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 10~20대 Z세대를 위한 신개념 라디오 플랫폼 '스푼라디오'를 운영하는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를 6월25일

서울 강남구 스푼라디오 본사에서 만났다. 사진=서범세 기자



[한경 잡앤조이=이도희 기자] 1998년, 스타크래프트가 몰고 온 광풍이 대학 신입생이던 최혁재(41) 스푼라디오 대표에게도 휘몰아쳤다. 당시 전략게임의 완전체로 불리던 ‘스타’의 매력에 빠진 그는 그길로 PC방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꼬박 1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게임회사에서 일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그 시절의 여느 ‘게임폐인’과 다르지 않은 전개(?) 과정이었다.


최 대표의 특별함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한다면 한다’는 그는 곧장 PC방을 탈출해 군에 지원했고 병역특례로 게임회사에 입성했다. 곁다리로 본 프로그래머의 화려한 손놀림은 그를 더욱 매료시켰다. “와, 암호 같은 코드를 짜서 넣으니 캐릭터가 움직이다니, 너무 멋있잖아. 그에게 프로그래머는 동경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그때, 네이버와 다음 등 IT기업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프로그래머 출신 창업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 대표는 곧바로 ‘프로그래머 CEO’로 방향을 틀었다. 최 대표에게 창업은 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먼 친척 이모부가 당시 대형 IT벤처의 초기멤버였다. 삼성에 잘 다니던 이모부가 돌연 퇴사와 함께 창업 소식을 알렸을 때 친척들은 모두 뒤집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이모부는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 ‘자수성가 CEO’가 청년 최혁재에게 준 영향력은 상당했다. 최 대표는 이후 바닥에서부터 성장한 인물들의 이야기만 골라 읽기 시작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삶이었던 것이다.


대기업 입사 성공… 이제 또 어떤 도전을 하지? “창업이다!”

프로그래머로서의 첫 발을 위해 최혁재 대표는 군 제대 후, 곧바로 외부 교육센터에서 1년간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정보통신학을 전공했지만 실제 프로그래머가 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7세, 마침내 한 작은 벤처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서 일을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실력이 뛰어난 천재 프로그래머도 아닌 평범한 개발자 중 한 명이었지만 점점 욕심이 생겼어요. 조금 더 규모가 큰 회사에서 더 큰 프로젝트를 맡아보고 싶었죠.”


그는 그 간의 경력을 살려 지금은 사라진 PMP(휴대용 멀티미디어 기기)시장의 선두주자인 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대기업을 향한 열망을 싹틔웠다. 갓 졸업했을 때와는 조건도 달랐다. 이제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경력이 있었다. 2009년 31세가 되던 해 그는 마침내 LG전자 MC연구소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로 쿼드코어 폰이 세상에 선을 보이는 등 시장에 새로운 과제가 쏟아지던 시기였다. 그는 구글과의 협업으로 넥서스5폰(세계 안드로이드 기준 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당시만 해도 신제품 출시 약 한 달 전부터 개발자 수백 명이 다 같이 숙소에 들어가서 합숙을 했어요. 완벽한 출시를 위해 스퍼트를 내기 위해서죠. 외박은 주말에만 잠깐 가능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멀리갈 수 없다는 게 우리 직원들의 신념이었어요.”


큰 프로젝트를 맡으며 늘 새로운 것을 배웠다.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 어딘가 공허했다. 만족이 없는 그에겐 역시 또 한 번의 성장 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잊고있던 대학시절의 꿈이 떠올랐다.


“전 늘 성공을 동경했어요. 좋은 차도 타고 강남의 좋은 집에 사는 게 제겐 성공이었죠.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는데 역시 직장생활로는 답이 없겠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다시 답을 찾아봤는데 그게 창업이더라고요.”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사업 아이템은 ‘휴대폰 배터리’였다. 당시 모든 휴대폰이 분리형 배터리를 사용했을 때였다. 한 배터리를 다 쓰면 다른 완충된 배터리로 갈아 끼워야 하는 불편함을 개선해보자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완충된 배터리를 판매하는 것. 스마트폰 전문가인 주변 동료들은 ‘누가 남의 배터리를 쓰려고 하냐’며 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 대표는 이들이 틀리다는 걸 입증해보이고 싶었다. 주말에 짬을 내 직접 홍대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이 ‘배터리 품질이 내 것과 같다면 사용하겠다’는 답을 내놨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최 대표의 친동생 역시 그의 꿈에 공감했다. 둘은 함께 퇴사를 결심했다. 집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형제는 사무실 임대료를 아끼기 위해 길거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완충 배터리가 필요할 고객을 찾아 서울 홍대와 강남의 클럽 등을 직접 찾아다녔다. 배달도 오토바이로 직접 했다.


