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처방에도 저성장·디플레 악화, “수출 확대가 돌파구” 목소리 커져

[이슈 인사이트] 고민 깊은 ECB…유로화 약세 정책 나서나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2010년 재정 위기로 휘청했던 유럽이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마침내 안정을 찾나 했었다. 그러나 최근 발표되는 경제지표들이 이러한 예상들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작년 하반기 이후 플러스 성장세였던 유럽 경제가 올해 2분기에 제로 성장, 3분기엔 8월 산업 생산 지수가 전월 대비 마이너스 1.8%로 확인됐다.

특히 유럽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독일 경제마저 8월 산업 생산이 전월 대비 4% 감소로 5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글로벌 시장이 긴장하는 분위기다. 유럽 증시는 하루 3%나 떨어지며 연중 최저치를 갈아 치우고 있고 그리스 금리의 폭등, 올해 내내 상승 추세였던 미국 다우지수도 폭락을 경험하고 있다.

저(低)성장뿐만이 아니다. 디플레이션 압력도 문제다. 유럽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6월 전년 대비 0.5%였다가 7월과 8월에 0.4%, 9월엔 0.3%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물가 목표가 2% 초반인 점을 고려하면 낮아도 너무 낮은 인플레율이다.


10월 들어 독일 경제마저 흔들
도대체 이처럼 장기화되고 있는 유럽의 저성장과 디플레 요인은 뭘까. 시장에선 구조적 요인과 정책 요인을 얘기한다. 구조적 요인은 첫째, 유럽 국가 대부분이 사회주의 색채가 강해 노동시장이 경직돼 있고 이를 사회복지로 보완하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자발적 실업자까지 포함한 실업자가 워낙 많아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효수요가 극히 부족하다는 점. 둘째, 유럽연합(EU)의 태생적 한계로 금융정책은 ECB로 통합돼 있으면서 재정정책은 각국에 위임돼 있는 구조적 문제를 들 수 있다. 금융 재정정책은 궁합을 맞추는 게 필수라고 보면 애초부터 정책 조합 (policy-mix)이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구조 요인은 워낙 복잡하니까 그렇다 치고 정책 요인들은 뭔지 살펴보자. 전문가들은 첫째, 과도한 재정 긴축. 둘째, 은행들이 안고 있는 대규모 부실채권. 셋째, 지나친 유로화 강세 등 세 가지를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우선 재정 위기 자체가 재정 적자에 따른 신용 추락에서 발생한 문제이므로 초기 재정 긴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재정 긴축 지속은 내수를 위축시켜 경기 회복을 어렵게 한다. 물론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것 자체가 수급 불균형(수요 대비 공급과잉)으로 디플레 압력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부실채권 문제도 정책 조정과 관계가 있다. 리먼 사태 때부터 대규모 부실채권 때문에 체력이 떨어진 유럽 은행들에 건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대출 대신 안전 자산 운용에 치우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의 자기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해 대출을 줄이고 독일 국채 등 안전 자산 운용을 늘리고 있다. 그 결과 기업 대출이 위축되고 경기 침체 속에서 기업 부실채권이 더 늘어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다.

