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력 멈춘 도시에 생기 불어넣는 문화 재생 프로젝트

수명을 다한 근대 시설, 용도 폐기된 공간, 낡은 산업 시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있다. 누군가에겐 현대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애물단지일지 몰라도 작가의 눈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특색 있는 문화 지대로 재탄생한다. 사람이 모이고 활력이 생기며 ‘폐허’에서 다시 한 번 사회·문화·경제적 ‘부활’의 물꼬를 트고 있다. 일상으로 파고든 예술은 지역사회와 ‘관계 형성’을 통해 더욱 진한 빛깔을 낸다. ‘회색 지대’에 ‘색깔 입히기’, 옛 번화가에 숨길을 여는 프로젝트는 현재 전국 단위로 뻗어가는 중이다.
[SPECIAL REPORT] 예술과 산업의 만남…지역을 살리다
서울 중구 황학동 ‘서울중앙시장’에는 국내 최초의 민자형 지하상가가 있다. 1971년 폭 11.5m, 총길이 약 380m에 이르는 ‘기역(ㄱ)’ 자 모양의 지하상가가 그것이다. 지상 지하를 막론하고 서울의 4대 시장 중 하나로, 20년간 지역의 중심 상권 역할을 했던 이곳은 그러나 외환위기 시기를 지나며 점차 쇠퇴해 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고 지하 상권은 어둠침침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변화가 찾아든 것은 2009년부터다. 이곳 지하상가에 작가 스튜디오, 전시실, 공동 작업실 등을 조성해 2009년 10월 신당창작아케이드로 오픈했다. 현재는 섬유·북아트·도자·금속·사진·일러스트 등을 다루는 40팀의 예술가들이 입주해 창의적인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창작 공간이다. 재래시장 상인들과의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다양한 지역 밀착형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시끌벅적한 시장 초입,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상가는 기존 상점과 신당창작아케이드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앞쪽에 수산센터가 자리하고 뒤쪽에 각종 공예·공방들이 자리하고 있다.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고석현 사장은 “수산 분야만 겨우 남은 상태였는데 외국인과 젊은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전반적으로 침체된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주변이 청결해진 점이 좋다”고 말했다.


폐허에서 제2의 부활 외치다
신당창작아케이드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서울시 창작 공간 정책의 일환이다. 문화적인 요소를 활용한 도시 재생의 목적으로, 도심 속 유휴 공간을 찾아 문화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 중 하나다. 주로 공예 작가들의 창작 공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수정 입주 작가는 “공예 작가들에게는 작업 공간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기본 관리비만으로 작업하고 예술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까지 할 수 있어 작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고 설명했다. 젊은 작가들의 감각적인 공예가 입소문을 타면서 지역 내 명소로 떠올라 다시 북적이는 모습이다.
[SPECIAL REPORT] 예술과 산업의 만남…지역을 살리다
상인에게 슈퍼맨 옷을 입힌 홀로그램이 복도 벽을 차지하고 가게마다 개성이 뚜렷한 팻말과 메뉴판을 달고 있다. 김진호 신당창작아케이드 매니저는 “한때는 한 칸짜리 가게 권리금이 1억5000만 원에 달할 정도로 비싼 군락지였다. 처음 왔을 땐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상인들의 반발도 심했지만 예술 교육, 문화 체험 등을 진행하며 조금씩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고 말했다. 50~60년간 한길을 걸어온 시장 터줏대감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간이 무대를 설치해 공연을 하게 하고 에세이집도 제작했다. 시장 상인 100명의 인터뷰를 통해 상점마다 특정을 살린 캘리그래피(손으로 그린 그림 문자)를 제작해 전시했다. 지금도 중앙시장 천장에는 상인과 작가가 함께 만든 전등이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시민 참여 프로젝트’는 이곳에 활력을 불어넣은 동력이 됐다. 축제 ‘황학동 별곡’은 이곳 상인들과 작가들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상인들이 즐겁고 활력이 넘쳐야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진행된 축제였다. 노점상이 많은 중앙시장은 분주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하루 벌이가 중요하지만 모두가 잠시 일손을 내려놓고 축제를 준비하고 참여하며 바쁜 일상 속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예술이 던지는 질문 앞에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최근 이곳에는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벤치마킹하기 위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문래동 철공소, 문화 지대로 변신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엔 철공소 거리가 있다. 1970~1980년대 큰 규모의 철공 단지로 이름을 알렸던 곳이다. 수백 개의 소규모 철공소와 철재상들 사이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예술 공단’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 텅 빈 철재 상가 2~3층을 작업실로 활용하는 예술가들이 몰리면서 ‘자생적 예술 마을’을 형성하게 됐다. 특히 시각과 공연 예술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다. 철공소가 문을 닫는 저녁 6시 이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이곳에선 어떠한 소음도 용인된다. 공장 지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서울 도심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술가들의 놀이터가 된다.

