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 지키는 12대 종손 윤완식 씨

[만난 사람 맛난 인생] “전독간장엔 300년 종부의 삶이 담겨 있죠”
“한옥을 잘 살펴보면 부엌이 남쪽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식솔의 영양과 건강을 도맡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요즘 아파트를 보세요. 주방의 위치가 어디에 있죠. 북쪽으로 밀려나 있잖아요.”

‘남쪽?’ 윤완식 씨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랬다. 그동안 한옥을 접할 때 웅장한 모습의 사랑채나 아기자기한 형태의 안채에 빠져 부엌 따위(?)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안내에 이끌려 광채(곳간)로 이동했다. 광채는 안채 가까이에 있는데 두 건물이 나란하지 않다. 북쪽으로 갈수록 간격이 좁아지는 배치다.

“곳간이라고 적당히 비바람만 피하도록 건축한 게 아닙니다. 여름철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빠르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 주변이 서늘해집니다. 그 덕분에 더운 여름철엔 냉장고 역할을 합니다.” 자연 바람을 이용한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동시에 어느 침대 제조업체의 광고 카피처럼 ‘한옥은 과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자리한 명재고택 ‘백의정승’으로 불리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년) 선생의 가옥이다. 명재는 조선 숙종 때 노론의 중심축인 학자다.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음에도 고사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며 초야에 묻혀 지냈다. 명재고택은 평생 초가에서 살아온 스승을 위해 후손과 후학들이 60칸짜리 한옥을 지어 준 것. 하지만 명재는 살아생전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현재 이곳을 지키며 살고 있는 분은 윤완식(尹完植) 씨. 명재(明齋) 선생의 13세손이다. 한여름 땡볕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 중순, 300년 된 한옥 고택을 돌아보는 호사를 누리다가 문득 종가의 음식이 궁금해졌다. 부엌과 장독대는 물론 안채의 대청마루, 사랑채의 누마루 등을 오가며 윤 씨에게 종가의 음식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종가의 음식이라고 대대손손 원형을 유지하며 대물림하는 건 없다고 봅니다. 종부 한 명 들어올 때마다 맛이 더해지고 보태져 좀 더 맛있는 맛으로 발전하지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조금씩 변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겁니다.”

대가족 아래 부엌의 주도권은 할머니·어머니·며느리로 이어진다. 이들은 한 핏줄이 아니다. 외지에서 시집오면서 한집안에 살게 된 사람들이다. 여성의 문밖출입을 금하던 과거의 관습을 감안하면 여성이 먼 지역의 다른 음식을 접하는 건 혼례를 통해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시어머니의 항아리를 후대 며느리에 전해
“시집을 와서 새댁 시절엔 시댁 음식 배우기도 바쁘지만 안주인의 위치에 오르면 자신이 어릴 적 경험한 친정의 요소를 조금씩 가미해 음식을 개선하지요. 요즘 말로 융합, 음식의 융합이 이뤄지는 것이죠.”

16년 전부터 윤 씨는 서울에서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홀로 이곳에 내려와 문중 일을 보며 종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 해 3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사단법인 한옥체험업협회 회장까지 맡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종손 생활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는다. 그는 “사람이 집을 누르고 살아야 하는데, 집이 사람을 누르고 사는 형국”이라며 푸념 아닌 푸념을 한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이 큰 짐이 됐단다. 어머니 홀로 계실 때 도둑이 들어 큰일을 치를 뻔하기도 했다. 값나가는 유물은 가족이나 종친 간의 다툼의 소지도 많았다. 그래서 문중의 동의를 얻어 1만 점이 넘는 종가의 유물을 모두 충남역사박물관에 기탁했다.

명재 종가엔 ‘전독간장’이란 것이 300년의 세월을 이어 오고 있다. ‘독’은 항아리. 그 앞에 ‘전’자는 한자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앞 전(前), 또 하나는 전할 전(傳)이다.

“두 가지 뜻을 뭉뚱그려 표현하면 ‘전(前) 세대인 시어머니의 항아리를 후대 며느리에게 전(傳)한다’는 의미입니다. 전독간장은 300년 동안 종부 할머니들에 의해 이어져 온 맛간장·맛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전독간장에 관해 윤 씨의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명재 종가에선 하루에 쌀 한 가마가 기본이다. 그만큼 식솔이 많았다. 쌀 한 가마에 맞는 반찬을 하려면 장도 만만치 않게 쓰인다. 장독대에 항아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수십, 수백 독이 줄지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한날한시에 담근 것도 독마다 맛이 다르다. 그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 전독이 된다. 전독은 먹지 않고 두었다가 다음해 장을 담글 때 항아리마다 조금씩 나눠 새로 담은 장과 섞는다.’

전독간장이 명재 집안의 ‘맛 종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듬해에 또 가장 맛있는 독을 골라 전독으로 관리하기를 거듭하면서 우성(빼어난 맛)으로 계속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간장과 된장을 몇 년 전부터 ‘교동(校東)’ 브랜드를 붙여 시판하기 시작했다. 고택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서울 등 대도시에서 장독대와 전통의 맛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서였단다. 1년에 300독 정도 생산하는데 매년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명재 집안은 절약과 나눔으로도 유명하다. 명재 선생도 보리밥에 볶은 소금을 찬으로 삼아 식사할 때가 많았다. 손님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도 자신과 가족이 먹을 식량을 아껴 이웃과 나눴어요. 생신상도 거부하고 그 쌀을 이웃에게 한 바가지씩 돌렸으니까요.”

종손이니 윤 씨가 어릴 적 넉넉하게 잘 먹었을 것이란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아직도 고구마가 싫을 정도로 고구마를 자주 먹었다고 한다. 손님상도 밥과 국에 반찬 세 가지 정도인 소찬 독상이었다.

“요즘은 교자상에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진 밥상을 받아야 대접받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소찬이라도 독상을 내는 게 바른 법도입니다.”

사랑방 동창에서 보이는 굴뚝의 높이가 1m 남짓하다. 굴뚝으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고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을 다칠까봐 굴뚝 높이를 낮췄다고 한다. 주변에 대한 배려가 굴뚝까지 미치고 있었다.


소찬이라도 독상이 바른 법도
“추석 차례상에 송편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백설기를 올리지요. 겉과 속이 다른 음식으로 여겨 멀리하는 겁니다.” 음식 하나도 남다른 철학을 담아 교육 소재로 삼을 정도다.

종가 음식이라고 해도 요란하거나 화려한 것이 없다. 전독간장으로 간을 맞춘 장김치를 담근다. 전독간장의 짜지 않고 들큼한 맛이 나박김치에 제격이다. 고춧가루 탄 물에 간장으로 간을 한 뒤 체에 걸러 적당한 크기로 썬 배추·배·미나리·파·밤 등의 재료와 섞어 하루 이틀이 지나면 알맞게 익어 시원한 물김치가 된다. 이 밖에 내세우는 게 가지소박이·간장떡볶이·민물간장게장 정도다.

“예로부터 가족이 밥상에서 얼굴을 맞대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윗사람에게 하루 일을 말씀드리며 지혜를 얻기도 하지요.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안 되지만 조용한 대화는 충분히 오고갔습니다.”

가족들이 각자 식사할 정도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놓는 종손의 가르침이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