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 같아도 행동·사고 어색하면 호감도 급락… ‘불쾌한 골짜기’ 넘어야

[테크 트렌드] 인간을 닮은 로봇이 실패하는 이유
지난 11월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의 흥행몰이가 대단하다. 이미 900만 관객을 돌파하고 1000만 관객을 넘어설지 예상이 분분할 정도이니 말이다. SF 영화라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주제도 아니고 제대로 이해하자면 ‘상대성 이론’의 머리 아픈 지식이 필요한데도 이만큼의 흥행 성적을 거두는 것에 외신들까지 놀라워하고 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들도 눈치챘겠지만 이제 이런 영화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유한한 시간의 굴레 속에서 늙어가는 인간을 대신해 우주선을 지키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로봇들이다. ‘인터스텔라’에는 커다란 직육면체 같은 볼품없는 모습에 사람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니터 스크린이 앞에 있는 로봇 타스(TARS)와 케이스(CASE)가 등장한다. 평소에는 우주선 바닥에 착 엎드려 있다가 탐사에 나선 우주인들이 위험에 빠지자 안고 뛰다시피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장거리 탐사와 로봇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또 다른 영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12년 작 ‘프로메테우스’다. 여기서도 머나먼 행성으로 여행하는 동안 잠들어 있는 인간을 대신해 데이빗이라는 로봇이 우주선을 관리한다. 그런데 이 두 영화에 나오는 로봇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터스텔라’의 타스와 케이스는 누가 봐도 인공지능 컴퓨터가 달린 기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 영화상의 설정도 해병대의 야전 보조 로봇으로 쓰이던 것이어서 사람 같은 생김새보다 내구성·기동성과 같은 기능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설계돼 있다. 반면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겉모습이 사람과 똑같은 안드로이드(android)다.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기본이고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서 피터 오툴의 헤어스타일을 흉내 내고 로봇과 인간의 차이에 대한 의문과 사유, 도전까지 할 정도다.


‘극과 극’을 보이는 영화 속 로봇
이러한 극명한 대조는 사실 일상 속 로봇의 역할이 확대되는 가운데 숙고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과연 로봇을 설계할 때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느냐의 문제다. 이에 대한 고민은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일본의 유명한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가설이다.

1970년에 소개된 이 가설의 내용은 이렇다. 로봇이 처음에 인간과 전혀 다른 기계에서 출발해 점점 사람과 유사하게 발전하면 로봇에 느끼게 되는 인간의 호감도 같이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생김새가 인간과 닮았지만 행동이나 사고가 뒷받침되지 않는 어중간한 지경에 이르면 호감이 급격히 떨어진다. 여기서 극한으로 나아가 완전히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면 다시 호감은 급상승하게 된다. 즉, 인간과 어설프게 닮은 로봇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해하거나 괴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감정의 골짜기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이 감정의 골짜기 바닥에 있는 대표적인 존재로 ‘좀비(zombie)’를 떠올려보면 된다. ‘레지던트 이블’, ‘월드워Z’ 같은 영화에서는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좀비가 되지만 사실 사람과 생김새가 같은데 흐리멍덩한 표정에 막무가내로 사람을 쫓아다니는 로봇이 있다면 그것도 좀비와 다를 게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런 존재에 대해서는 선천적으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인터스텔라’의 타스와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어찌 보면 이 불쾌한 골짜기 양쪽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타스는 인간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이 되고 운동 기능도 제법 되지만 생김새가 달라 그냥 위협적이지 않은 똘똘한 기계로 느껴진다. 데이빗은 아예 인간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니 그냥 과거의 머슴이나 노비 정도를 대하는 느낌이다. 둘 다 제법 호감이 가는 로봇들이다.