2010년엔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 센터로 ‘문래예술공장’도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공연 및 연습실을 겸함 공연장과 공동 작업장, 녹음실, 영상 편집실 등을 갖추고 있다. 지난해에는 예술가와 철공소 대표, 영등포구청 직원, 지역 주민, 외부 전문 예술가 등이 모인 운영위원회를 발족했다. 예산 편성부터 세부 사업까지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는 라운드 테이블의 운영 시스템으로 지역사회와 공존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이현아 문래예술창작공간 총괄매니저는 “문래는 살아 움직이는 물체 같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현재 어느 방향으로 갈지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예술 마을과 상업 지구 사이에 서게 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때문에 문래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과도한 포장을 지양하는 수위 조절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

문래동은 해외 예술가들에게도 유명한 곳이 됐다. 호주의 파워하우스, 램시어터 등의 극단과 문래동 예술가들 사이에 협업이 활발하다. 모두 문래동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옛 산업 중심지가 문화 중심지로 바뀐 곳들이다. 독일의 자브리켄 레지던시 작가들과 함께 그룹전도 열고 있다. 문래동 작가들이 독일에 건너가 공동 작업한 결과물을 전시 중이다.
[SPECIAL REPORT] 예술과 산업의 만남…지역을 살리다
지금 이곳은 예술가와 철공소가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철공소는 관광 명소로 떠올라도 직접적인 수혜를 보지는 못한다. 오히려 오고 가는 발길이 작업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철공소와 예술가가 협업해 상품을 개발하는 구상을 시작했다. 철공소의 철제 기술과 예술가의 스토리텔링이 만나면 독특한 상품이 나올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문래에 철공 단지가 있다면 금천엔 디지털 단지가 있다. 서울의 대표적 산업단지였던 구로공단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산업단지로 변모했다. 이곳의 버려진 한 인쇄 공장은 금천예술공장으로 재탄생했다.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창작 공간으로, 미디어 아트 작가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인 미디어 아트가 피어나기에 적합한 장소다. 예술가 겸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을 빌린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은 금천예술극장이 자랑하는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이다. 10월 17일까지 진행되는 올해 페스티벌엔 증강현실, 웨어러블 컴퓨팅, 미디어 파사드, 바이오 아트 등 기술을 도입한 16개 미디어 작품이 선보인다. 예술과 산업을 결합한 이 페스티벌에 인근 정보기술(IT) 기업들의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미디어 작가 그룹 ‘하이브’의 아이디어는 인쇄회로기판(PCB) 회로 설계 업체인 이오닉스의 기술력으로 실현됐다. 이 밖에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사회 혁신과 비즈니스에 어떻게 접목할지 모색하는 국제 콘퍼런스도 열렸다.

금천예술공장은 인근 근로자들의 쉼터로도 활용된다. ‘셀프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금천예술공장 관계자는 “점심시간이면 작업복 차림으로 20~30명씩 찾아와 커피를 마시고 탁구나 배드민턴을 치고 돌아가곤 한다”고 말했다.
[SPECIAL REPORT] 예술과 산업의 만남…지역을 살리다
이 같은 사례는 모두 문화를 매개로 한 도시 재생의 일환이다. 서울문화재단은 창작 공간 프로젝트를 통해 도심 속 버려진 공간 10곳에 문화를 덧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밖에 30년 이상 서울 시민에게 물을 공급해 온 구의취수장이 거리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거리 예술 장르와 잘 맞아떨어지는 공간이 취수장이다. 층고가 높고 긴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 트렌드인 거리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 제작소 및 예술 센터로는 국내 최초다.


