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진솔 플래직 대표
-“클래식 음악에 ‘새 돌파구’ 만들 겁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지휘자, 게임 음악 플랫폼 ‘플래직’으로 도전 나서
클래식 음악 지휘자가 스타트업 차린 이유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남들이 다 가는 길은 거부한다. 국내 유일한 게임음악 심포니 오케스트라 스타트업 플래직을 운영하고 있는 진솔 대표의 이야기다.

진 대표는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서 촉망받는 젊은 지휘자 중 한 명이다. 클래식 음악을 업으로 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클래식 음악을 익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는 ‘여성 지휘자’라는 단어조차 낯설었고 보수적인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더욱이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진 대표는 오히려 그 낯섦에 끌려 지휘자의 길을 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만하임 국립음악대를 졸업했다. 독일 바덴바덴 필하모니, 경기필하모닉, 대구 MBC 교향악단 등 다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현재 오케스트라 ‘아르티제’의 예술 감독과 대구MBC 교향악단 전임 지휘자,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조금씩 인정받으며 입지를 쌓고 있는 그는 이번에도 ‘남들이 거부하는 길’을 택했다. 클래식을 ‘게임 음악’과 접목하는 것이다. 그는 2017년 1월 게임 음악 콘텐츠 플랫폼 기업 ‘플래직’을 설립했다. 게임 음악을 클래식 오케스트라로 풀어낸 콘서트를 기획하거나 게임에 삽입되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을 클래식으로 편곡하고 연주하기도 한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플래직 사무실에서 4월 11일 게임과 클래식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진 대표를 만났다.

◆클래식은 ‘죽은 시장?’…게임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다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을 만났어요. 이 업계가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배고파요. 해마다 새로운 클래식 연주자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이 한정돼 있으니까요.”

진 대표는 클래식 음악계에 대한 얘기부터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뿌리가 클래식 음악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공급은 너무 많은데 수요는 너무 적은 클래식 시장’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콘텐츠가 게임이었다. 게임이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진 대표부터 어렸을 때부터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해 여러 게임들을 섭렵한(?) 마니아였다. 게임을 할 때면 유저들이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배경음악을 클래식으로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드는 작업이 의미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본격적으로 게임 음악 연구를 시작하면서 일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이미 해외에서는 VGL(비디오 게임 라이브, 미국), VGO(비디오 게임 오케스트라, 유럽), GSJ(게임 심포니 재팬, 일본)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게임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게임 음악과 관련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업체는 전무했다.

“게임 업체는 어떤 게임이 인기를 얻으면 콘서트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싶어 해요. 그런데 게임 음악은 대부분이 컴퓨터로 전자음을 뽑아내는 미디(MIDI)로 작업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게임 콘서트를 열고 싶은데, 음악을 실제로 연주하기가 어려워요. 이때 우리가 미디어 작업된 게임 음악을 편곡해 악보로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통해 실제로 연주해 무대에 올리는 작업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겁니다.”

플래직은 지난해 몇 차례의 게임 음악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해 2월 ‘플래직 오프닝 콘서트’에 이어 4월에는 ‘플래직 게임 뮤직 콘서트’를 열었고 5월에는 성남시의 의뢰를 받아 ‘게임&음악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넥슨의 ‘메이플 스토리’ 등 유명 게임의 OST를 콘서트 무대에서 연주했는데, 게임을 통해 이미 귀에 익숙한 곡이다 보니 관객들의 반응 또한 매우 좋았다.

“이번에 직접 지휘하지는 않지만 코리안심포니에서 기획한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 메이플 스토리’ 공연은 5분 만에 콘서트 표가 매진됐다고 들었습니다. 게임을 통해 워낙 익숙한 곡이었던 덕분이죠.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만큼 클래식을 대중에게 편안하고 친근하게 소개할 수 있었다는 데 뿌듯함이 커요.”

◆ 클래식업계도 게임업계도 환영…“자신감 생겼어요”

클래식 음악과 게임 음악은 기본적으로 특징이 매우 다르다. 클래식 음악은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반면 게임 음악은 게임을 하는 동안 편안하게 지속적으로 음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흐름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이 때문에 2~3분짜리 게임 음악을 클래식 음악으로 작업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 고된 작업이다. 단순하게 이어지는 멜로디에 화음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더해줄 높은 수준의 편곡 능력이 필요하고 이를 실제 연주로 들려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수준 높은 연주자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플래직에는 클래식을 전공한 전문 편곡자와 함께 다수의 전문 클래식 연주자, 유튜브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클래식 전문 유튜버 등도 소속돼 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며 탄탄한 기본기 위에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게임 음악’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 플래직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인 셈이다. 이는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VGL·VGO 등과도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물론 그 외에도 어려운 점은 많다. 게임과 관련한 음악들을 주로 연주하다 보니 저작권(IP) 관련 작업도 까다롭다. 한 게임에 수록된 OST라고 하더라도 각각의 음악마다 저작권 소유자가 다른 것도 태반이다. 법적인 절차를 처리하는 것 또한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이다. 더욱이 이는 플래직뿐만 아니라 게임 업체도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이다. 문제는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가르쳐줄 사람이 없고 조언을 구할 상대도 없다.

“국내에서는 없던 시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 크죠. 하지만 그동안 관련 시장의 수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시장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고 있는지를 체감하면 그렇게 고생스럽지만은 앉아요. 수익만 좇아가자면 금방 매출이 늘어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음악의 퀄리티’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기 때문에 수익이 생기는 대로 다 음악 작업에 투자하고 있어요.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제대로 천천히 클래식과 게임을 접목한 새로운 시장의 ‘문화적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게 목표예요.”

이 때문에 최근에는 게임업계에서도 입소문이 나며 플래직에 무대나 게임 음악 관련 작업을 의뢰하는 업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E-스포츠 경연대회’에 서는 일도 많아졌다. 웅장한 게임의 분위기를 살리기에도 오케스트라 연주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현재는 한 게임 방송과 함께 ‘게임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그램 기획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게임 음악 OST 제작에 참여하는 기회도 조금씩이지만 많아지고 있다.

“이미 드라마나 영화에서 OST는 매우 중요한 산업 분야로 성장해 고 있잖아요. 이에 비해 게임 음악은 국내 업체들 대부분이 동유럽에서 작업을 하는 곳이 있어요. 국내에서 이와 같은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연주자를 찾기가 힘든 게 그 이유이기도 하고요. 국내에 비해 동유럽 오케스트라는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연주를 의뢰할 수 있거든요.”

진 대표는 게임 업체들이 음악 작업을 위해 관행적으로 ‘동유럽으로 향하는 발길’을 다시 국내로 돌리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아무리 동유럽의 오케스트라 연주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게임 업체로서는 동유럽까지 스태프들의 이동비나 숙식비 등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퀄리티 좋은 음악 작업’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지게 된다면 잠재력이 매우 큰 새로운 시장이라는 판단이다. 향후에는 게임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플래직 오케스트라’를 꾸려 정규 단원들을 모집하고 싶다는 게 진 대표의 포부다.

“플래직을 운영하면서 가장 뿌듯한 지점은 클래식업계와 게임업계 모두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거예요.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최근 게임 음악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어깨가 무겁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감도 붙고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제가 클래식 음악계에서 더욱 인정받고 잘해야 이와 같은 시도가 젊은 연주자들에게 더욱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클래식 음악 지휘자이자 게임 음악 스타트업 대표로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게 정신없고 바쁘지만 둘 다 잘해내고 싶어요.”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