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셰프의 쿠킹 클래스 김락훈 대표

“마흔다섯에 얻은 결론이‘파티 김밥’이죠”
셰프는 음식점의 주방장이다. 사전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방의 총책임자인 주방장에 오르려면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기 시작해 적어도 요리 경력 10년은 필요하다. 그만큼 전문적인 기술과 숙련도를 요하는 자리다. 더군다나 외래어인 셰프란 단어는 김밥이나 국밥 같은 한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샐러드나 스테이크 같은 서구적인 메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김밥 마는 셰프’라고 소개하는 셰프가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락셰프의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는 락셰프, 김락훈 씨가 바로 그다.

그는 요즘 김밥 마는데 푹 빠져 지낸다. 김밥을 만다고 해서 소문난 김밥집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꼬마 아이들을 대상으로 김밥 요리 강좌를 열고 있다. 그의 손을 거친 김밥은 곰돌이가 되고 눈사람이 되고 예쁜 꽃이 된다. 파티 행사장에 펼쳐진 데커레이션을 보는 듯하다. 락셰프는 자신의 김밥을 ‘파티 김밥’이라고 말한다.

“2014년 4월부터 두 달 동안 저 혼자 우리 땅 해안선을 따라 포구 기행을 했습니다. 마흔다섯 나이에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죠. 거기에서 얻은 결론이 ‘파티 김밥’입니다.”


2년간의 해외 무전여행, 요리에 눈뜨다
“마흔다섯에 얻은 결론이‘파티 김밥’이죠”
‘흔들림이 없다’는 불혹(不惑)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마흔다섯에 자신을 되돌아볼 지경이었으니 락셰프의 요리 인생도 평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락셰프는 대학 졸업을 한 학기 남긴 1995년 단돈 140만 원을 손에 쥐고 영국 런던으로 무작정 떠난다. 그냥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였단다.

“영어 회화도 안 되는 상태에서 떠났거든요.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막막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운 좋게 일식당에 취직이 됐어요.”

대학 전공도 요리가 아닌 전자공학이었으니 ‘운 좋게’란 말이 나올만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갑자기 직원이 빠져 충원이 급한 상황인데 친근감을 주는 ‘웃는 인상’ 덕에 뽑힌 것이었다. 그래도 주인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오전엔 영어 학원에도 다닐 수 있었다. 음식점에 붙어 있는 지하 창고에서 생활하며 지내다가 영어 회화가 가능해지자 과감하게 일을 접고 유럽 배낭 여행에 나섰다. 10개월 동안 모은 돈은 700만 원. 대부분은 어머니에게 송금하고 거의 빈손으로 여행을 꾸려 나갔다고 했다.

“두 달 동안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은 물론 동구권까지 두루 돌아다녔어요. 돈을 아끼기 위해 인터레일패스를 구입해 잠은 기차에서 해결했어요.” 여행 전문가를 꿈꿨느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이 없었고 그냥 세상 구경?”이란 답이 돌아왔다.

유럽에서 1년여 기간을 보낸 락셰프. 갑자기 일본이 궁금해졌다. 바로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날아간다. 일본 어학원에 등록해 공부하면서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6개월을 보낸다. 이후 미국으로 옮겨 로스앤젤레스로 와 뉴욕에서 각각 두세 달 머무르는데 뉴욕에서 진짜 요리다운 일을 한다. 초밥집 카운터에서 스시를 쥐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로 돌아오니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유럽→일본→미국으로 이어진 2년간의 세계 무전여행. 락셰프가 아닌, 락 청년의 특별한 인생 경험이다. 서울에서 남은 1학기를 마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1998년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국내 경제가 어수선하던 시절. 그렇지만 2년간의 외국 여행 덕분에 몇몇 외국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운이 억세게 좋은 것 같아요. 남들은 취직이 안 돼 무척 힘들어했는데 저는 근무하고 싶은 곳을 골라서 일할 수 있었어요.”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다양한 일을 경험한다. 그동안 거쳤던 회사를 들어보니 인터넷 서비스 업체나 엔지니어링 회사를 비롯해 디자인 회사, 마케팅 업체, 심지어 불화(佛畵)를 그리는 종교 미술 기업, 골프장 건설 파이낸싱도 들어 있다. 하나같이 김밥(요리)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뿐이다.

