측에서도 중국에 근로자들을 외화벌이 보내는 것보다 울타리만 쳐준다면 이쪽이 더 유리할 수 있다.


취재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