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듈화·10년 품질 보증 카드로 이미지 변신…‘현대 속도’ 앞세워 영토 확장

Hyundai-Kia Chairman Mong-Koo Chung speaks at the ceremonial groundbreaking of the 1.2 billion dollar KIA auto plant that is to begin construction in West Point, Georgia October 20, 2006.   REUTERS/Tami Chappell   (UNITED STATES)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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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Kia Chairman Mong-Koo Chung speaks at the ceremonial groundbreaking of the 1.2 billion dollar KIA auto plant that is to begin construction in West Point, Georgia October 20, 2006. REUTERS/Tami Chappell (UNITED STATES)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2004 Yonhap News Agency All rights reserved.
2000년 9월 25일 서울 양재동의 현대차그룹 신사옥.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뒤 처음으로 열린 그룹 출범식에 참석한 임직원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윽고 앞문이 열리고 그룹 경영진이 입장해 단상 위에 올랐다. 좌중이 정리되자 정몽구 회장이 앞으로 걸어 나와 입을 열었다. “2005년에 세계 5위 품질을 확보하고 2010년에는 세계 5대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도록 합시다. 이것이 그룹의 미래입니다.” 이른바 ‘GT5 비전’이다. 이 말을 들은 임직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1999년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한 연간 생산량은 263만 대로 세계 10위 수준이었다.

2001년 7월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당시 사장)이 호출을 받고 회장실에 들어섰다. 정 회장은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정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때가 됐어. 미국 공장 건립을 추진해 봐.” 1998년부터 미국 진출을 두고 고민하던 정 회장이 본격적으로 앨라배마 공장 추진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05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선 현대차 NF쏘나타 생산이 시작됐다. 본격적인 ‘메이드 인 USA’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같은 해 현대·기아차는 연간 355만 대를 판매하며 세계 자동차 판매 순위 7위에 올랐다. 그리고 2010년 세계 자동차 5위 자리를 차지한 후 현재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매일 두 차례 회의 주재하며 총력전
1967년 설립된 후 포드 코티나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승용차 생산을 시작한 현대차는 고유 모델인 포니에서부터 쏘나타·그랜저·싼타페·제네시스에 이르기까지 70여 개 모델을 출시하면서 성장세를 이어 왔다. 경쟁력 있는 신차 출시와 품질 확보, 해외 생산 기지 확충 등을 공격적으로 진행한 결과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과감한 결단에는 그만큼의 위험이 뒤따랐다. 도전을 성공으로 바꾸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를 맡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병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했다. 글로벌 톱 5 달성을 위해선 추가적인 해외시장 확대가 절실했다. 미국 진출 카드를 꺼내 든 이유다.

위험 부담은 컸다. 미국 현지 진출이 실패하면 현대차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고, 이는 그룹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 진출은 이미 한 번 실패한 바 있었다. 1993년 현대차는 캐나다 브로몽 공장에서 완성차 공장을 철수한 전력이 있었다. 소비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더 큰 문제였다. 포니·엑셀로 인해 현대차의 브랜드 위상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4999달러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얻으며 1986년 첫해에만 26만 대를 팔았지만 잦은 고장으로 소비자의 불만이 쌓이면서 진출 3년째부터 판매량이 급감했다. 결국 판매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고정관념은 무섭다. 아우디 역시 1986년 미국 시장에서 ‘아우디 5000’ 모델의 ‘의도하지 않은 가속’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뒤 아직까지 고전하고 있을 정도다. 현대차는 승부수가 필요했다.

정 회장은 미국 진출을 추진할 때 하루 두 차례 회의를 주재했다. 아침에 출근 직후 회의를 소집했고 그날 오후 다시 회의를 열어 결론을 내기도 했다.

모듈화 전략이 해법으로 떠올랐다.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을 몇 개의 큰 덩어리로 나눠 미리 조립한 뒤 이를 완성차 공장에서 최종 조립하는 것을 말한다. 파워팩, 콕핏, 도어, 프런트 범퍼 등을 모두 모듈화했다. 2만 개에 달하는 부품을 하나하나 조립하는 것보다 쉬워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완성차 최종 조립 전 모듈 단계에서 결함 여부를 판단할 수 있으니 조치도 용이하고 품질 안정화도 이룰 수 있었다. 2004년 현대차의 첫 모듈화 설비가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 들어섰다. 이후 현대차의 모든 공장으로 모듈화 공정이 확대됐다.

품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꿔야 했다. 현대차는 미국 공장 건립에 앞서 1998년 12월 10년·10만마일 보증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보증에는 비용이 들어간다. 재경팀에서 거세게 반대했다. 보증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에 회사 수익성 악화가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또한 ‘국내 소비자들에게서 돈을 벌어 미국 소비자들을 위해 쓴다’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애프터서비스 혜택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조치 없이는 땅에 떨어진 미국 소비자들의 신뢰를 끌어올릴 방법이 없기에 추진을 감행했다. 이어 2000년 품질총괄본부를 그룹에 신설하고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JD파워의 현대·기아차 연도별 신차 품질 조사에 따르면 현대차는 2000년 전체 브랜드 37개 사에서 34위에 불과했으나 2004년 7위, 2006년 3위까지 급상승했다. 메르세데스-벤츠·렉서스·인피니티 등 럭셔리 브랜드를 제외한 일반 브랜드 대상 순위에서는 2002년 23개 가운데 16위였지만 2009년 1위 자리에 올랐다.


