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식 로펌 모델 제시한 1세대 '창업인'
-단칸방, 연탄가스, 동치밋국이 유년시절의 기억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작은방 전깃불 아래서 주경야독
-“도전정신이 남아있는 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통상전문 변호사 양성 위한 생태계 확충에 주력할 것”
[PROFILE]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1957년생
2019.03 ~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2006 ~ 2013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1999 ~ 2000 동국대학교 국제정보대학원 겸임교수
1998 ~ 2004 관세청 관세심사위원회 위원
1995 ~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1983 법무법인 세종 설립
1980.06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서울고등학교 졸업
[한경잡앤조이=김병일 편집장 / 장예림 인턴기자]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는 대한민국에 서구식 로펌 모델을 제시한 1세대 '창업인'이다. 김 대표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 당시 사법시험(22회)에 합격했다. 1982년 사법연수원(12기)을 수료한 후 이듬해 법대 선배인 신영무 변호사와 함께 1983년 세종을 설립했다.
국제소송과 중재 업무 등 국제통상법 전문 변호사로 활약했던 김 대표는 외국을 상대로 통상협상에 다수 참여했다. 우리 정부를 대표해 WTO 관련 분쟁도 대거 승소로 이끌었다. 대표적 사례로는,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리자 일본이 제기한 WTO 분쟁, 미국 상무부가 한국산 유정용 강관에 대해 반덤핑 조치를 내리자 우리 정부가 WTO에 제기한 분쟁 등이 있다. 국제통상 분쟁 해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2007년 정부로부터 산업포장을 받았다. 로펌의 대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김두식 대표는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세종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법무법인 세종의 경영 최전방에 나서 국제통상 전문 인력 양성에도 주력하고 있다. 지난 11월 김 대표를 만나 충북 보은의 시골소년에서 ‘국제통상 전문가’가 되기까지 그의 지난날을 되짚어 봤다.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단칸방과 연탄가스, 그리고 연탄가스에서 깨기 위해 마시던 동치밋국이 유년시절의 주된 기억이다. 가정 형편이 주위로부터 주눅 들기 좋은 환경이었다 보니 어려서부터 수줍음도 많이 타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다. 가난했기 때문에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가슴속에 응어리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공부로는 상위권에 속해 주목을 꽤나 받았는데, 그렇게 주목받는 것을 인색해하는 순수한 학생이었다. 유년시절 지냈던 단칸방에는 방 안에 작은 전구 하나 밖에 없었다. 그 작은 전깃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아버지는 내가 서너살 즈음에 돌아가셨다. 빛바랜 아버지 사진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탓에 어디로 갔는지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성격이 아주 강하신 분이셨다. 1남 3녀를 홀몸으로 키우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논이 몇 마지기 있었다. 그 논을 판 20만원을 가지고 누님 2명과 상경하셨다. 나는 고향에 남아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고, 초등학교 4학년까지 경북 청송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다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와 누님은 여관에서 일하거나 식모살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분이 또 있을까 싶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재가를 할 법도 한데, 끝까지 자식들을 책임지셨다.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었던 나를 대학 졸업까지 끝끝내 책임을 지셨다.”
어려운 유년시절 도움을 주신 멘토를 꼽자면
“용산중학교에 다닐 때 국어를 가르쳐 주시던 ‘김보환 선생님’이 생각난다. 하루는 도시락을 안 싸와서 점심시간에 혼자 운동장을 돌아다녔는데, 김보환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뭐라도 잘못해서 부르시는 줄 알았는데, “너 도시락 안 싸와서 돌아다니는 거 아니냐”라며 20원 지폐를 쥐어 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하교 후 그대로 어머니께 드렸다. 또 김 선생님께서는 책방에 나를 데리고 가 책을 사주기도 하셨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 유독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분이셨다. 이후 찾아 뵙고 싶었으나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은사님에 대한 감사함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국제법을 가르치시던 백충현 교수님의 한 마디 덕분에 로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판검사의 길이 아닌 로펌으로 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미치신 분이다. 백 교수님의 경우 애국 충정이 강하신 분으로, 독도 관련 국제법을 많이 연구하셨다. 백 교수님을 만난 당시 4학년이었는데, 우리 동기들 몇 명을 불러 모아서 국제분쟁과 국제계약 등을 다루는 국제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셨다. 외국은 이미 로펌을 통해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국익을 수호하고 있다며 로펌 변호사의 길을 처음으로 알려주셨다. 사법연수원을 마칠 무렵 신영무 변호사가 같이 로펌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일주일 고민한 뒤 한 번 도전해보자 해서 바로 로펌으로 들어갔다. 백충현 교수님이 그 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판사가 되었을 것이다.”
