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당국 방관으로 돈맥경화 최악, 정책 폭탄보다 정책 수요층 협력 중요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백약 무효’…좀비 국면 우려되는 한국 경제
경제의 혈액인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다는 말이 들린 지도 꽤 오래됐다. 거듭된 경고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통화 당국의 방관자적 자세로 ‘돈맥경화’ 현상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경제의 좀비 국면이 이미 시작됐다’는 우려와 함께 일본식 ‘잃어버린 10년’ 가능성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한국 경제를 들여다보면 경제개발 시작 이후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생산 여건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제조업 환경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것은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 특히 청년층들이 감소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요인이다. 인력 수요와 공급 간의 불일치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만성적인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노동력에 이어 생산에 필요한 자본도 저축률 하락 등으로 갈수록 성장률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축률이 하락하는 요인으로 정치권의 포퓰리즘적인 사회보장 지출 확대, 사회 안전망 강화에 따른 가계의 예비적 동기의 저축 필요성 감소 등이 지적되고 있다. 기업의 현금 보유는 사상 최대 규모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백약 무효’…좀비 국면 우려되는 한국 경제
특히 기업은 ‘환율 쇼크’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원화 가치는 달러화·엔화·위안화·유로화 등 주변 혹은 경제 강국 통화에 대해 모두 강세인 점이 종전과 다르다. 한국 기업들이 더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화 절상’이 주변국의 정책 요인이 강한 상황에서 1기 경제팀이 너무 소극적이고 안이하게 대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패와 뇌물 사건도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뇌물과 부패 정도는 정치적 영향력과 행정 규제에 비례한다. 독점적 이윤인 경제적 지대(rent)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은 치열한 로비 활동을 전개하고 이 과정에서 뇌물과 부패가 만연되는 소위 ‘지대 추구형 사회(rent oriented society)’가 된다.


일본 ‘잃어버린 20년’가져 온 5대 함정
대외적으로는 한국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높아진 국제 위상에 맞게 내수 시장이 발전되지 않음에 따라 통상 마찰도 잦아지고 있다. 특히 기업 간 불균형이 심화된 상황에서 특정 기업의 경우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간 것에 따른 착시 현상까지 겹치면서 주요 교역국으로부터 통상 마찰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점도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장기간 침체 국면에 빠져들 때 겪었던 고질적인 5대 함정이 한국 경제 내부에서 나타나면서 ‘잃어버린 20년’에 대한 우려도 가세되고 있다는 점이다. 5대 함정이란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 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경기 부양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책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채무와 가계 부채가 각각 1000조 원이 넘어 소비나 투자,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 지출까지 못하는 ‘빚의 함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에 빠져 있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우려다. 이 상황에 놓이면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증대돼 예측 기관들의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에 빠지게 된다.

특정국에서 좀비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대표적인 지표로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를 꼽는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high-powered money:고성능 화폐)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현금 보유 성향과 예금 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한 나라의 돈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는 통화유통속도다. 통화유통속도는 일정 기간 동안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통화승수 2001년 이후 최저 수준
통화승수는 한국은행이 이 지표를 처음 발표했던 2001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5월 통화승수는 19.4배로, 마침내 20배 밑으로 추락했다. 그만큼 국민들의 현금 보유 성향이 늘어나 시중에서 돈이 퇴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사상 최대 규모다.

통화유통속도도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연초에 반짝 회복세를 보였던 통화유통속도는 지난 5월 0.754대로 재추락했다.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경제 활력 지표인 예금회전율과 요구불예금회전율도 5월에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미국 등 각국이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가 살아나면서 증시와 부동산 시장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다시 심해지는 가장 큰 요인은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가계는 더 이상 빚을 내서 소비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도 설비투자를 꺼리는 성향이 여전하다. 서민층과 중소기업들이 체감으로 느끼는 금융사의 대출 태도가 더 깐깐해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좀비 현상이 나타날 때 정책 당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정책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효과가 없으니 그대로 손 놓고 있는 경우다. 반대로 이럴 때일수록 정책 당국이 나서 떨어지는 경제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까지 한국은행 등이 보여 온 태도는 어느 편에 속할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뭄이 심해져 더 깊어진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더 많이 넣어야 하고 때맞춰 펌프질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6년 전 미국은 사상 초유의 금융 위기를 당해 깊은 나락으로 추락만 하던 경제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빅 스텝 금리 인하(기준 금리를 한꺼번에 서너 단계씩 인하)’와 헬리콥터 밴식 돈 푸는 정책을 추진했다.

유럽과 일본도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취임 이후 성장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일본도 아베 정부가 출범한 이후 발권력을 동원한 엔저 정책으로 오랜만에 경제 활력을 되찾는 분위기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 정책 당국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특히 한국은행이 그렇다. 둑(금리)도 낮추고 물(유동성)도 충분히 공급해 넘쳐흐르도록 해야 한다. 금융과 실물 간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판 오퍼레이션 정책(단기채 매도·장기채 매입)’도 필요하다. 도덕적 설득을 통해 기업과 국민들의 의견과 협조를 구해야 한다.

모두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많은 정책을 내놓기보다 정치권과 정책 당국의 ‘마라도나 효과(마라도나에 대한 믿음이 강해 수비수가 미리 행동하면 다른 쪽에 공간이 생겨 골 넣기가 쉽다는 의미)’가 절실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책 수용층이 ‘프로보노 퍼블리코(공익을 위하여)’ 정신을 발휘한다면 ‘잃어버린 20년’ 우려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