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소유가 주는 행복은 잠시뿐…타인에게 먼저 마음 열어야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알던 행복의 비밀
1924년 아프리카 적도 남쪽 타웅이라는 곳에서 대여섯 살의 어린아이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이 발견됐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어린아이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점이 인간과 유사한 한 가지 특징이었다. 그리고 10년쯤 뒤 어른의 두개골도 발견됐다. 이들은 약 200만 년 전쯤부터 지구상에 살았고 돌의 가장자리를 쳐서 날을 세운 초보적인 석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은 이러한 유형의 도구에 변화를 거의 가하지 않으면서 약 100만 년간 조금씩 진화해 갔다.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모든 생물들이 조금씩 진화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대부분이 기능적이고 생물학적인 진화만 생각해 온 게 사실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발명이다. 그러나 발명에는 사회적 성격을 띤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과 골격을 조사한 결과 그들 대다수가 스무 살 이전에 죽었다. 그러면 숱한 고아들은 어떻게 됐을까.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다. 나 살기도 바쁘고 내 아이 키우는 일도 버겁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죽은 남의 아이를 건사할 수 있었을까.


나는 과연 언제 행복한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모든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유아기가 길었다. 이것은 직립보행의 유산이기도 하다. 가령 열 살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들은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사를 거듭하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틀림없이 일종의 사회적 조직이 있어 아이들을 돌보고 어쩌면 입양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넓은 의미에서 교육을 하기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진화를 향한 거대한 발걸음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돌보고 챙기는 문화적·공동체적 유대감은 어쩌면 이성이 발휘하는 연상과 추론에서 가능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먼 조상들부터 이미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체득한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속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예전에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김준기 마음과마음 신경정신과 원장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기거나 갖고 싶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행복해진다. 누구나 그렇다. 일종의 본능과도 같다. 행복과 쾌감은 짜릿하고 흥분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행복은 짧다.

금세 잊힌다. 다시 비슷한 경쟁에서 이기거나 소유하게 됐을 때는 행복이 감소한다. 결국 나중에는 무덤덤해진다. 행복의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인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착한 일을 했을 때 느끼는 행복은 짜릿하거나 흥분되지는 않지만 묘하게도 오래 지속된다.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거듭할수록 그 행복이 감소되거나 흐릿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고 자꾸만 반복하고 싶어진다.

신경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뇌과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이것이 일종의 진화라고 정의한다. 강하지만 짧고 거듭될수록 한계 행복이 감소하는 것보다 반복할수록 그 행복이 커지고 자꾸만 더 하고 싶은,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선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와 연극에 일가견이 있는 김 원장이 추천해 준 영화는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였다. 평생을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막 은퇴한 슈미트. 그의 하루하루는 무미하고 건조한 반복의 일상이다. 42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며 딸은 도무지 제멋대로다. 도대체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망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흔들리거나 뒤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가 유일하게 작은 기쁨을 누리는 것은 탄자니아에 있는 소녀 엔두구에게 하루 77센트를 보내고 가끔 편지를 쓰는 일이다.

어느 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빈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아내가 그립다. 하지만 그녀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비밀스러운 연애편지를 발견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였다. 아내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분노와 허탈함. 이제 남은 것은 딸뿐이다. 그런데 그 딸은 자신이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한다. 사윗감은 머리가 듬성듬성한 외모에 실적까지 달리는 침대 외판원이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기쁘고 미쁜 마음은 아니다. 허탈하게 돌아온 슈미트는 탄자니아의 꼬마에게 편지를 쓴다.

“지니의 결혼은 아무 문제도 없었단다. 기쁘지 않니? 이제 그들은 햇살 좋은 올랜도에 살고 있지. 물론 내 돈으로 말이다. 그런데 무엇을 달라지게 한 거지? 이 세상이 나 때문에 뭐가 더 좋아진 거지? 난 약하단다. 난 실패자야. 언젠가 나도 죽게 되겠지.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영향을 주었을까? 내 생각엔 아무것도 없구나. 전혀, 아무것도. 너에게는 일이 잘돼 갔으면 좋겠구나. 워런 슈미트로부터.”


행복을 연대하라
무료함과 절망 속에서 지내던 그에게 편지가 한 무더기 배달된다. 그런데 이런저런 고지서들 사이에 전혀 다른 편지 하나가 눈에 띈다. 탄자니아의 고아원에서 엔두구를 돌보고 있는 수녀가 보낸 편지였다. 엔두구가 최근 눈병에 걸렸고 치료를 받았으며 그림을 좋아하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며 그림과 안부를 대신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아이는 당신의 인생이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한다네요. 매일매일 당신에 대해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한답니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아 읽거나 쓰지 못하지만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린 소녀. 슈미트는 꼬마가 그린 그림을 펼쳐본다. 서툰 그림에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다. 갑자기 슈미트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눈물과 함께 가득해진다. 영화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던 슈미트의 미소는 너무나 평화롭고 따뜻하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세상에서 자신만 내팽개쳐졌다고 좌절하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절망하던 슈미트를 행복하게 만든 건 바로 지구 저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저 하루 77센트를 보내 줬을 뿐인 작은 흑인 소녀였다. 그 소녀의 그림 앞에서 슈미트의 삶은 여전히 무의미했을까.

김 원장은 인간의 뇌는 경쟁이나 소유가 주는 강하지만 짧은 행복보다 갈수록 길어지고 깊어지는 행복을 선택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인간 뇌의 공감 뉴런이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가려내고 키워 가는 뇌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절망하고 두려워한다. 과연 자기 삶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자리 삶이 그다지도 보잘것없고 무의미한가 싶어 좌절하고 허무해진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늘 자신 곁에 있다. 꼭 손을 잡고 눈에 보여야만 느끼는 우리의 무심한 습관 때문에 느끼지 못할 뿐이다. 다만 그런 존재는 자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간직했을 때만 가능하다. 손을 내밀고 가슴을 열고 마음을 건넬 사람이 이 세상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설령 한 번 얼굴을 맞댄 적 없어도 자기 삶은 강퍅하고 무의미하지 않다.

다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한 번 경험하면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다. 그러니 먼저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위해 빌어주고 지켜봐 주겠다는 뜻을 품어야겠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깨닫고 실천했던 것을 21세기 현대인이라고 자부하면서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