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이냐, 폐쇄냐의 딜레마

[Info@Biz] ‘개방’의 시대 가고 ‘폐쇄’가 시장 이끈다
지난 6월 4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한쪽에선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이 모여 조그만 콘퍼런스를 열었다. ‘CC 아시아 퍼시픽 콘퍼런스’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이하 CC코리아) 주최로 열린 행사에선 개방과 공유의 라이선스 규약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경제·사회·문화적 실험 움직임들을 소개했다.

CCL은 당초 저작권의 태생적 폐쇄성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일일이 허락을 받는 대신 저작자가 출처를 밝히거나(BY), 상업 용도로 쓰지 않거나(NC), 내 저작물을 마음대로 변경하지 않는(ND) 식의 몇 가지 조건을 지키는 것으로 저작물을 자유롭게 가져다 쓰도록 한 것이 CCL이다.

CCL 덕분에 이용자들은 저작물을 공유하며 새로운 창작물도 쏟아냈고, 이는 ‘열린 문화(Open culture)’란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었다. 정보기술(IT)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방(Open)’은 IT 기업이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여겨졌다.

IT 기업이 자기네 서비스를 개방하면 이를 가져다 쓰는 많은 응용 서비스들이 생겨나고, 자연스레 이용자를 확보하며 자신들의 울타리를 넓히게 되는 것이다. 서비스와 서비스가 섞이고 엮이는 과정에서 애당초 생각지 못했던 혁신도 적잖이 일어난다. 그게 개방이 가져다주는 생태계다.

그런데 이에 따른 고민이 대두됐다. 언제부턴가 개방이 주는 가치 못지않게 폐쇄된 시스템에서 눈에 띄는 혁신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CC 아시아 콘퍼런스에서 로렌스 레식(Lawrence Lessig)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꺼내든 화두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레식 교수는 CC 창립을 주도한 세계적 법학자이자 ‘오픈 진영’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는 석학으로 꼽힌다.

IT 기업의 ‘개방형’ 생존 전략, 힘 잃어

레식 교수의 물음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오픈은 정말 혁신을 위한 필수 요소인가.’ 이 같은 물음이 레식 교수 입에서 나온 사실만으로도 사건이다. 오픈은 지금까지 혁신과 동의어였다. 10여 년이 넘도록 우리는 폐쇄된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폐해와 부작용들을 뼛속 깊이 각인해 왔다.

2005년을 앞뒤로 이른바 웹 2.0 물결과 더불어 개방과 공유란 가치가 전면에 떠오르면서 IT 산업은 급속히 개방화 흐름에 동참하게 됐다. 수많은 혁신 사례들도 쏟아졌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뒤로 처지고 아마존과 구글이 혁신 기업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되묻는다. ‘오픈은 정말 혁신을 위한 필수 요소인가.’ 이는 IT 생태계 변화와 열린 문화 진영의 고민과 정확히 호응한다. 플랫폼으로서의 인터넷이 개방에서 폐쇄형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 때문이다.

레식 교수의 진단이 흥미롭다. “MS는 1996년 당시만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기업이었다. 당시 MS 플랫폼은 오픈된 플랫폼이었다. MS는 자기 플랫폼 위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돌아가는지 통제하지 않았다. 운영체제(OS) 규칙만 따르면 됐으니까.”

하지만 MS는 욕심을 부렸다. OS 독점을 무기로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IE)를 끼워 팔아 경쟁 제품인 넷스케이프를 죽이려고 했다. 이게 빌미가 돼 MS는 유럽 법원으로부터 반독점 혐의를 받았고, 이후 MS는 더 이상 개방을 따르는 기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사건은 특정 기업이나 비도덕 기업이 이용자 권한을 통제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개방의 물꼬는 다른 데서 터졌다. 모질라재단과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SW) 진영, 그리고 새로운 IT 강자로 떠오른 구글이다. 모질라재단은 오픈 소스 웹브라우저 파이어폭스로 MS에 대항했다.

그건 곧 개방과 폐쇄의 대결이었다. 파이어폭스는 IE란 닫힌 시스템에 맞서 전 세계 개발자들이 스스로 원하는 기능을 만들어 올리고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내려 받아 쓰도록 했다.

