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단칸방에서 4남매가 함께 지낸 유년시절...“의지력과 끈기로 여기까지”
-“제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존경할 만한 인물들”…“언제나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더 아름답고 더 좋게 디자인하는 전문인력 양성이 목표” 송수근 계원예술대학교 총장
1961년생
2016.12~2017.6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
2014.10~2016.12 문화체육관광부 기획조정실 실장
2013.12 새누리당 교육문화체육관광정책위원회 수석전문위원
2013.4~2013.12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콘텐츠산업실 콘텐츠정책관
2011.3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 국장
2010.10~2011.3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 단장
2007.10~2010.9 제12대 뉴욕한국문화원 원장
2006.10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미디어국 국장
1988 제31회 행정고시 합격
경희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제법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 행정학 학사
[한경 잡앤조이=김병일 편집장 / 장예림 인턴기자] 계원예술대학교는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 산자락에 위치한 디자인 특화 예술대학이다. 전 학년 합쳐 3000여 명 정도인 아담한 규모의 계원예술대는 입구부터 울긋불긋 여린 단풍들이 가을을 반기고 있었다. 예술대학의 명성에 걸맞게 학교 곳곳에는 감각적인 조형물들과 건물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송수근 계원예대 총장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시청 앞 광장 100만 인파 응원’ 기획의 주역이다. 송 총장은 30년 가까이 내무부, 공보처,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서 공직생활을 하며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섰다. 케이블티비 도입, 민영방송 출범과 같은 콘텐츠 분야의 굵직한 국가사업에도 일조했다.
화려한 업적과 명성과는 달리 송 총장의 유년 시절은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황학동 어느 작은 단칸방에서 4남매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언제나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10월의 단풍만큼이나 오색찬란했던 송수근 총장의 지난날을 들어봤다. △중학교 시절 송수근 총장.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양친 모두 의지력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하셨다. 젊었던 시절 폐결핵 등 갖은 병을 가지고 계셨는데, 본인 스스로 병을 치료하려고 한의대에 진학하신 것이다. 6년의 수학 끝에 어렵사리 신당동에 자그마한 한의원을 냈지만, 한의원 운영이 썩 잘 되지는 못했다. 결국 한의원을 닫으시고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가 생겨 영어의 몸이 되셨다. 실형을 선고받으시면서 집안이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작은 단칸방에서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옥중에 계실 때는 어머님 혼자 행상을 하시며 형제들을 키우셨다. 어려서부터 공부는 곧잘 했지만, 당시 집안 형편으로는 공부를 잘해도 대학 등록금 댈 돈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선 장학금을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학과 수석을 목표로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진학했고, 수석 장학금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학 4년 내내 교우회 장학금을 받아 학교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며 생활비를 벌고 그렇게 지냈다.”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나
“특정하게 어떤 꿈을 가져본 적은 없다. 하지만 늘 ‘아주 뿌리가 깊고 가지가 곧으며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나무가 되겠노라’고 어려서부터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때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자신의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에게 ‘당신이 자애로운 큰 바위 얼굴이 아니냐’는 말을 듣지만, 여전히 위대한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지 않느냐. 이것과 같은 마음으로 늘 오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명장을 수여받고 있는 송수근 총장.
존경하는 분 혹은 멘토가 있나
“제가 만나는 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멘토다. 게임에서 점수를 따듯, 모든 사람에게는 다 배울 점이 있고 존경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저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줬던 사람이 한 분 있는데, 공보처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할 당시 모셨던 오인환 장관님이다. 그가 했던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노루목을 지켜라“는 것이다. 이건 내 좌우명이기도 하다.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에 덫을 설치해 그것이 올 때에 맞춰 기다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너무 많이 앞서가거나 뒤쳐져서는 안 된다. 사슴보다 적당히 한 발 앞서서 기다리는게 중요하다. 살아가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다. 지금 축적된 것을 가지고 남들보다 조금 더 나아가는 것이다. 거창한 것이 아닌, 한발 앞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다.”