로펌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1200불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유학을 왔다. 방세, 보험료 등을 내고 나니 크게 남는 돈이 없었다. 10년 된 포드 중고차를 사서 타고 다녔다. 너무 오래된 차여서 바퀴에 수시로 펑크가 나기도 했는데, 새 타이어를 살 수 없어 중고 타이어를 사서 끼우다 보니 타이어 가는 일이 일상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법을 배울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참 감사했다. 미국 로스쿨에 있으면서 여러 사회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숙제가 많고 코스가 어려워 너무 공부만 했나 싶다(웃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행사 참여도 활발하게 하고 조금 더 즐겁게 유학 생활을 보내지 않을까.”
이후 실리콘밸리 로펌에 들어갔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로펌 윌슨 손시니(Wilson Sonsini Goodrich Rosati)에서 근무했다. 돈 없는 유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5500불 월급을 받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형편이 그때부터 나아졌다. 당시 업무는 주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기업들에 대한 벤처 파이낸싱과 상장관련 업무였다. 간단한 계약서 검토와 실사가 주된 업무였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느껴져 7개월 정도 근무한 후 유럽 벨기에에 있는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많이 다녔던 기억이 난다.”
변호사 말고 다른 직업을 고려해 본 적이 있는가
“학창 시절 진로를 정할 때 말고는 크게 변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문·이과를 고르지 않나. 당시 이과를 지망했다. 이과 책도 받았다. 그런데 한달만에 문과로 전향했다. 어머니께서 굉장히 반대를 하셨기 때문이다(웃음). 어머니는 내가 공학도 보다 판검사가 되길 원하셨다. 중학교 때부터 교내 그림 대회를 하면 상도 받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그림 그리는 화가를 잠시 꿈꾸기도 했다. 지금은 취미로 그림 전시회를 다니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모으는 일만 하고 있다. 은퇴 후에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워볼 생각이다.”
지금은 사건을 맡고 있지 않나
“사건을 직접 맡을 시간이 없다. 2006년 처음 세종의 대표직에 올랐을 당시에는 경영 업무와 함께 병행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종의 조직이 당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졌기 때문에 내가 경영을 하면서 사건을 직접 처리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몇몇 사건은 초기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있다. 그런 사건들은 내가 직접 관여한다. 대부분의 사건을 후배들에게 물려줬지만, 굵직한 업무는 대표로서 사건 내용을 파악하고 방향을 제시해 준다.”실제로 많이 관여하는 분야는 ‘국제통상업무’다. 자랑은 아니지만 국제통상에 관해서는 아직 김두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웃음). 정부뿐만 아니라 국제회의 및 콘퍼런스 등에서 나를 찾을 땐 일을 직접 한다.”
통상변호사의 특징이 있다면
“WTO 분쟁, 반덤핑 문제, 국제적인 수출규제 건 등의 사건을 맡는 변호사라고 보면 된다. 예컨대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을 모두 통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통상 부문의 경우 국제 분쟁 중에서도 규모가 크지 않은 분야로 여겨져 언론 등 매체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세계적인 기업이 M&A 등으로 하는 기업간 분쟁 규모가 더 크기 때문이다. 통상 분쟁에서 풍성한 수입이 나와야 통상분야를 희망하는 변호사들이 많아질 텐데, 아직은 통상전문 변호사의 생태계가 제대로 확립이 돼 있지 않다. 그래서 세종 자체 내에 ‘통상법센터’를 신설해 전문 연구를 지속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통상 분야 예산을 점차 늘리고 있다. 통상 분야 생태계를 제대로 확충해 놓는 것이 나의 남은 과제라고 생각한다.”
세종의 대표를 두번씩이나 지낸 비결이 있다면
“체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지컬 자체가 강하지는 않다(웃음). 하지만 멘탈 체력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신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감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에 대한 질문과 답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대(大) 세종이 화려한 경력이나 실적을 보유했던 회사인 만큼 과거에는 변호사들 간에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때의 사기와 패기를 지닌 조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 남은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명감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실버세대를 대표하는 경영인으로서 철학이 있다면
“나이가 들수록 모험심이 줄어들고 생각이 늙어질 수 있다. 계속 편한 일만을 추구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정말 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생각이 젊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도전하기 위한 적극성, 창의성 등을 갈고닦아야 한다. 도전정신이 남아있는 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를 꿈꾸는 예비 법조인 및 대학생에게 조언을 하자면
“변호사들은 3~4년 차에 이직을 많이 한다. 사내 변호사 제의도 많이 들어온다. 사내 변호사를 하면 다양한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보면 한곳에 오래 정착하는 문화가 줄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요즘 청년들의 근성과 충성심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요즘 청년들이 생각하는 인생목표가 예전과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젊은 변호사들의 경우, 최고의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펌의 고된 업무를 감당해 내기 보다는 추구해야 할 다른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다른 업계를 희망하는 청년들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을 계속하길 바란다.”
kbi@hankyung.com
[사진=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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