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지난 11월 9일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설에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현재 국내 국적 해운사 빅 2인 양사의 최근 10분기 누적 적자는 1조 원대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위원회·산업통상자원부·해양수산부·국토교통부 등 관련 부처가 구조조정 실무 회의를 거쳐 양사의 강제 합병을 결정했고 이를 2차 차관회의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라는 소식은 정부발 구조조정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 2. 이에 앞서 10월 초에는 철강 업계의 구조조정설이 파장을 일으켰다. 구조조정의 발원지는 역시 정부였다. 포스코는 최대 계열사인 대우인터내셔널을 포함한 비철강 사업 부문을 매각하도록 권고하고 현대제철은 현대차와 수직 계열화가 가능한 자동차용 강판에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철강 산업 사업 재편 기본 방향’ 보고서를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작성했고 곧 청와대 보고가 예정돼 있다는 소식이었다.

정부발 구조조정설 ‘솔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두 개의 구조조정설은 말 그대로 ‘설’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한진해운·현대상선·포스코 등 당사자로 떠오른 기업들 모두가 “들은 바 없다”며 정색하고 나섰고 정부 역시 “자발적 합병을 권유하거나 강제 합병을 추진한 사실이 없다”며 관이 주도하는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업계와 정부 모두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며 강제 합병이나 매각설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모양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의심이 걷히지 않고 있다. 정부 주도의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산업 구조 개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금융위원회는 올 들어 주요 금융 현안으로 ‘엄정하고 신속한 기업 구조조정’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시장 불안감을 확대하는 지속 불가능 기업을 빨리 정리해 경제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뜻이다. 다만 과거처럼 채권단 주도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에 긴급 자금을 수혈하는 형태는 피할 것으로 보인다. 연합자산관리(유암코)와 은행 주주들(채권단)이 함께 기업 구조조정 전문 회사를 설립하는 등 민간 주도와 시장 친화적인 방법을 활용하겠다는 게 정부가 밝힌 구조조정의 새 원칙이다.
시장의 자발적 기능을 강조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지만 구조조정의 핵심 역할은 역시 정부가 맡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 간담회를 통해 ‘상시 평가’를 강조한 임종룡 금융위원장의 발언도 정부의 이런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임 위원장은 구조조정의 원칙과 절차·형식·전담 조직 등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금융위를 비롯해 금융감독원·은행연합회·금융연구원·KDB산업은행·수출입은행·시중은행 등 정부 및 공공 기관 위주로 구성된 구조조정 태스크포스(TF)가 이미 꾸려진 상태다. 해당 TF는 올해 안으로 여신 제도 선진화에 대한 기본 방향을 내놓을 예정이다. 금융위는 또 이달 내에 구조조정 대상 기업 선정을 마치고 내년 초까지 구조조정 채권·주식 등의 인수를 완료할 방침이다. 사실상 정부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과 산업 구조 개편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한계 기업 급증…환부 제거 나선 정부
한계 기업 10곳 중 7곳 ‘만성’
정부 주도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막이 오른 것은 한국 경제가 처한 답답한 현실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6월 펴낸 금융 안정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 중 한계 기업의 증가세가 우려할 만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 감사 대상 비금융 법인 2만5452개 중 한계 기업의 수는 3295개로 조사 대상 기업의 15.2%에 달했다(2014년 말 기준). 이는 글로벌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의 12.8%(2698개)에 비해 2.4% 포인트나 늘어난 수치다. 한계 기업은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통해 금융권에서 차입한 이자나 원금을 갚지 못하고 금융 지원, 즉 빚으로 연명하는 기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이자비용)이 1 미만일 때가 이에 해당한다. 이자보상배율이 1에 못 미친다는 것은 벌어들인 이익으로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지 못한다는 뜻이다.
환부의 증상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전체 3295개의 한계 기업 중 73.9%인 2435개 기업이 2005~2013년 중 한 해라도 한계 기업이었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계 기업 10곳 중 7개 이상이 ‘만성적’이란 뜻이다. 김진성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경제연구실장은 “올 들어 국내 한계 기업 수가 더욱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예상했다.
부채 상환 능력이 부실한 고위험 기업의 차입금 비율도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LG경제연구원은 2010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고위험 기업의 차입금 비율이 2013년 31.9%를 기록한 이후 2014년 29.1%로 낮아졌다가 올해 1분기 들어 34.6%로 다시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2015년 1분기 말 현재 고위험 기업의 평균 차입금 규모는 6774억 원에 달한다.
한국은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를 계기로 채권 은행을 중심으로 한 자금 지원이 구조조정의 주를 이뤘다. ‘유동성 악화→긴급 자금 수혈→자산 매각·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자생력 확보→워크아웃 졸업’이라는 시스템이 자리 잡은 것이다. 하이닉스 등 몇몇 성공적인 사례가 나오기도 했지만 성장 엔진이 사라진 지금의 상황에선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환부 자체를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부가 개별 기업의 지원이 아닌 산업 구조 개편에 팔을 걷어붙인 것도 부실기업에 대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지원만으론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더욱이 해운·철강·조선·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이 부실 징후를 드러내며 심각하게 위축돼 더 이상 위기를 방치한다면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돋보기
부실기업 지원 탓에 장기 불황 빠진 일본
일본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부실기업에 대한 대규모 금융 지원에 나섰다. 일본 상업은행들은 자본 적정성 훼손을 우려해 정상 기업에 대해 여신을 축소한 반면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출 기간 연장 및 이자 면제 등을 통해 추가 자금 지원에 나섰다. 이에 따라 한계 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버블 붕괴 전 4~6%대였던 데 비해 1990년 후반 들어선 14% 수준으로 급등했다. 정대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일본의 한계 기업 수가 증가할수록 정상 기업의 고용 및 투자가 위축됐고 생산성이 낮은 기업의 퇴출을 막아 장기적으로는 경제 전반의 생산성과 역동성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장기 불황이 한계 기업 퇴출을 막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뜻이다.
한계 기업 급증…환부 제거 나선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