“5년 전 쯤에 문득 이렇게 지내다가는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즐겁게 할 일을 다시 찾아봤는데 2년간의 해외 무전여행에서 경험했던 요리가 떠오더라고요.”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발레 강사를 하며 남편의 행보를 묵묵히 지켜보던 아내가 제동을 건 것. “쓸데없는 일 벌일 생각 말고 정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라”는 주문을 해왔다. 락셰프는 후퇴하는 것처럼 일단 아내를 속이곤 독학으로 사케 소믈리에로 통하는 ‘기키자케시’ 자격증을 취득한다. 이어 한식을 필두로 양식·중식·일식·복어·제과·제빵·조주사까지 국가 공인 요리사 자격증도 1년 만에 모두 따낸다.


아이들과 김밥 만들며 노는 락셰프
2011년 아내를 다시 설득해 일본으로 요리 유학을 떠난다. 도쿄스시전문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일본의 전통요리 스시를 배운다.

“큰 꿈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겁니다.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은 물론 다른 외국인들도 서둘러 도쿄를 떠났어요. 제 아내와 부모님도 만사 집어치고 귀국하라고 난리가 났죠.”

매일 눈물로 호소하는 아내 때문에 결국 귀국한다. 그러나 하룻밤 달래고 다음 날 바로 도쿄로 되돌아간다. 그러고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스시학교에 남아 흰색 방사선 피폭 방지복 차림으로 스시 3급, 2급, 1급 자격증을 가지고 귀국한다. 4개월 만에 이룬 쾌거라니 무척 독하게 공부한 모양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주방부터 제 스타일로 개조했어요. 그리고 첫 손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아내를 카운터 앞에 앉혀 스시를 쥐어 내놓았습니다.”

락셰프는 3년 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초밥을 입에 물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모습을 보며 ‘아내의 마음고생은 여기서 끝’이라고 다짐했단다. 이후 요리에 매진하면서 전국 대회 등에 참가해 온갖 상을 휩쓸며 40년 넘게 숨겨져 있던 요리의 끼를 맘껏 뽐낸다. 2014년 11월에는 ‘요리 대회의 월드컵’이라고 칭하는 ‘2014 룩셈부르크 요리월드컵(Luxembourg Culinary World Cup)’에 국가 대표로 출전해 단체전 동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따왔다.

수많은 음식 중 왜 ‘파티 김밥’인가 궁금해졌다.

“포구를 돌 때 똑같은 어구와 생선을 정리하는 어부의 모습을 보면서 ‘셰프 역시 이들처럼 모두 똑같은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나만의 개성을 갖춘 셰프’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민해 얻은 답이 ‘아이들과 김밥을 말면서 노는 락셰프’입니다.”

락셰프와 아이들의 놀이 매개체로 김밥을 고른 이유는 만들기도 쉽고 맛도 좋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일본스시학교에서 배운 놀이적인 요소(파티 형태)를 가미해 김밥을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닌 문화로 풀어냈다고 했다.

“김밥을 마는 일은 어찌 보면 무척 단순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벼를 키우는 농부의 정성, 김을 양식하는 어부의 노력, 김밥을 마는 엄마의 정성이 가득한 음식입니다.” 파티 김밥의 체험 학습을 통해 아이들에게 밥상머리 교육도 병행한다는 의미다.

요즘은 장래 희망으로 셰프를 꿈꾸는 아이들이 많다. 진학 지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부모님들에게 한마디 부탁했다.

“일단 학교 공부부터 열심히 시키세요. 요리 학원을 다니며 음식 만드는 행위 위주로 배우다 보면 ‘기능’면에선 뛰어난 인물이 될지 모르지만 생명이 없는 요리를 내놓게 되기 때문이죠. 인문학적 소양부터 차근차근 다지고 인성과 체력을 쌓고 문화·예술적인 안목까지 갖춘 뒤 요리를 배워도 늦지 않아요.”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