유로화 강세도 생각해 볼 문제다. 독일 등 경제 대국 통화와의 연계로 강세가 유지되다 보니 성장 돌파구라고 할 수 있는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긴축 재정으로 재정적자가 다소 개선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이 유로화 강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게다가 수입 물가에도 하락 압력을 줘 현재 디플레 압력의 주범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특히 현재 원유 가격 하락, 러시아의 유럽산 농산물 수입 정지에 따른 유럽 식료품 가격 하락 등까지 겹쳐 저인플레가 가중되고 있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유럽 경제는 이도저도 아닌 저성장과 디플레 박스에 갇힐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렇게 되면 디플레에 따른 실질적 채무 부담 증가로 기업 투자가 더 줄고 경기는 더 둔화되는 악순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물론 이런 위험에 대해 ECB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ECB는 6월 마이너스 금리와 장기 저금리 대출(TLTRO) 도입을 결정한 데 이어 지난 9월 4일엔 시장의 의표를 찌르는 과감한 금융 완화 조치를 발표했었다. 정책 금리의 추가 인하(0.1% 포인트 인하)와 자산담보부증권(ABS) 매입 범위의 대폭 확대가 그것. 당초 시장에선 은행 ABS의 기초 자산으로 기업 대출 채권 정도로 생각했다가 ECB가 대상 범위를 기업 대출 채권 외에 주택 담보대출(RMBS)과 담보부사채(Covered Bond)까지 확대하자 ECB의 정책 의지가 확고하다는 긍정적 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0월 들어 유럽 경제지표들이 워낙 나쁘게 나오고 있고 특히 독일 경제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ECB의 입장과 추가 완화 정책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7월 지표만 해도 호전된 것으로 나타나던 독일 경제지표가 8월 산업 생산 급락과 함께 3분기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일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연초 1.8%에서 1.2%, 내년 성장률을 2%에서 1.3%로 대폭 하향 조정하고 있기도 하다.


긴축에서 벗어난 재정 확대 필수
그러면 저성장과 디플레 압력이 줄지 않고 증시 폭락 등 금융 불안도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ECB의 향후 정책 방향은 어떻게 될까. 시장 일각에선 금리가 너무 낮아 정책 금리 인하 효과가 크지 않은 데다 대(對)은행 TLTRO도 인기가 높지 않은 만큼 ECB가 정책을 바꿔 미국과 일본식의 양적 완화, 즉 국채 대량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한다.

지난 9월 18일 실시된 1차 장기 저금리 대출 신청 금액은 826억 유로로 시장 예상(1000억~3000억 유로)을 밑돌았다. 이에 따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도 이사회에서 미일식의 양적 완화 조치 토의가 있었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EU의 구조적 제약 때문에 미일식의 금융 완화(국채 대량 매입)는 만만치 않고 하더라도 상당 기간을 요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주된 이유는 첫째, 법적으로 ECB가 특정 국가의 국채를 매입할 수 있는지는 별개 이슈로 하더라도 실제 ECB 의사 결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독일 중앙은행이 ECB 국채 매입을 명확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ECB가 유럽국의 국채를 매입하더라도 어느 국가의 국채를 먼저 또 얼마나 매입할 것인지도 경제 효과 외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여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셋째, 게다가 유럽은 현재 ECB와 각국 중앙은행 공조 하에 통합 은행 시스템 구축(감독, 파산 처리 및 예금보험의 일원화)과 그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은행들의 건전성 심사(스트레스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향후 은행 건전성 심사 결과에 따라 은행들의 자본 부족액이 계산되면 ECB가 해당국들의 국채를 그만큼 사주고 다시 각국이 그 자금으로 은행들 부족 자본을 채워 주는 식으로 은행의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얘기다. 따라서 적어도 건전성 심사가 끝날 때까지는 국채 매입 계획이 구체화되긴 어렵다.

그러면 이처럼 반복되는 유럽 위기의 근본 처방은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ECB의 은행 대출 프로그램은 은행들의 대출 의욕과 능력이 약해 효과가 크지 않고 국채 매입도 시간과 정치적 합의라는 난제가 있어 쉽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그보다 첫째, 유로화 절하를 통해 유럽국들의 수출을 늘리고 동시에 수입 물가를 올려서 디플레를 막는 방안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추천한다.

예컨대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의 에발트 노보트니 총재는 ECB 정책의 주목적은 유로화 약세여야 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둘째, 기업 투자를 늘리려면 경직적인 노동시장 구조를 개선해 임금 탄력성을 회복해야 하고 셋째, 긴축 재정이 수입 감소와 경상 흑자로 연결돼 유로화 절상 압력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재정 여유가 있는 국가들의 적극 재정이 필수라고 얘기한다. 다만 유로화 약세도 미국이 최근 달러 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상 애로가 있고 적극 재정도 해당국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