“첫 시작이 12월 24일이었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형제 둘이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 영업을 다녔죠. 노점상이나 취객에게 욕먹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서비스를 알려야했기에 큰 소리로 설명을 하면서 계속 부딪혔어요.”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휴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일’을 다 했다. 하지만 몸보다 힘든 건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대기업 연구원 때려 치고 거창한 것 하는 줄 알았더니 고작 그거냐’는 주변의 말들이 비수가 돼 꽂혔다.


그럴수록 최 대표는 보란듯이 더 뛰어다녔다. 어느 정도 고객이 확보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불특정 투자자들에게 전부 이메일을 돌려 사업을 알렸다. 얼마 뒤, 한 곳에서 답이 왔다. 초기 스타트업, 엔젤투자사인 본엔젤스였다. 이곳에서 2억 원의 최초 시드투자를 확보했다.


2013년 5월, ‘만땅’이라는 이름의 법인도 설립했다. 곧이어 이색적인 서비스로 주목받은 만땅은 투자사로부터 7억원의 투자금을 추가로 유치했다. 실리콘밸리 해외연수 기회도 주어졌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회사를 보며 최 대표와 직원들은 조금씩 성공을 눈앞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삼성전자가 배터리 일체형 갤럭시폰을 내놓기 전까지는.


갤럭시가 선물한 ‘스푼라디오’라는 기적

갤럭시의 ‘혁신적인’ 등장 이후 만땅이 폐업 직전단계까지 가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 대표는 절망에 빠졌다. 그때 불현듯 팀원 중 한명이 ‘지금 우리 같은 힘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제안해왔다. 익명으로 누구나 음성을 녹음해 이야기를 나누는 플랫폼이다. 지금의 스푼라디오 초기 콘셉트다.


기존 오디오플랫폼이 계획 하에 편집된 완성본을 올리는 형태인 것과 달리, 최대 5분의 짧고 부담 없이 가벼운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친구와 수다 떨듯 연애나 진로 등 모든 인생의 고민을 나누고 비슷한 친구들이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이번에도 곱지 않았다. 팀원들은 “비디오가 대세인 판국에 오디오가 웬말이냐”는 걱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야 했다. 덕분에 모두는 ‘본때를 보여주자’는 독기를 품었다. 매일 밤을 새며 제대로 된 서비스를 선보일 때만을 기다렸다. 2016년 3월, 마침내 스푼라디오가 정식 런칭했다. 법인명도 ‘마이쿤’으로 재탄생했다.


스푼라디오는 개인 라디오 방송서비스다. 누구나 앱을 설치하면 개인 라디오를 생방송으로 들을 수 있다. 청취자들은 디제이에게 현금스티커도 선물한다. 이 후원금 수익을 DJ와 회사가 나눈다.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처음에 다 안 된다고 했어요. 누가 소리만 듣고 돈을 내냐고 의심했죠. 스푼라디오는 ‘위로’에 집중했어요, 재미있는 콘텐츠도 있지만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을 이끌어냈더니 정말 후원이 들어오더라고요.”


지금의 대박을 이끈 비결은 10~20대를 대상으로 한 ‘타깃팅’이라고 최 대표는 설명했다. 처음부터 타깃을 좁힌 건 아니었다. 사업이 계속될수록, 이들 젊은 층에서 유독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 최 대표는 “10~20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쥔 이른바 Z세대다. 이들 세대에게 오히려 써 보지 않은 라디오가 새롭게 다가온 것”이라고 말했다.

서비스 런칭과 함께 곧바로 ‘마케팅’을 시작한 것도 주효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 최 대표는 ‘모든 온라인 채널’에 광고를 깔았다. 그가 온라인에만 집중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오프라인에서는 광고 효과를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스푼라디오의 마케팅 인력은 50명에 달한다.

