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 삼성SDI에 합병…이학수 전 부회장 등 핵심 인력 배출해

특히 제일모직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녔던 선대 회장이 대구공장을 돌아보고 있다.1964.7.4
특히 제일모직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녔던 선대 회장이 대구공장을 돌아보고 있다.1964.7.4
설립 60주년을 앞둔 제일모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SDI는 3월 31일 제일모직을 흡수합병 한다고 밝혔다. 합병 비율은 1 대 0.4425482다. 제일모직 주주는 주당 삼성SDI 주식 0.44주를 받게 된다. 제일모직과 삼성SDI의 합병 법인은 오는 7월 출범한다. 현재 제일모직은 2013년 9월 회사의 모태 사업인 섬유 및 패션사업부를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에 넘긴 뒤 화학과 전자재료 사업이 남아 있는 소재 전문 기업이다.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에서 남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제일모직은 1954년 9월 설립됐다. 당시 사명은 ‘제일모직공업 주식회사’였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은 1953년 삼성그룹 내 첫 제조업 기업인 제일제당을 세워 큰 성공을 거둔다. 이 회장은 이 성공을 바탕으로 자본금 1억 환(약 2500만 원)을 들여 모직물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때 한국은 아직 제대로 된 섬유산업이 싹도 트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모직 기계를 수리해 가동하는 것이 몇 개 돌아가고 있었지만 말이 모직물이지 군용 모포나 다름없었다. 양복은 대개 미군복을 염색한 것이었다. 당시 번듯한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다. 마카오에서 밀수입된 영국산 모직으로 만든 양복이었다. 그러나 마카오에서 들여온 영국산 모직물로 만든 양복 한 벌 값은 일반 회사원의 3개월 치 봉급에 해당하는 6만 환이었다. 이 회장은 항상 이 마카오 양복을 입고 다녔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이 회장을 ‘순모 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챙겨 입은 ‘골덴텍스’
하지만 이 회장은 국민 모두가 어렵지 않게 양복을 입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한국의 첫 모직 공장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 말은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했다. 굳이 하려면 모직보다 위험이 적은 면방을 하라고 했다. 모직은 양털로, 면방은 목화로 만든다. 모직이 면방보다 훨씬 더 만들기 어렵고 값도 비싸 그만큼 실패할 위험도 크다.

하지만 이 회장은 도전을 택했다. 그의 도전에 한 미국 모직 기업 임원은 “한국이 자력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된다면 내가 하늘을 날아 보이겠다”고 비꼬기까지 했다. 그의 말은 곧 허언이 됐다.

제일모직은 보란 듯이 2년 후인 1956년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특히 이 회장은 제일모직이 첫 모직을 생산한 날부터 제일모직의 양복지인 ‘골덴텍스’로 만든 옷만 입고 다녔다. 국산 제품이 좋지 않다는 당시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였다. 정부 고급 관리들은 이 회장이 여전히 영국제 순모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닌다고 오해했다. 그럴 때마다 이 회장은 슬며시 양복 안에 찍혀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글자를 보여주기도 했다.

제일모직은 골덴텍스를 생산한 첫해에 5억 환이나 손해를 봤다.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 한 벌 값은 1만2000환으로, 영국제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불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멋쟁이’이자 ‘한국 최고의 부자’가 골덴텍스를 입는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판매가 급상승했다.

결국 제일모직은 1958년 첫 흑자를 올리면서 한국 섬유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제일모직 대구 공장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의피창생(依被蒼生: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란 휘호를 남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공장을 방문해 “애국적 사업이다. 제일모직의 노력으로 온 국민이 좋은 국산 양복을 입게 됐다”라고 감격했다. 제일모직은 1975년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했고 1년 뒤 사명에서 ‘공업’을 떼어냈다.

제일모직은 한국 섬유산업의 산 역사다. 1961년에는 모직물을 국내 최초로 해외에 수출했다.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국제양모사무국(IWS)이 부여하는 울마크 사용권을 획득했고 1996년에는 비(非)접착 공법으로 만든 최고급 신사복 ‘카디날’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사복 명품 인증을 받았다.

직물 사업으로 출발한 제일모직은 이후 패션·케미컬·소재 사업에 차례로 진출하면서 혁신을 거듭했다. 1990년대에는 케미컬 사업, 2000년대에는 전자재료 사업에 뛰어들며 사업을 다각화했다. 제일모직 변신의 역사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남 여수에 첨단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생산 공장을 건설했고 고기능성 합성수지 산업에도 진출했다. 1995년부터는 반도체용 소재 산업에 뛰어들었고 2002년에는 구미 공장에 전자재료 양산 기지를 준공하는 등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다.

변신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2년 케미컬사업부 매출이 처음으로 패션사업부를 앞질렀다. 패션사업부는 2010년 전자재료사업부에 2위 자리마저 내줬다. 더 이상 제일모직을 단순한 패션 회사로 부를 수 없게 됐다.
[비즈니스 포커스] 60년 역사 마감한 ‘삼성의 인재 사관학교’
이 때문일까. 제일모직은 오랫동안 ‘삼성의 인재 사관학교’로도 불렸다. 이학수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 김징완 전 삼성중공업 부회장, 이상현 전 삼성전자 사장, 송용로 전 삼성코닝 사장, 유석렬 전 삼성생명 사장, 김인주 삼성선물 사장이 모두 제일모직 출신이다

마침내 제일모직은 2013년 큰 변화를 맞는다. 그해 9월 제일모직은 패션사업부를 분리, 삼성에버랜드에 넘겼다. 매각 대금은 1조 원이다. 이는 삼성그룹의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과 함께 후계 구도 확립을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급기야 2014년 3월 삼성SDI가 제일모직을 흡수합병하기로 결정하면서 제일모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법인은 사라져도 사명은 남을 확률 커
하지만 제일모직은 삼성 계열사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일모직의 회사 설립연도는 삼성물산(1948년)이나 제일제당(1953년)보다 늦다. 그러나 제일모직은 그룹의 실질적인 모태로 인정받는다. 앞서 설립된 첫째 제조회사인 제일제당, 삼성의 시작이 된 삼성물산과 함께 그룹의 ‘젖줄’이 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1969년)·호텔신라(1973년)·삼성전기(1973년)·삼성항공(1977년) 등을 차례로 설립한 밑천이 된 것이다. 삼성은 이 세 기업을 바탕으로 그룹 내 기타 기업을 지원하고 원조했다.

그렇다 보니 창업주의 애착이 강한 회사다. ‘마카오 신사’에서 ‘한국 신사’로 스스로를 바꿀 정도로 제일모직을 아꼈다. 실제로도 이 회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그만큼 그룹 내에서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합병이 마무리돼 제일모직 법인은 사라질지라도 ‘제일모직’이라는 이름 자체는 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지난해 패션부문을 인수한 에버랜드에서 제일모직 브랜드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패션사업 인수 당시 에버랜드는 필요하다면 제일모직이라는 상호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계약에 포함했다.

실제로 에버랜드는 제일모직 상호 사용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의 고위급 인사가 사명을 ‘삼성에버랜드’에서 ‘제일모직’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것. 윤주화 삼성에버랜드 사장은 4월 2일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사장단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제일모직 사명을 사용하는 것을 확정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날 김봉영 삼성에버랜드 사장도 같은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삼성에버랜드의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변경해 전통을 이어가고 ‘에버랜드’는 테마파크 브랜드로 가져가겠다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태다.


이홍표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