예산 퍼붓기·리모델링 사업 우려도
문화적 요소를 활용한 도시 재생은 2000년대 이후 주목 받은 도시 정책이다. 탈산업화 과정에서 한때는 첨병 역할을 했던 제조업 중심의 산업 인프라들이 유휴 공간으로 전락하면서 지자체마다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가 숙제로 떠올랐다. 문화적인 접근에서 산업 인프라를 리뉴얼·재활용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재개발의 관점이 아닌 재생의 관점에서 유산은 존치하되 기능과 용도를 새롭게 변모시키는 접근 방식이다. 미국의 테이트모던이 대표적인 벤치마킹 사례다. 대형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바꿔 그 자체로 관광 명소가 된 사례다.

국내에서도 제2의 테이트모던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지속됐다. 최근에는 옛 기무사 터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조성한 사례도 주목 받는다. 국립극단은 서울역 뒤쪽, 옛 기무사 수송대 부지에 둥지를 틀었다. 국방부의 승인을 받아 현재 공연장과 연습실로 쓰고 있는데, 2017년께 예술의전당과 같은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비슷한 사례들이 눈에 띈다. 인천 중구 해안동 일대는 1883년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 문화재 및 1930~194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잘 보존된 구역이다. 이곳 건축물은 리모델링을 통해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재탄생했다. 창작 스튜디오·공방·자료관·교육관·전시장·공연장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돼 관광 명소를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관계자는 “아트 플랫폼 바로 옆에 차이나타운과 신포동이 자리하고 있어 연계 관광 코스로 이름을 알리면서 상권이 부활했다. 카페와 공방 등이 자생적으로 생기면서 문화 거리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SPECIAL REPORT] 예술과 산업의 만남…지역을 살리다
문화를 통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체는 민간과 문화재단으로 구분된다. 초창기에는 미술 관련 단체들이 폐교를 작업실로 활용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평창 감자꽃스튜디오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99년 이후 분교에서 버려진 산골 폐교가 된 이곳이 개인에 의해 2005년 ‘감자꽃스튜디오’로 거듭났고 지역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원주 후용리에는 극단 노뜰이 만든 후용공연예술센터가 좋은 정착 사례로 언급된다. 문 닫은 초등학교를 공연예술센터로 조성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많은 도시 정책 중 문화를 통한 도시 재생이 활발한 이유는 문화 콘텐츠의 특별한 능력에 있다. 마르셀 뒤샹의 ‘샘’에서 볼 수 있듯이 흔한 변기 하나도 작가의 눈으로 보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문래동에서 8년째 설치 미술을 하고 있는 예병선 작가는 “예술가는 미학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꾸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낡고 없어져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곳이 예술론이 개입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전혀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보존하고 그것과 공존하면서도 ‘가치’를 지닌 공간, ‘역동’하는 공간으로 재해석된다.

문화 예술 정책의 흐름도 맥을 같이한다. 문화 예술 정책 패러다임은 과거 문화 예술 창작 활동을 직접 지원해 주는 구도에서 최근 지역 내 유휴 공간을 활용해 지역사회와 사회·경제·문화적 부가가치를 함께 만들어 내는 ‘통합적 정책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다. 문화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사회적 관계 맺기’에 있다. 구성원끼리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으로 문화가 중요하게 활용된다. 산업적 부가가치와 함께 도시 사회를 튼튼하게 지속시키는 재생적 에너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최근 트렌드는 ‘지역화’로 요약된다. 지역의 문화적 수요나 정체성에 따라 각기 다른 공간 조성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적극적 지지와 자발적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문화를 통한 도시 재생이 2000년대 중반 도입기를 거쳐 현재는 부분적으로 결과가 나고 있는 과도기라고 평가한다. 이규석 서울문화재단 본부장은 “우리가 후발 주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해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도시 재생 전략 측면에서 수준이 많이 올라와 있는 상태”라고 평가했다. 특히 최근 문화 융성이 강조되며 각 지자체와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사업이 활발히 전개 중이다.

이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성과 중심의 관 주도 사업이 되면 자칫 이벤트성 ‘예산 퍼붓기’, ‘리모델링 사업’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한 문화 예술 관계자는 “지금은 버려진 공간일지 몰라도 한때는 근대를 이끌었던 역사적 스토리를 담고 있는 공간들이다. 스토리와 관계없이 건축물에 집중하면 비용만 축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변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인프라가 없다면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꼬집어 말한다. 비용을 들여 또 하나의 ‘유휴지’를 만들 뿐이라는 지적이다. 양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라는 의견이다. 문화가 한 지역에 스며들어 호흡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이벤트성 부양보다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