최 대표는 ‘시장이 작은 오디오사업을 왜 하느냐’는 우려에 대한 답안도 만들어냈다. 바로 해외를 뚫은 것. 스푼라디오는 현재 인도네시아, 베트남, 일본, 중동5개국, 미국까지 5개 나라에 진출해있다. 작년부터 가시적인 성과도 나오기 시작했다. 트래픽과 매출이 해외비중이 국내를 앞지른 것. 일본에서는 전체 오디오 라이브 앱 가운데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현지 마케팅 인력도 확보했다. 최 대표는 투자자 등으로부터 우수한 마케터를 추천받으면 그길로 현지로 날아가 면접을 봤다. 호텔 로비에 자리를 깔고 길게는 아침부터 손짓발짓은 물론 번역기도 총동원해 하루 종일 면접을 봤다. 합격자는 한국으로 초청해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간 스푼라디오의 마케팅을 교육했다. 현재 120명의 스푼라디오 전 직원 중 25%에 달하는 30여명의 외국인 마케터들이 현지에서 회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스푼라디오는 일본 만화의 소재로도 활용됐다. 스푼라디오 방송으로 알게 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현지 출판사로부터 해당 먼저 제안이 왔다. 또 한 DJ의 콘텐츠가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 주제가로 사용됐다.


스푼라디오는 “보란듯이 잘 되겠다” 독기가 만들어낸 반란

2019년 기준 스푼라디오는 누적 67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주 수입인 아이템 판매액은 지난해 486억원, 올해는 10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누적 다운로드 1500만회, 월간 사용자도 220만명에 달한다.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요즘 최 대표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느라 바쁘다. 스푼라디오의 출근시각은 오전 10시. 그는 늘 30분 전에 회사에 도착해 밤새 쌓인 이메일부터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미팅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의 달력은 매일이 비즈니스 미팅으로 빼곡하다. 채용이 수시로 있기에 틈틈이 면접에도 들어가야 한다. 저녁 7시, 직원들은 퇴근할 시간이지만 최 대표에게는 또 다른 일이 시작된다. 저녁 식사자리다. 대부분은 일로 만나는 사람들이다. 집에 도착하면 어느덧 새벽 1시.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돼 또 하루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그를 힘나게 하는 원동력은 역시 ‘독기’다. 대기업을 박차고 나왔을 때 손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매일 자신을 다잡고 있다.


만땅에서 겪은 설움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창업 초기, 자금난에 허덕거리던 그는 카드 돌려막기부터 시작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빚을 내기도 했다. 사업이 정말 어려울 때는 차비가 없어서 외출을 못할 정도였다.


“실제 경험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비참하다 못해 죽고 싶기까지 하죠. 그때 어머니가 편찮으셨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비도 드리지 못했어요. 어머니를 보면서 ‘내가 잘 되서 어머니를 꼭 호강시켜드릴거다’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죠.”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현재 회사는 사세확장에 집중하고 있다. 동시에 올해부터는 본격 수익화를 위한 여러 테스트도 가동할 계획이다. ‘유료 청취자 전용 방송’ ‘라디오 콘서트’ 등이다. 방송 전후에 광고를 넣는 것도 고민 중이다.


자율성이 보장된 만큼 방송 아이템 소재에 대한 지적도 계속해서 나온다. 선정성이나 폭력성에 대한 방패막이 약하다는 것. 최 대표는 “신고수가 일정량 이상이 되면 자동 블라인드 처리 되게 하고, 24시간 모니터링도 가동 중”이라며 “심각한 수준이라 생각되면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해 벌금을 문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 대표의 최종 꿈은 10~20대에게 라디오란 ‘스푼라디오’가 되게 하는 것. 특히 ‘참여’에 익숙한 Z세대에게 기성 라디오보다 간편한 참여방법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스푼라디오는 댓글이나 사연신청 외에도 게스트 초대 장벽을 낮춰 청취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최 대표는 요즘 사용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힘이 난다고 말한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소감은 ‘인생이 바뀌었다’는 한 DJ의 감사 메시지다.


“스푼라디오 DJ 중에는 실제 라디오DJ를 꿈꾸던 사람이 많아요. 이들이 오프라인에서는 주목받지 못하지만 라디오라는 공간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보듬고 이들과 소통하며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최혁재 스푼라디오 대표  “‘만족 없는 삶’, 스푼라디오를 만들어낸 단 하나의 원동력”

최혁재 대표는 친동생이자 현재 운영총괄을 맡고 있는 ** 부대표(오른쪽)가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사진=서범세 기자



스푼라디오에서 꿈만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일부 DJ는 상당한 수익도 벌어들인다. 최 대표는 “지난해 한 DJ는 1년 동안 10억 원을 벌어 집을 샀다”고 말했다. 지난해 스푼라디오 인기 DJ들의 월 평균 수익은 약 1억5천만원이다.


최혁재 대표는 현재 스푼라디오가 습관화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IT서비스 중 10~20대를 타깃으로 한 사업이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스푼라디오는 이들 세대를 위한 기존에 없던 라디오 사업을 시작했어요. 제가 스푼라디오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유입니다.”

tuxi0123@hankyung.com

[사진=서범세 기자, 스푼라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