그런데 이들 두 로봇의 어중간하게 섞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어중간한 로봇은 인간에게 짜증·불편·두려움을 안겨주고 외면받을 공산이 크다. ‘인터스텔라’의 타스가 인간과 비슷한 움직임을 하는 보행 로봇이었다면 관객들은 우스꽝스러운 로봇에 신경 쓰여 주인공들의 애절한 감정에 몰입되지 않았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이 ‘스타워즈’의 C-3PO처럼 금속 인형 같은 로봇이었다면 역시 관객들은 데이빗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진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터스텔라’와 ‘프로메테우스’의 두 로봇 이미지도 이런 일반 관객의 마음을 읽고 쓸데없는 불편함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적정한 수준으로 기획됐을 것이다.


구글 글래스도 거부감 극복이 관건
최근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는 가정 및 일상생활용 로봇을 디자인할 때도 기업들은 이런 고민을 깊이 하고 있다. 각종 박람회·전시회에서야 기술력을 뽐내는 의미에서 인간과 그럴싸하게 닮은 로봇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소니가 아시모를, KAIST가 휴보를 내놓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시장에서 이런 로봇을 집 안에 들여놓고 싶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있어서 편리하기는커녕 뭔가 가까워질 수 없는 이질감만 남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로봇에 기대하는 필요한 특정 기능에 집중하고 생김새는 뭔가 인간보다 열등해 보이지만 판단 능력이 기대를 뛰어넘는 포인트를 주자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이미 많은 가정에서 구입하고 있는 로봇 청소기가 대표적이다. 로봇 청소기는 바닥을 바삐 기어다니는 벌레 같은 모습이어서 그만큼 기대 수준도 낮고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용케 바닥을 구석구석 잘 나누어 치우고 알아서 충전 거치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많은 이들이 만족해하는 것이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각종 가사 도우미 로봇 디자인에도 이런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가사 도우미 로봇도 한때는 과거의 하녀나 요즘의 파출부 아주머니와 같이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 역시 어설프게 만들다가는 시장의 외면만 받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단계에서는 확장된 로봇 청소기나 아마존의 물류 로봇 키바 같은 땅딸막한 모습을 갖고 다들 귀찮아하는 빨랫감이나 설거지거리를 나르고 닦은 뒤 정해진 건조대로 옮기는 그런 로봇부터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기술이든 제품화돼 시장에 보급되고 산업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러한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고 그 밑바닥에 펼쳐진 깊고 넓은 골짜기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성공이냐 실패냐를 놓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제품 가운데 하나가 역시 구글의 야심작, ‘구글 글래스’다. 구글의 창업주 세르게이 브린이 주도적으로 나서 강하게 밀어붙인 구글 글래스는 초기에 상당한 기대를 자아냈지만 시장의 반응은 아직도 뜨뜻미지근하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단순한 비관론을 넘어 이미 구글 글래스는 실패했다는 단언들이 서서히 나오고 있다.

이들이 지적하는 구글 글래스의 문제 중 하나도 바로 극복하기 어려운 감정의 불쾌한 골짜기다. 구글 글래스는 최대한 멋있고 감각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세계적인 안경 디자인 업체들과 협업했다지만 여전히 구글 글래스를 쓴 인간의 모습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어디선가 구글 글래스를 쓴 사람을 마주하고 대화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상대를 똑같은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지켜보는 제3의 눈을 가진 뭔가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인식하기 쉽다. 이처럼 구글 글래스 때문에 소통과 공감에 지장이 초래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자기중심적인 기술 마니아가 아니라면 일반인이 이를 사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구글 글래스가 보여주는 스마트 안경의 미래 자체가 어두운 것은 아니다. 지금의 구글 글래스의 디자인 수준으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앞으로 기술이 더욱 발전해 모두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현재의 안경 모습 속에 이런 모든 기능을 집약해 넣을 정도가 된다면, 즉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 같은 완벽하게 기존의 통념과 일치된 제품이 나온다면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인터스텔라’의 타스처럼 우리는 뭔가 거부감이 덜한 절충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