공직 생활을 오래하셨다
“관료 생활을 30년 정도 했다. 내무부 관료로 시작해 공보처,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부 등 다양한 부처에서 공직 경험을 했다. 2017년 마지막으로 공직을 그만둘 때는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었다. 당시가 격동의 시절이었던 관계로 장관 직무대행으로 퇴임을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용인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강의하다가 작년 8월, 계원예대 총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공모과정을 거쳐 오게 됐는데, 공무원 재직 중에 문화예술 관련 업무를 했던 것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더라.” △2002년 청와대 행정관 재직 당시 송수근 총장(왼쪽 두번째)과 한일월드컵 기획 담당자들.
구체적으로 문화예술 관련 어떤 업무를 했나
“사무관으로 근무할 때에는 주로 미디어 정책이나 홍보 관련 업무를 했다. 케이블티비 도입, 민영방송 출범과 같은 정책 업무도 하고 국정홍보, 외신업무 같은 홍보업무도 담당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업무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있을 때 2002월드컵 업무가 아닐까 싶다. 당시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를 만들었던 일과 월드컵 4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시청앞 광장 100만 인파 응원’을 기획한 일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이 있어 피아노 반주법 책을 내기도 했다.”
공무원이 되려고 한 이유가 있었나
“영문학도였기에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공무원은 아예 생각도 못 했다. 공부를 곧잘 하니까 부친은 판검사가 되길 원하셨지만, 사법고시는 전혀 적성이 맞지 않아 시작도 하지 않았다. 고시 공부를 해도 전공인 영문학에 맞게 외무고시를 보려고 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진로를 고민하던 중 공무원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돼 행정고시에 도전하게 됐다. 당시 1차 시험에 영어 문제가 출제됐다.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에는 자신이 있어서 1차는 쉽게 됐고, 2차를 두세번 정도 본 끝에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을 했다.”
공무원 시험 영어강사로도 근무했다는데
“행시에 합격한 후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몇 달간 고시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했다. 당시 수강생은 몇백 명이었는데, 하루에 8시간을 강의할 정도로 인기가 괜찮았다. 같이 고시공부를 했던 후배들도 내 강의를 듣곤 했다. 당시 바짝 일해서 꽤나 큰돈도 만지고 그랬다. (웃음)” △청와대 행정관 재임 당시 회식자리에서 송수근 총장(왼쪽 첫번째)과 그의 동료들.
1년여 계원예술대 총장으로 재직하신 소감은 어떠한가
“문체부에서 오래 일을 하긴 했지만 예술대학과 큰 인연은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사업은 여럿 진행한 경험이 있다. 그런 점들을 높게 평가받은 덕분에 총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제가 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앞으로의 역할은 ‘계원예대의 명성을 이어나가고 살림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다. 계원예대가 가지고 있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예술인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행정적으로 체계적인 예술대학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계원예대의 자랑이 있다면
“예술대학이라는 이름을 내건 학교는 전국에 몇 개 되지 않는다. 계원예술대학교는 예술 중에서도 미술, 특히 디자인 분야에 특화된 예술대학이다.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 자락에 위치해 주변 경관이 뛰어나기로도 유명하다. 학생 수는 1, 2, 3학년 다 합쳐 3000여 명 정도로 아담하지만 능력 있는 예술 전문 인력들을 많이 배출했다. 세상을 더 아름답고 더 좋게 디자인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학교의 목표다.”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지루하고 반복적인, 단조로운 일상을 참고 견뎌내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같이 빠르게 급변하며, 재밌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더더욱 단조로운 생활을 잘 견뎌내야 한다. 피카소도 어린 시절 그의 부친에게 새의 다리만 그리는 작업을 오래도록 배웠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피카소를 인상주의 화가로만 알지, 초기에 세밀화를 그렸던 화가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반복적인 기초들이 쌓여 피카소는 창의성이 넘치는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를 정해 깊이 있게 파는 수 밖에 없다. 단조로움을 견뎌내지 못하다면 결코 그 무엇도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kbi@hankyung.com
[사진=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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