구글은 아예 플랫폼을 활짝 열었다. 주요 기능을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운영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사이의 통신에 사용되는 언어나 메시지 형식)로 개방해 이용자가 쉽고 빠르게 원하는 정보나 서비스를 받아보도록 했고 검색 결과도 이용자가 선택하도록 했다.

상황은 바뀌게 마련인가. 오픈 플랫폼에도 위기 징후가 나타났다. 애플의 등장 때문이다. 애플은 오픈 플랫폼 진영의 규칙을 뒤집었다. 개발자와 이용자에게 철저히 자기네 규칙을 따르도록 제한했다.

애플 앱스토어에 응용 프로그램(이하 ‘앱’)을 등록하려면 애플이 정한 약관에 따라 결제 조건과 서비스 범위를 맞춰야 한다. 애플 앱스토어를 거치지 않고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용 앱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애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건 바로 그 폐쇄적 생태계 안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는 발매 첫날에만 70만여 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고, 최근 나온 아이폰4는 첫날에만 170만 대를 팔아치웠다. 애플 앱스토어는 20만 개의 앱을 확보한 전 세계 최대 단일 시장으로 우뚝 섰다.

개발자들은 애플의 통제가 불편했지만 그만큼 대가를 받았다. 굳이 서로 다른 OS나 휴대 기기를 위해 기능을 뜯어고치고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폰 OS, 단일 아이폰 기종만을 위해 앱을 만들면 거대한 시장에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플은 통제권을 쥐는 대신 시장을 열어줬다. 이용자에겐 언제나 눈높이보다 높은 기능과 성능을 안겨줬다. 눈높이가 다른 이용자에겐 싫으면 쓰지 말라고 배짱을 부렸다.

구글 안드로이드, 표준 없어 ‘자중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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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또 어떤가. 페이스북은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든 이용자의 라이선스를 박탈할 권한을 쥐고 있다. 이용 요금도 임의로 정할 수 있으며 과금 방법도 자신들이 통제한다.

트위터는 주요 기능을 API로 개방해 거대한 트위터 생태계를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생태계에서 놀던 주요 서비스들을 인수하며 직접 통제권을 쥐려는 의도를 슬슬 드러내고 있다.

폐쇄된 플랫폼들이 통제권을 쥐고 혁신을 일으키는 반면 반대 진영은 다리가 적잖이 풀린 모습이다. 가장 든든한 오픈 플랫폼이었던 구글은 최근 선보인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가 잇따라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며 힘 빠진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독일과 호주에서 무선 랜(Wi-Fi)을 통해 개인 정보를 불법 수집한 사실이 드러나며 오픈 플랫폼으로서의 도덕성마저 타격을 입었다.

모바일 시장을 겨냥해 야심차게 내놓은 오픈소스 운영체제 ‘안드로이드’도 딜레마는 여전하다. 안드로이드는 파이어폭스처럼 누구나 가져다 쓰고 소스 코드를 바꿔 쓸 수 있는 개방형 운영체제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는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제품별로 기능이나 버전이 제각각이라는 골칫거리도 함께 떠안았다. 개발자가 제대로 앱을 만들어 팔기 위해 삼성전자 갤럭시S와 구글 넥서스원용 앱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단말기 제조사 입장에선 시도 때도 없이 업데이트되는 안드로이드 OS를 지원하는 일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오픈의 효과가 부작용으로 나타난 셈이다.

개방의 힘을 굳건히 믿는 진영의 고민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레식 교수는 새로운 방법으로 해법을 모색한다. ‘플랫폼’과 ‘문화’를 떼어 놓고 보자는 얘기다. ‘폐쇄 대 개방’이란 대결 구도가 플랫폼이 아닌 문화 영역에서 진행돼야 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방 문화가 복무할 때 진정한 개방 진영의 가치가 발휘된다. 그것이 레식 교수가 내다보는 오픈 플랫폼의 미래다.

“오픈 플랫폼이 기술적으로는 자유롭지만 핵심은 문화적 개방형이다. 지금은 ‘커먼스 풀(공유 풀)’을 갖춰야 할 때다. 상업과 비상업성이 공존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걸 제시하고 공정성이 유지된다면 상업성이 번창하도록 만들어야 할 때다.

공유하고 공유하지 않는 방법을 이용자가 직접 제어해야 한다. 자유가 유행처럼 지나가지 않도록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이희욱 블로터닷넷 기자 asadal@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