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선 쌈지길 전 대표·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부부

[만난 사람 맛난 인생] 4땡 파티 즐기는 문화계의 ‘미녀와 야수’
“결혼 44주년 기념 ‘4땡 파티’에 초대합니다!” 얼마 전 e메일을 타고 날아온 초대장 문구다. 44주년이면 칠순 안팎 노부부다. 그런데 ‘4땡’이란다. 흑싸리 패 2장도 얌전히 그려 넣었다. 이런 표현이 결례인 줄 알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티 당일 만사 제치고 출동했다.

파티의 주인공은 천호선(71) 쌈지길 전 대표와 김홍희(66)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다. 이 부부, 참 재미나다. 나이로 따지면 ‘꼰대’급인데 만년 청춘이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 수시로 새롭고 즐거운 일을 도모한다. 젊은 사람들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그래도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무겁고 진중하게도 다가온다. 가볍든 무겁든 이 부부의 행보는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파티 당일, 통상적인 식순에 따라 인사치레가 끝나고 여흥 시간으로 이어지자 여주인공의 화려한 변신이 시작됐다. ‘서울시립미술관장’이란 자리는 잠시 내려놓고 흰 가발과 검은 선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싸이의 말춤까지 선보이며 하객들을 웃음바다로 몰아넣었다. 남주인공은 카메라를 메고 열심히 그 모습을 찍어 댄다. 200여 명의 하객들도 무대로 나와 함께 노래와 춤을, 아니면 제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폰을 연신 눌러 댄다. 초록은 동색? 하객들 역시 귀엽다.


‘같은 듯 다른 듯’ 부부의 행복
이 부부는 결혼 44주년 파티와 함께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각자 책을 펴냈다. 남편 천 전 대표는 ‘내 생의 한 획, 백남준’을, 부인 김 관장은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 산다’를 냈다.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특별한 이벤트를 고민하다가 각자의 지난 시간을 책으로 정리해 나누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겁니다.”(천호선)

“앞으로의 여생도 문화 예술을 축으로 재미나게 잘 지내보자는 서로의 다짐으로 봐 주세요.”(김홍희)

결혼 44년 동안 이 부부가 걸어온 길은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깜짝쇼(?)를 해가며 ‘따로 또 같이’ 한길을 걸어왔다. 한 사람은 문화 예술 행정가, 또 한 사람은 큐레이터로, 한국 현대미술을 이끈 인물들이다.

천 전 대표는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을 시작으로 2003년 국회 문화관광위 수석전문위원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35년간 공무원으로 지냈다. 그중 10년 넘게 미국 뉴욕과 덴마크·캐나다 등 해외에서 일하며 한국 미술을 해외 현지에 알리고 외국의 예술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많은 힘을 썼다. 문화 예술계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아방가르드 문화 예술 행정가’라고 말하는 이유다.

김 관장은 늦깎이 미술인이면서 비디오 아트, 페미니즘 미술 전시와 기획 분야를 한국에 뿌리내리게 한 인물이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2006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2003년) 등을 역임했다. 2017년 예정된 ‘카셀 도큐멘터14’의 감독 선정 위원이기도 하다.

이 부부를 문화 예술계의 리더로 이끈 공통분모는 천 전 대표의 책 제목에 등장하는 ‘백남준’이다.

천 전 대표는 “백남준 선생과의 만남은 뉴욕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며 “그를 만났기에 일반 행정공무원에서 문화 예술 행정가,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 옹호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천호선표 영양탕은 ‘생존 요리’의 진화형인가
김 관장 역시 “백남준 선생은 내게 예술적 비전을 제공하신 분”이라며 “백 선생을 만나면서 미술 공부의 초점이 비디오 아트 등으로 바뀌었고 큐레이터의 중요성도 깨달았다”고 말한다.

