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계약으로 기업들이 헤지 포지션을 가지게 됐는지, 투기 포지션을 가지게 됐는지가 초점이 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품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가장 중요한 사안의 본질 중 하나가 간과됐다.



주식 1억 원어치를 보유한 사람이 선물 매도를 하면 주식의 하락에 대비하는 헤지 효과가 있고 주식이 없는 사람이 선물 매도를 하면 투기가 된다. 이처럼 포지션 개념을 떠난 파생 상품 자체의 환 헤지 적합성이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대법원 판결 역시 키코(KIKO: 기업과 은행이 환율 상·하단을 정해 놓고 그 범위 내에서 지정 환율로 외화를 거래하는 상품) 계약으로 기업들이 헤지 포지션을 가지게 됐는지, 투기 포지션을 가지게 됐는지가 초점이 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품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가장 중요한 사안의 본질 중 하나가 간과된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9월 26일 대법원이 키코 소송 4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해 공개심리를 열고 아직도 계류 중인 많은 하급심 재판을 위해 사례별·유형별로 기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대법원이 판시한 법리를 보면 사안을 다룰 때 재판부가 파생 상품을 이용한 금융의 헤지에 이어 가장 중요한 사안을 간과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대법원 판결 보도 자료 전문을 인용해 보자.

‘환 헤지 적합성 관련: 전체 환율 구간이 아닌 일부 구간에서만 환위험이 회피가 된다고 하여 구조적으로 환 헤지에 부적합하다고 단정할 수 없음. 반드시 기업이 보유하는 외환 현물 전체에 대해 환 헤지가 가능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님. 외환 현물을 보유하거나 보유할 것을 예상하는 고객이 환 헤지 목적으로 키코 계약을 체결하면 환율이 상승해 키코 계약 자체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외환 현물 보유에 따른 환차익이 발생해 전체적 손익은 변화가 없음. 따라서 키코 계약 체결로 오히려 더 큰 환 위험에 노출된다고 할 수 없음.’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재판부의 판시대로 1달러를 소유한 기업이 1달러에 대해 키코 계약을 했을 때 재판부의 설명은 100% 정확하다. 하지만 문제는 기업들이 10달러의 계약 체결했을 때다. 즉 키코 계약이 1달러에 대해 이뤄졌으면 키코 계약 1달러에서는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현물 1달러에서 환차익이 발생해 전체적으로 손익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1달러밖에 없는 기업이 10달러에 대해 계약을 체결했을 때 있지도 않은 9달러에 대한 환 손실 가능성으로 더 큰 환 위험에 노출된다.

‘상품 자체의 환 헤지 적합성’에 초점을 맞추다가 사안의 더 큰 핵심인 ‘계약 크기의 적합성’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환율이 갑자기 2000원까지 치솟는 경험을 한 기업들이 이 정도 크기의 거래를 할 때 IMF 관리체제 때처럼 환율이 오르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제대로 된 위험 고지를 은행으로부터 받았다면 키코 계약에 선뜻 나섰을지 충분히 살폈는지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한 가지, 기업체들의 키코 자체가 무조건 사기이므로 원천무효라는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맞지 않다. 실제로 2008년 이전에는 기업들이 거래에서 이익을 보기도 했다. 오히려 무조건 사기라는 잘못된 주장에 가려 정작 억울한 점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든다. 아무쪼록 앞으로의 하급심에서 은행과 개별 기업 모두 마음속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더욱 사려 깊은 재판을 기대한다.



정지홍 리스크헷지테크놀러지 대표
[경제 산책] 키코 판결의 아쉬움
1973년생. 2000년 미 웨스트버지니아

주립대 (WVU) 수학·컴퓨터공학 전공. 2006년 시카고대 대학원 금융수학 전공. 2001년 미 필립스그룹 메드퀴스트(Philips Group Company MedQuist) 근무. 2006년 KB국민은행, IBKS 등에서 근무. 2011년 리스크헷지 테크놀러지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