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한국 교육은 속도·효율 중시 못 벗어나…‘숲’을 보는 안목 필수
18세기 유럽의 시대 연 미적분, 단순 계산법만 가르쳐서야
(일러스트 김호식)

[한경비즈니스=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한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평야에 가면 이국적이기까지 한 느낌이 절로 든다.

수평선과 또 다른 느낌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지평선의 매력은 절묘하다. 몇 해 전 그곳에 함께 갔던 한 지인이 그 모습에 감탄하면서 “야, 이곳은 낙원 그 자체로구나!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배고픔을 모르고 살 수 있었을 테니 얼마나 복 받은 곳이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경북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눈에 비친 너른 평야가 얼마나 부러웠을까. 물론 이미 보릿고개나 배고픔은 잊은 지 오래지만 어렸을 때 그 배고팠던 기억은 평생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그곳 출신의 지인이 반박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너 살던 곳은 땔감 걱정은 없었을 것 아니냐. 우리는 어쭙잖은 땔감을 구하려고 해도 족히 20리 길을 가야 했어. 나무 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지겨웠는지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 말을 들으니 주변에 산이라는 게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야트막한 언덕쯤만 드문드문 보일 뿐 산이라고 생긴 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싶었다.

이렇게 누구나 자신이 겪은 일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는 게 우리 의식의 한계다. 그걸 벗어나야 비로소 문리가 트인다.

◆ 12년 배운 수학, 졸업 후엔 무용지물

교육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지난 세기는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은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판단하며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능력’이었다.

따라서 교육은 주입식으로 압축됐고 수학은 묻고 따질 것도 없이 곧바로 계산하는 능력의 배양에만 집중됐다. 하지만 21세기는 지난 세기와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그렇고 교육 자체도 변화해야 한다. 과연 그러고 있는가.

학창 시절을 돌아보라. 미분과 적분을 배울 때 수학 선생님이 ‘언제 누가 왜 미분과 적분을 고안했는지’ 혹은 ‘미분과 적분이 과학에서 어떻게 응용되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때 미분적 판단을 하고 어떤 때 적분적 판단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다짜고짜 계산하는 방법만 가르쳤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습득하며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100점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무한 반복을 되풀이했다.

에너지의 낭비고 교육의 비현실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공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대입 시험 이후 수학을 ‘써먹을’ 일도 없으니 입학시험과 함께 수학적 지식도 반납하고 끝이다. 무려 12년 동안 배우고 익혔으면서도 정작 일상에서 쓰지 않는다.

◆21세기는 ‘박이정(博而精)’의 시대

조선 말기 한학자 이규용은 ‘해동시선(海東詩選)’을 편찬하면서 널리 여러 사람의 시를 채집하되 한 사람의 시를 많이 싣지 않고 1, 2수씩만 엄선하는 ‘박이정 정이박(博而精 精而博)’의 정신에 입각해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 순종 때까지 활약한 시인 1200여 명의 시 2400여 수를 수록하면서 다양하되 정수만 골랐다는 뜻이다.

흔히 묻는다. ‘박이정’이 옳은지 ‘정이박’이 나은지.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굳이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박이정’을 택하겠다.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 뿐만 아니라 깊게도 알아야 한다. 그런 시대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능적 전문가를 양성하고 우대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살았던 시대가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

그리고 그런 교육의 성공으로 산업화에서 우수한 결실을 얻었고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승리에만 도취돼 새로운 변화를 읽어 내지 못했고 결국 20세기 막바지에 주저앉았다. 벌써 21세기도 16년이 지났다. 더 이상 나무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숲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는 말이 있다. 사슴을 잡으려고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욕에 눈이 먼 사람은 큰 해가 눈앞에 있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비유하는 뜻이지만 어떤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회남자’ 설림훈 편에 나오는 말이다. 나무를 보면 숲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엉뚱하고 사소한 것 때문에 그르친다.

‘일엽장목 불견태산(一葉障目 不見泰山)’, 즉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면 눈앞의 거대한 태산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그런 점에서 기억해 둘 일이다.

너른 시선으로 봐야 세상이 보이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 그 시선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 구체적인 일은 전문가들을 두루 모아 일할 수 있게 해 주면 된다. 그런 리더가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