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잡앤조이=김예나 기자] 무대(혹은 길거리) 위, 두 개의 이젤을 끌고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음악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양쪽을 오가며 무표정으로 춤을 춘다. 뒤편에 놓인 이젤에 한 사람이 목탄으로 ‘스윽스윽’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어깨에 멘 화통에서 도화지를 꺼내 앞자리 관객의 얼굴을 즉석에서 그려주고, 길고 가느다란 흰 풍선을 불어 머리에 뒤집어쓰거나 붉은 천으로 투우사를 재현하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공연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이젤 위에는 아그립파의 크로키화가 놓여있고, 관람객들은 감탄의 함성을 터트린다. 어떨 때는 두 사람이 동시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그림 좀 아는 사람’이 그 과정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봐도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림이 완성된 후 비밀과 반전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갈채와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유쾌하게 그림 그리는 형제’ 크로키키 브라더스가 선보이고 있는 ‘드로잉 서커스’ 공연이다.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드로잉 클라운(왼쪽)과 코알. 사진= 이승재 기자
‘드로잉 서커스’라는 장르는 새롭고, 조금 낯설다. 하지만 고상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명화(名?)’도 그들의 ‘드로잉 서커스’를 통해 유쾌한 콘텐츠로 재탄생 한다. 완성된 ‘작품’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그려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누구나 쉽게 그림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크로키키 브라더스가 추구하는 ‘예술’이다.
화법 ‘크로키’와 웃음소리 ‘키키’… ‘드로잉 서커스’의 탄생
크로키키 브라더스는 드로잉 클라운(우석훈·35)과 퍼포머 코알(임동주·33)로 이뤄진 국내 유일의 ‘드로잉 서커스단’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2월 세종아트센터에서 ‘콜라보레이션’ 형태의 기획 공연을 하며 처음 만났다.
이전까지 두 사람은 아티스트로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두 사람은 이 공연을 계기로 ‘드로잉 서커스’의 가능성을 보게 됐고, 지난 5월 실내 공연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거리 공연을 위해 기존의 공연 레퍼토리를 새로 구성하고, 의상과 그림, 형식도 모두 바꿨다. 그 결과 안산거리예술축제 ‘광대의 도시’에서 최우수 공연으로 선정됐고, 일본과 싱가포르, 호주 등 해외 거리 공연을 다녀오기도 했다.
드로잉 클라운 “‘크로키키 브라더스’라는 팀명은 화법(?法)의 한 종류인 ‘크로키’와 웃음소리 ‘키키’를 합친 말이에요. 기획 공연 전까지 저는 ‘그림 그리는 광대’라는 이름대로 ‘드로잉 코미디’를 하고 있었고, 코알은 ‘서커스 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둘이 만나니 ‘드로잉 서커스’라는 장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 면에서 ‘크로키키 브라더스’는 ‘드로잉 서커스’라는 장르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드로잉 클라운(왼쪽)과 코알. 사진= 이승재 기자
두 남자는 모두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드로잉 클라운은 지난 2014년 방송한 디자인 서바이벌 프로그램 ‘슈퍼 컴퍼니’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실력파 아티스트다. 뮤지컬 ‘헤드윅’의 라이브 영상 작업도 했고, 시집에 삽입되는 일러스트 작업이나 가수의 앨범 재킷에도 참여하는 등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디자이너로 활동해 왔다.
재밌는 사실은, 그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정작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생각이 닫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림보다 춤을 더 좋아해 비보잉을 하며 ‘익스프레션 크루’에도 잠시 있었다. 그는 “비보잉을 하다 보니 무대 위에 올라갈 경험이 생겼고, 무대 위에서 여러 장르의 공연을 하다가, 드로잉과 공연을 접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코알 역시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그도 춤을 췄고, 거리에서 공연을 해왔다. 그는 광대 공연에 푹 빠져 있었다. 다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 공연이나,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날 때 드로잉 클라운을 만났다. 지금의 공연에서 그가 선보이는 그림 실력은 모두 드로잉 클라운에게 받은 교육과 학습의 결과물이다.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공연 모습. 크로키키 브라더스 제공
미술과 코미디의 적절한 균형… “누구나 손쉽게 그림을 접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은 왜 무대 위에서 크로키화를 그리게 됐을까. 드로잉 클라운은 “무대에서 주어진 시간 내에 작품을 완성 시켜야 하고 사람들에게 재밌게 보여 질 수 있는 화법을 찾다 크로키를 하게 됐다”며 “하지만 크로키만 그리는 건 아니고, 공연에서 여러 화법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또 미술과 코미디를 접목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개 그림은 전문 지식이 있어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 많은 사람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며 “그림은 언어가 전해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누구나 손쉽게 그림을 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더 재밌어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코알 “첫 공연 때는 한 사람은 퍼포밍을, 다른 사람은 그림을 그리며 각자 할 수 있는 형태로 공연을 구성했는데, 거리로 나오면서 제대로 된 듀오 공연을 선보이고 있어요. 드로잉 클라운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제가 그림을 안 그릴 때는 노래를 하거나 춤이라도 춰야하는 거죠. 미술과 코미디가 적절히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tvN ‘문제적 남자’ 화면 캡처
예능 프로그램서 선보인 ‘라이트 드로잉’ 퍼포먼스… 호평
크로키키 브라더스는 최근 tvN ‘문제적 남자’에 문제 출제자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음악이 흐르면 암흑 속에서 한 편의 동화가 시작된다. 자체 제작한 스크린 위에서 특수 손전등을 활용, 어둠과 빛을 활용한 빛의 예술 ‘라이트 드로잉’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그림이 점점 옅어지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며 스토리가 이어진다.