백남준을 한국에 알린 이는 천호선·김홍희 부부다. 1984년 백남준은 전 세계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야심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방영했다. 방영 전에 한국에 잠시 와 있던 천 전 대표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를 KBS와 연결해 줬다. 이 방송이 백남준의 예술적 천재성을 국내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문화 예술계에선 ‘미녀와 야수’로 통하는 부부다. 첫 만남은 천방지축 새침데기 신여성 김홍희가 불문과 대학 졸업을 앞둔 1970년 1월. 친구와 철학에 빠져 지내던 좌충우돌 열혈 청년 천호선은 여자나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직장을 잡았으니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억지로 양가 맞선 자리에 나갔다고 한다.

첫 만남에서 자기는 담배를 피운다고 고백한 김홍희, 그러자 다음 약속 장소에 담배 두 갑을 사들고 나타난 천호선. 이런 식으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며 만난 지 6개월 만에 전격 결혼했다. 이후 결혼 생활은? 순탄에 순탄을 거듭해 아들 딸 잘 낳아 결혼시키고 손자손녀와 44주년 파티까지 벌이며 알콩달콩한 연장선을 달리고 있다.

김 관장은 결혼 후 시댁 생활을 한다. 그런데 요리는 ‘허당’이라고 한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가사 도우미가 있기 때문이다. 요리는 남편의 뉴욕 근무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자의든 타의든 분가한 셈이 됐죠. 먹고살아야 하니까 요리책을 놓고서라도 음식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런데 얼마 뒤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할 정도로 요리 실력이 늘더라고요. 그래도 아직까지 요리는 별로….”

그렇다면 개방적이라고 말하는 남편은? ‘생존 요리’급이다. 남을 해 먹일 수준은 아니란 얘기다. 청년 시절 산을 좋아해 밖에서 코펠에 끓여 먹는 건 하는데 집에선 부득이할 때 라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며 연명한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메뉴가 있다고 자랑한다.

“덴마크에 살 때 일입니다. 아내도 없는데 친구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겁니다. 먹을 게 없어 집 정원 한 귀퉁이에 심은 들깻잎을 잔뜩 따다가 양고기와 함께 끓여 줬더니 친구들이 감동하더라고요.” 이것이 때론 ‘천호선표 영양탕·보양탕’이라고 불리는 ‘호선탕’이다.

이들 부부의 집은 ‘문화 예술인의 사랑방’이다. 술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별다른 음식 준비를 하지 않는다.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고 술은 집 안에서 마음껏’이란 기준이 서 있기 때문. 이 부부의 집에 가면 바깥주인이 잔뜩 구입한 다양한 종류의 술 그리고 안주인이 성의껏 장만(?)해 둔 치즈와 햄 등 간편 안주와 오징어 땅콩 등 마른 안주거리가 푸짐하다.

이 부부에게 각자 따라 붙는 별명도 있다. 남편은 분열증, 부인은 편집증. 남편은 겉모습과 달리 종종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4땡 파티’처럼 말이다. 부인은 한 가지에 매달리면 놓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어린 딸이 “엄마는 붙박이장”이라고 놀릴 정도였다. 이들이 요즘 함께 빠진 일이 있다. 마라톤이다. 풀코스 완주는 엄두조차 내지 않지만 매주 2~3차례 달리고 또 달린다. 천 전 대표가 5년 전 ‘뛰고 마시자’고 구성한 술 모임이 발전한 것이다. 평생 뛰지 않던 김 관장도 가세해 벌써 10km 대회를 12번이나 출전했다. 지난 8월 10일 복더위에 열린 ‘혹서기 마라톤 대회’까지 동반 출전할 정도로 두 사람 모두 마니아가 됐다.

부인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오직 술, 술을 마시기 위해 달린다’는 천 전 대표. “덤으로 허리가 36인치에서 32인치로 줄었다”고 자랑한다.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사뿐사뿐 달리는 김 관장. “피부가 좋아지고 몸매도 되살아나 행복하지만 무엇보다 달리고 난 뒤의 성취감이 최고”라고 말한다. 늦깎이 마라토너 두 분의 달리기 예찬을 들으며 10년 뒤엔 42.195km 풀코스 마라톤으로 ‘미녀와 야수’의 5땡 파티를 벌이는 건 아닌지 벌써 걱정, 아니 기대해 본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