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파리의 IT 이야기

후배 기자가 책을 썼다며 최근 저를 찾아왔습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사회부장. 엘리베이터나 사무실에서 만나면 “밥 먹어부러?” “아직 안 먹어부러.” 이런 식으로 ‘불어’로만 대화하는 친한 후배입니다. 책 제목은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더군요. 그래서 “IT 기자랑 한 판 붙어부러?”라고 따지며 웃었습니다. 다들 불나방처럼 하이테크만 좇는데 그래선 안 된다. 이런 내용을 담았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책에서 반복되는 핵심 단어는 4개입니다. 하이테크, 로테크, 하이 콘셉트, 호모루덴스. 하이테크는 첨단 기술이 적용된 디지털 기기나 서비스, 로테크는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하이 콘셉트는 ‘수준 높은 개념’을 의미하고 호모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즐길 줄 아는 호머루덴스가 바람직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등산을 좋아합니다. “내려올 산을 왜 오르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애호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에 오르는 걸 좋아합니다. 이런 게 로테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등산복·등산화·등산장비에는 하이테크가 적용돼 있습니다.

하이테크만 추구하고 로테크를 무시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주말에 모처럼 온 가족이 외식하러 멋진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음식을 시켜 놓고 대화한다면 좋겠죠. “여자 친구와 잘 지내느냐?” “방학 때 해외여행 어디로 가기로 했느냐?” 밥값을 내는 아빠로서는 이런 대화를 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럴 것이라면 뭣하러 외식하러 나왔나 후회스러울 겁니다.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대화하는 게 하이테크라면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것은 로테크 영역에 속합니다. 하이테크는 편리하고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따뜻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보며 대화해야 훨씬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하이테크에 빠지다 보면 로테크의 재미를 잃게 됩니다. 모처럼 외식하러 나가서 저마다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모습. 이게 현대인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하이테크 시대에 로테크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 하이 콘셉트 추구하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탄생
정반대의 모습도 있습니다. 최근 중학교 동창생 모임에 참석했는데 10년이나 20년 만에 만난 친구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도 했지만 ‘깨복쟁이(벌거숭이)’ 친구가 페이스북 친구보다 멀어졌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는 거의 매일 가상공간에서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소상하게 알 수 있죠. 가상공간의 이웃이 떨어진 친구보다 낫다는 얘기입니다.

하이테크를 이용한 로테크 추구도 가능합니다. 깨복쟁이 친구들이 페이스북과 같은 가상공간에 커뮤니티를 개설해 날마다 수다를 떨고 날짜를 잡아 함께 등산한다면 하이테크를 이용한 로테크 즐기기가 됩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무작정 하이테크에 빠질 게 아니라 하이테크를 활용해 로테크를 즐기고 이를 통해 하이 콘셉트를 추구하는 호모루덴스가 되자는 얘기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이란 책에서 보여준 ‘소박한 생활, 고상한 생각(simple life, high thinking)’은 어떤가요.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로테크 하이 콘셉트를 추구했습니다. 소로가 스마트폰(하이테크)을 가지고 있었다면 소박한 생활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강원도 산골에서 트위터를 통해 서울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소설가도 있는 걸 보면 사용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하이테크 시대에 로테크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 하이 콘셉트 추구하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탄생
김광현 한국경제 IT 전문기자 kh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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