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고독한 사냥꾼’이자 ‘원격 양육자’된 한국의 기러기 아빠들
영화 ‘싱글라이더’로 본 ‘파더 쇼크’ 시대
(사진) 영화 '싱글라이더'의 한 장면. /퍼펙트스톰필름.


[한경비즈니스 칼럼=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총·균·쇠(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오랑우탄의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한 후 암컷에게서 떠나버린다.

당연히 새끼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침팬지 수컷도 비슷하다. 침팬지 암컷은 가임기에 여러 수컷과 난교에 가까운 짝짓기를 한다.

수컷은 자신이 새끼의 친부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다지 큰 책임감을 가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포유류의 수컷이 암컷과 함께 지속적으로 새끼를 돌보는 것은 전체의 3~5%에 불과하다.



◆‘새끼’를 돌보는 건 인간의 본성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진화심리학자인 더글러스 켄릭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7가지 부분 자아가 있다. 그중 하나가 ‘친족 보살핌 부분 자아’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이, 어린 동생, 사촌, 조카, 손주를 보살펴 줘야 한다는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부모 없는 아이는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부모는 음식이나 집, 아이의 보호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찾는 법, 친구를 대하는 법, 사자 등의 약탈자를 피하는 법 등 여러 가지를 제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포유류에 비해 대체로 일부일처제에 충실한 인간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데 막대한 자원을 투자한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근 20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원시시대 이후 인간의 남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자원의 마련, 즉 사냥감 획득이라는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됐다.


아이의 양육은 전적으로 여자의 몫이었다. 대가족 사회에서 할아버지나 할머니, 이모나 고모 등이 양육을 보조했지만 핵가족 사회인 지금은 양육을 도울 친인척이 옆에 없다.

지금 세계는 사냥에만 집중하면 됐던 아빠가 아이의 양육까지 맡아야만 하는 아빠로서는 유사 이후 초유의 충격적인 사태를 맞고 있다. 이를 일러 어떤 학자는 ‘파더 쇼크(father shock)’라고 한다.



◆너무도 외로운 한국의 가장들


이런 파더 쇼크 시대에 한국의 아버지들은 더한 궁지에 몰리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기러기 아빠’다.

적성과 능력을 도외시한 채 애들을 명문 대학으로 가는 기계처럼 취급하는 한국의 사회 풍조가 애들과 엄마를 더 나은 교육제도를 가진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아빠는 국내에 남아 가족을 뒷바라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가족과 떨어져 ‘고독한 사냥꾼’, ‘원격 양육자’의 역할을 감수해야한다. 하지만 기러기 아빠를 둔 가정이 항상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 짝 잃은 외기러기가 된 엄마 아빠의 소통 부재,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불륜과 이혼 등으로 가족 자체가 붕괴돼 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이주영 감독이 연출한 ‘싱글라이더(2017년)’는 기러기 아빠의 비극을 통해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묻는 영화다.

‘혼밥’, ‘혼술’로 일관하며 일중독에 빠져 외국으로 떠난 가족에게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기러기 아빠 강재훈(이병헌 분). 증권회사 지점장이었던 강재훈은 회사가 파산하면서 회사에 개인적으로 투자했던 자신도 파산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재훈은 그때서야 비로소 부인 수진(공효진 분)과 아들을 찾아 호주 시드니로 떠난다. 시드니에서 재훈이 발견한 것은 배관공 크리스와 외도 중인 수진의 모습이다. 재훈은 수진을 목 졸라 죽이려고 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다 빼앗기고 이용만 당하면서 뭘 그리 우아한 척하며 사는지….” 홀로 남은 재훈은 오열한다. 호주에 와서 2년간 10시간씩 죽어라고 일해 번 돈을 사기꾼에게 모조리 털리고 역시 빈털터리가 된 유지나(안소희 분)는 그런 점에서 제2의 재훈이다.


그렇다고 부인 수진을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수진은 말한다. “누가 내 삶을 이끄는지, 내 삶의 주체가 뭔지 이제껏 난 모르고 살았어요!”


수진의 대사를 통해 이주영 감독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감독의 질문은 영화의 충격적 반전만큼이나 절절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