또 중간 중간 두 사람은 손에 든 손전등으로 색색의 빛을 쪼이며 환상적인 드로잉 아트를 암흑 속에 수놓는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문제 자체가 예술’이라는 호평을 이끌어 내며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로잉 클라운 “‘문제적 남자’ 출연은 우리 공연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가장 세련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반전과 기회’가 있는 공연의 정체성 자체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죠. 또 우리가 직접 참여해 더욱 참신한 아트를 기획하고 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잘 맞았어요. 생각보다 보신 분들의 반응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공연 모습. 크로키키 브라더스 제공
거리 공연에 최적화 된 레퍼토리… 해외 거리까지 나서다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공연은 실내 공연장보다 거리에서 더 쉽게 만날 수 있다. 드로잉 퍼포먼스를 하는 아티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많지만, 이들이 공연에서 선보이는 작품과 퍼포먼스는 두 사람이 직접 만든, 유일무이한 콘텐츠다. 그들의 공연 레퍼토리는 거리 공연에 최적화 돼 있다.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저녁 식사로 삼겹살을 구워먹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했는데, 고기 굽기에 열중하느라 그림이 완성돼도 박수조차 나오지 않았다.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나오기 직전 찰나의 정적 속에서 들린 “아 고기 탔잖아”라는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은 웃음을 참느라 눈물 콧물을 뺐다.
코알 “보통 30분 거리 공연을 위해 한 달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요. 지금은 어느 정도 공연 스타일과 포맷이 정해졌죠. 거리 공연에 최적화된 레퍼토리지만 실내에서 공연을 해봐도 반응이 좋아요. 운 좋게 안산거리예술축제 ‘광대의도시’에서 최우수 공연으로 선정되면서 ‘일본 다이도게이 월드컵’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는데, 전 세계 100여개의 공연팀들과 나흘 간 하루에 세 번씩 거리 공연을 할 수 있었어요. 국내 거리 공연과 해외 거리 공연의 반응은 비슷합니다. 공연에 서커스적 요소가 섞여있다 보니 관객들이 친근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죠. 기존의 거리 공연이나 광대 공연과는 다른 그림 그리는 공연이라는 장르 자체를 신기하게 보고 재밌어 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드로잉 클라운(왼쪽)과 코알. 사진= 이승재 기자
“대중이 취향에 맞는 공연을 찾기를…오랫동안 공연하는 것이 꿈”
크로키키 브라더스는 현재 여러 공연팀이 함께 모여 만든 창작 집단 ‘쇼머스(SHOWMOUS)’에 속해있다. 쇼머스에는 크로키키 브라더스까지 여섯 개 팀이 소속돼 있다. 비눗방울 콘텐츠를 활용하는 버블드래곤, 저글링 듀오 서커스 공연을 선보이는 팀퍼니스트, 기계와 물리학을 접목해 나홀로 서커스를 펼치는 마린보이, 요요 콘텐츠 공연을 하는 라운, 경력 40년의 서커스 공연자 다이스케 등이 그들이다. 쇼머스에 속한 아티스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함께 하는 공연을 연다. 공동작업 형태다. 오는 11월에 크로키키 브라더스는 팀퍼니스트와 일본의 비눗방울 아티스트 등과 함께 성수아트홀에서 합동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다.
크로키키 브라더스의 꿈을 묻자, 두 사람은 모두 “오랫동안 공연을 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금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그림 공연은 앞으로 그들이 공연을 오랫동안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드로잉 클라운 “저희의 공연은 작품을 논하는 미술이 아닌,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과정이 재밌다보니 공연이 끝나고 그림을 직접 그려보고 싶어하는 관객들도 있어요.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희도 그림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쉽게 그림을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코알 “좋은 콘텐츠의 공연이 정말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연에 관심을 갖고 본인의 취향에 맞는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중이 본인의 취향에 맞는 공연을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저희 아티스트들의 몫이니, 저희도 기존에 했던 것들만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그림 공연이 최초의 시도는 아니지만, 우리 아이템은 우리가 직접 개발한 것들이고, 어느 장르를 가져오더라도 크로키키 브라더스만의 버전을 만들 생각입니다. 어느 콘텐츠를 하더라도 ‘어떻게 크로키키같이 보이게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겠습니다.”
△크로키키 브라더스 제공
“요즘 시대의 청년들은 너무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있죠. ‘포기하지 말라’, ‘실패를 두려워말고 도전하라’는 말이 섣부른 충고가 될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불과 스무살 때만 해도 ‘드로잉 서커스’라는 새로운 장르의 공연이 생기고 그 공연을 우리가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죠.
새롭게 달라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는 삶을 살길 응원할게요.”
yena@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크로키키 브라더스 제공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