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은 자유·관용의 정보 중심지… 대롱으로 하늘 보는 어리석음 버려야

공항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비행기를 그리면 꼭 바퀴를 그려 넣는다고 한다. 그 아이들 눈에는 이착륙하는 비행기만 보였으니 바퀴를 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환경적 동물이다. 일찍이 교육환경론자인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여러 차례 이사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사실이고 세계라고 믿으면 그만큼 자신의 삶은 좁아진다.

모든 지식은 정의(定義:definition)를 토대로 구성된다. 그게 없으면 지식이 입력되지도 축적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디파인(define)’이란 말은 ‘정의하다’는 뜻도 있지만 ‘제한하다’는 뜻을 지녔다. 내 집 울타리를 치는 것처럼 경계를 짓고 소유를 명시하는 것이다. 울타리를 치면 도둑은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내 공간은 동시에 그 울타리에 묶인다. 일찍이 원효는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어리석음(管見之累)’을 경계했다. 좁고 긴 대롱으로 하늘을 보면 작은 원만 보인다. 그게 하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늘은 무한하다. 그 대롱을 버리고 살 수는 없다. 그건 도사나 초인쯤 돼야 가능하다.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모이면 대롱이 굵어진다. 그만큼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지고 넓게 보는 만큼 실제로 넓은 세상에 산다. 지식과 경험이 관용을 낳은 것도 그런 때문이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강소국 네덜란드서 정말 배워야 할 것들
대원군보다 시야 더 좁은 건 아닌지
우리는 넓은 세계에서 아주 좁은 땅에 살고 있다. 차라리 섬이면 배를 타고 멀리 떠나기라도 하겠지만 이건 섬도 아니고 육지도 아니다. 본디 반도(半島)는 육지와 바다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고 실제로 문화의 요충지가 된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은 대륙과 연결돼 있으되 전혀 교통하지 못하고 바다를 접하고 있되 멀리 떠나지 못하는 연안성(沿岸性)에 갇혀 있게 만들었다. 그게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늘 그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밖의 사정에 대해서는 어둡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비난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대원군보다 좁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소국(强小國) 네덜란드를 주목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대기업에서도 네덜란드 모델을 배우기 위해 임원단을 대규모로 파견했다. 조선 말 신사유람단처럼…. 그들은 돌아와 ‘창의력과 자율성’이 네덜란드가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 핵심이라고 보고했다. 제대로 봤다 싶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봤지 둘은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자율성은 정부의 규제에 대한 반론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자율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세계에서 최초로 시민 자치제를 실시한 나라라는 점이다. 자율성의 근거는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투명해야 한다. 부패가 척결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온갖 불법과 탈법을 자행하면서 그 모든 원인이 마치 규제 때문인 것처럼 외치는 건 자가당착이다. 또 하나는 창의력이다. 창의력은 구호로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창의력은 자유에서 나온다. 근대정신의 핵심은 ‘자유로운 개인’이다. 그게 마련되지 않고서는 결코 창의력이 발현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에서 진정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관용과 포용성’이다. 그것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에서 비롯된다. 네덜란드가 17세기 유럽의 각축전에서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발전한 것은 바로 그러한 기반에서 가능했다. 그걸 봤어야 한다. 그들이 대외적 도전과 대내적 도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봐야 한다. 대내적 도전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대 인식과 복지의 선순환 구조를 마련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대외적 도전에 대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대처했다. 그것은 네덜란드가 17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지켜온 방식이다.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은 탈지중해 시대에 강력한 지식 드라이브 정책을 쓴 대표적인 도시다. 네덜란드는 종교적 다양성이 인정되는 관용의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요한 정보의 중심지였고 시장이었다. 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된 인쇄물들을 수출하는 출판과 인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지도와 여행기, 항해기들을 부지런히 인쇄했다. 암스테르담은 영국보다 싼값에 영어 성경을 찍어 영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출판은 자연스럽게 자국인들로 하여금 많은 정보에 접촉하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들이 여전히 지식 검열을 하는 동안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열린 정보 체계를 가진 축에 속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책을 출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인도회사는 아주 사소한 지식과 정보까지 수집했다. 네덜란드가 뒤늦게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강력한 무역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지식 체계의 활력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을 놓치면 안 된다. 실제로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 가운데 베네치아가 가장 번성할 수 있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16세기 동안 유럽의 그 어느 도시보다 많은 책을 인쇄했던 점이었다. 15세기에 대략 200만 권의 책을 찍었고 16세기에는 500여 곳의 인쇄소에서 대략 1800만 권을 찍어내는 유럽 최고의 출판 중심지였다.


베네치아와 암스테르담의 공통점
인쇄와 출판의 성행은 다양한 상업 업무 관련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게 했고 사람들은 책을 통해 다양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제 어떤 견본시가 열리고 어떤 상선이 무엇을 싣고 언제 도착하는지는 물론 각종 상품의 가격 동향까지 알 수 있었다. 베네치아의 외교관들은 주재국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동시에 자국의 정보를 주재국에 퍼뜨리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 바탕에는 이러한 인쇄의 발달이 깔려 있었다. 베네치아의 발전에는 그런 토대가 깔려 있었고 17세기 네덜란드의 성장에도 그런 배경이 존재했다. 나라가 부강해져서 출판과 문화가 발전한 경우도 있지만 베네치아와 암스테르담처럼 자유롭게 출판과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나라가 부강해졌다는 점도 읽어야 한다.

일본이 일찍이 개방정책을 선택하면서 선택한 롤모델이 바로 네덜란드였다. 그들은 아예 독립 학문으로 발전시킬 만큼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게 이른바 난학(蘭學)이다. 그런데 무려 1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연구할까.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되 현상적·피상적으로만 훑어봐서는 안 된다. 그 환경의 토대를 읽어 내야 한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하나라도 제대로 파악하면 인식의 확장은 금세 즐거움으로 변한다. 더 이상 이 좁은 땅에 가둬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 몸은 이 좁은 땅에 있더라도 정신은 무한한 자유와 광대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비행기가 바퀴를 접지 않고는 높은 하늘로 멀리 날 수 없다. 바퀴를 접지 않는 비행기는 프로펠러 달린 구식 비행기이거나 경비행기일 뿐이다. 바퀴를 접어야 멀리 날 수 있다. 공항의 아이들이 비행기의 진면목을 보려면 그 바퀴가 접혀진 비행기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사는 것과 무관하게 마냥 멀리, 높이만 본다면 그건 유치한 이상일 뿐이다. 세상을 내다보려는 게 자신이 딛고 있는 현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 땅의 현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높이 나는 비행기도 땅에서 하늘로 날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바퀴를 내려야 한다. 그걸 내리지 못하면 영원히 하늘을 떠도는 미아가 될 뿐이다.


사족 네덜란드 축구 감독들의 가장 큰 무기는 무엇일까. 언어다. 영어를 무난하게 구사할 수 있는 네덜란드 교육의 실용성의 덕택이다. 실용적 외국어 습득과 사용을 강조하면서 입시제도나 입사제도의 경직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그냥 실용적 외국어 학습을 강조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네덜란드는 요즘 흔히 말하는 대표적 ‘샌드위치’ 신세였다. 그 상황을 타개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이 외국어 능력이었고 동인도회사처럼 해외로 나가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환경이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미 굳어진 제도 타령만 할 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