시장을 좇아 세계로
현대·기아차는 2005년 가동을 시작한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발판 삼아 전 세계 각지에 신규 생산 기지를 설립했다. 현대차는 2008년 체코 노소비체, 201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2012년 브라질 파라시카바, 2014년 중국 쓰촨성 등이다. 해외 생산 기지 확대는 쉴 틈 없이 진행됐다. 신규 공장 가동 시점이 2~3년의 간격을 보였다는 것은 새 공장을 완공했을 때 이미 다른 지역에 새로운 공장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떴다는 뜻이다. 현대차그룹 출범 전인 1997년과 1998년 지은 터키 이즈미트와 인도 첸나이 공장, 2002년 생산을 시작한 중국 베이징 공장까지 합치면 현대차는 총 해외 7개국에 8개 공장을 운영 중이다. 기아차는 2002년 중국 옌청에서 첫 해외 공장 가동을 시작한 뒤 2007년 슬로바키아 질리나, 2009년 미국 조지아로 지도를 넓혀 갔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기아차 성장의 열쇠가 미국 시장에 있었다면 최근에는 그 무게중심이 중국 시장으로 이동했다. 현대차의 중국 베이징 공장은 2010년 말 3공장 기공식을 갖고 100만 대 생산 체제를 갖췄다. 실제 생산량은 지난해 90만 대에서 올해 처음으로 10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중국 시장 성공의 1등 공신은 아반떼의 중국 현지 전략형 모델인 ‘위에둥’이다. 여기에 엘란트라(아반떼 XD), EF쏘나타 등으로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다. 빠른 생산능력 확대에 중국 베이징에서는 ‘현대 속도’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기아차 옌청 공장도 지난해 55만 대를 생산했다. 기아차 전체 해외 생산량(123만 대)의 절반 가까이를 중국 공장이 차지하는 셈이다.

현대·기아차는 해외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현지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물류비용을 감축할 수 있었다.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도 수익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생산성도 해외 공장이 더 나은 상황이다. 현대·기아차는 2012년 처음으로 해외 공장 생산이 국내 공장을 추월했다. 올해도 1~6월 전체의 54%를 해외에서 생산했다.

디자인 혁신도 한몫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정의선 부회장(당시 기아차 사장)이 주도했다. 2006년 9월 파리모터쇼에서 기아차의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고 이를 주도할 핵심 인물을 영입했다. 자동차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다.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사장(당시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은 월터 드 실바(폭스바겐 총괄 디자이너), 이안 칼럼(재규어 총괄 디자이너)과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힌다. 독일 자동차 회사 아우디를 거쳐 폭스바겐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일하다 2006년 8월 당시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삼고초려 끝에 기아차 최고디자인책임자(CDO)로 옮겨 왔다. 이후 ‘직선의 단순화’를 디자인 철학으로 정하고 중형 세단 K5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스포티지R·쏘울 등을 내놓으며 기아차에 정체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명 ‘슈라이어 그릴’이라고 불리는 기아차 특유의 패밀리룩 ‘호랑이코’를 만들었고, 이는 기아차 K 시리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디자인 경영과 연산 1000만 대 시대
세계시장에서도 기아차의 디자인은 화제였다. 2009년에는 박스 카 쏘울이 한국 차 최초로 세계 3대 디자인상인 레드닷 디자인상 제품 디자인 부문상을 받았다. 기아차의 유럽 전략 모델인 ‘벤가’는 한국 양산 차 처음으로 iF 디자인어워드 수송 디자인 부문상을 받았다. 기아차가 ‘슈라이어 효과’를 보며 승승장구하자 페르디난드 피에히 폭스바겐그룹 이사회 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터 슈라이어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미중 빅 2 시장 뚫은 정몽구의 승부수
슈라이어 사장은 지난해 1월 현대차의 디자인까지 총괄하게 됐다. 현대차는 2009년 ‘플루이딕 스컬프처(흐르는 물이 빚어낸 듯한 자연스러움)’를 디자인 철학으로 내세우고 YF쏘나타를 내놓으며 화제가 되긴 했지만 전문가들로부터 “아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슈라이어 사장에겐 현대차의 디자인에 생명을 불어넣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현대·기아차의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과 생산 기지 확충은 품질 안정화, 디자인 혁신과 맞물리며 급속하게 성장했다. 2008년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경기 침체기는 오히려 현대·기아차가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지난 몇 년간 유지돼 온 원화 약세 덕을 톡톡히 보며 세계시장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원화는 강세로 돌아섰고 글로벌 경기 침체에 신음하던 글로벌 경쟁자들은 수비수에서 공격수로 전환했다. 도요타는 연간 생산 1000만 대를 목전에 뒀으며 폭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GM)는 물론 르노-닛산 얼라이언스까지 인수·합병(M&A)과 제휴 등을 통해 1000만 대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현대차 중국 충칭 공장, 기아차 멕시코 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고 현대차 러시아·브라질 공장 증설 등을 통해 몸집을 키우고 있다. 1000만 대는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이제 문제는 기술 경쟁이다. 엄격해진 배기가스 규제와 충돌 성능, 연비 규제와 까다로워진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연구·개발(R&D) 투자와 함께 자사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경쟁사와의 기술제휴 및 M&A 등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현대·기아차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룹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전략은 ‘글로벌 경쟁에서 고립을 자초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조처럼 수면 아래서 활발하게 기술제휴를 추진한다’는 반론도 있다. 현대·기아차는 진정 외톨이일까. 한층 격해진 ‘기술 경쟁 시대’는 이미 막이 올랐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