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명문대 애들은 신분증으로 꼭 ‘학생증’을 내민다”고. 실제로 대학 1학년 때, 신촌의 모 대학에 입학한 친구와 함께 영화관에 갔는데 이 친구가 바로 학생증을 꺼내더라.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출돼 있다. 대학을 나열할 때 꼭 서울대를 맨 앞에 쓰는 것에도, 출연자가 명문대 출신이라고 하면 ‘오~’라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는 연예인들에게도 무감각해졌다.


물론 학벌사회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매 연초, 고등학교 앞에 걸리는 대학 합격 현수막을 보고 대다수의 졸업생들이 ‘나는 저 숫자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구나’라는 자괴감에 빠진 채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가히 기쁘지만은 않다.


최근,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입법 제정에 나섰다. 요지는 기업의 직원 채용에서 학벌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운동을 총괄하는 송화원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 캠페이너는 현재의 학벌중심사회의 궁극적 원인은 단순 대학이 아닌 기업의 학벌중심 채용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6월 3일 용산구 한강대로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사무실에서 송화원 캠페이너를 만났다.



 사교육없는세상,“왜 서울대생은 취업도 잘 돼야 하나요?”



- ‘출신학교차벌금지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 학벌을 보지 말자는 법이다. 최근 통계청 조사결과, 부모들이 사교육에 돈을 쓰는 가장 큰 이유가 대학이 아닌 취업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즉, 지금의 학벌중심사회의 끝에 있는 건 대학이 아닌 취업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대학체제를 개편하고 입시교육을 약화시키려 해봐도 결국 기업이 사람을 채용할 때 학벌로 차별하면 소용이 없다.


- 이 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출범 이유 자체가 입시사교육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목표 중 하나가 이 관련 법안 제정이었다. 2014년, 본격적으로 실태조사나 토론을 시작했고 지난해 공기업과 사기업의 채용동향을 조사하면서 이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이들 기업 중 90%가 지원서에 학벌을 적도록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수저논란이 불거지면서 사람들이 학벌문제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았다. 또 최근 정부나 기업이 계속 탈스펙 정책을 홍보하면서 오히려 학벌문제가 해소됐다는 착각을 하게 될까 안타까웠다.


사실 아무리 이런 게 있어도 주체적으로 흐름을 바꾸는 정책집단은 없다. 기본 시스템은 그대로인 셈이다. 현장에서는 계속 학벌타파를 주장하는데 이 기대에 비해 실제 변화는 매우 늦다. 고용정책법 7조에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라는 조항도 있지만 역시 선언적에 불과하다. 법률로 막아줘야 한다.


- 하지만 학벌은 정당한 노력의 결과라는 의견도 많다


물론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서울대에 간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나. 왜 대학 간판이 그 사람의 능력과 인성을 모두 대표한다고 생각하나. 학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또 요즘의 수저논란처럼 학교가 100% 그 사람의 노력이 아닐 수도 있다. 대학은 후천적으로 얻은 배경 중 하나로만 봐주면 충분하다. 취업은 학교가 아닌 그 사람의 재능과 그동안의 삶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지금은 학벌의 비중이 너무 크다.


- 현재 진행상황은 어떠한가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는 중이다. 현재는 법률제작, 국회의원질의, 토론회, 길거리 서명운동을 동시다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명 운동의 경우 처음 목표가 10만 명이었으나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100만 명으로 늘렸다. 다음 주에 국회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내고 전국 길거리서명운동도 계속할 예정이다.


-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까


이 법안은 여야 상관없이 답을 잘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무응답도 답변으로 처리한다.



 사교육없는세상,“왜 서울대생은 취업도 잘 돼야 하나요?”



- 최근 기업들도 탈스펙 채용을 많이 하는데


서류전형이 없는 진정한 탈스펙 전형은 긍정적으로 본다. 이런 게 주목받지 않는 사회면 얼마나 좋을까. 오히려 일반 공채전형이 뉴스가 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또 꼭 이런 게 아니어도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학벌 안 본다’고 말한다. 학벌 본다고 하는 기업이 어디 있나. 그런데 서류전형에 출신학교 기재란은 있다. 그럼 이 기재란을 없애면 되지. 단 지역인재같이 특수한 경우에만 적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기업 입장에서는 지원자가 많으니 걸러내야 하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러다보면 지방대 학생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벽이 생기는 것이다.


- 정부의 NCS 도입은 어떻게 보나


토론회 등에서 현장 교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부가 너무 교육과정에 깊게 개입한다는 불만이 있더라. 물론 직무중심이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사회적 합의나 검토가 전혀 없이 정부 주도의 리스트를 일방적으로 맞추라고 하는 방법은 틀린 것 같다. 대학 프라임사업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게 제도화되는 방식이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 최근 비슷한 맥락의 ‘학벌없는사회’가 해산됐다


안타까웠다. 또 한편으로는 해체선언문에서 학벌문제보다 자본문제를 더 큰 것처럼 이야기한 것에는 당황스러웠다. 학벌종식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힘이 빠졌다고 할까. 여전히 이 사회에서 학벌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나라 사교육비가 월 평균 25만원으로 2007년 이후로 최대치를 기록했다. 대체 우리사회가 얼마나 고도성장하고 있길래 사교육비를 이렇게 많이 쓰나.


- 사교육비가 왜 줄지 않는 것일까


학생들은 입시경쟁에서 학업성적의 소수점 단위로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 결과로 마치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느낀다. 또 학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돈을 투자한다. 우리나라는 대학에 지역프레임이 있다. 인서울, 지방대라는 단어 말이다. 서울대가 지방에 별도 캠퍼스를 만들었지만 학생도 교수도 누구하나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지방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즉 이런 프레임이 깨져야 하고 이건 기업이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의 모 대학의 특정 전공을 키워서 거기에 있는 인재를 채용하는 거다.



 사교육없는세상,“왜 서울대생은 취업도 잘 돼야 하나요?”



- 거리서명운동은 어떻게 진행되나?


서울 상암동을 시작으로 천안, 수원 등 전국 50여개 지역모임이 주관한다. 11일에는 종로 모임도 예정돼 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사당같이 지방대학 스쿨버스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방문한다. 이번 주에 서울 홍대 9번출구에서도 열었다.


- 반응은 어떻던가


휴대폰 문화가 정말 심각하더라. 다들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는다. 지난번 천안에 갔을 때는 학생들이 유심히 보면서 서명하기도 하더라. 또 직장인이 많은 상암동 역시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느껴서인지 긍정적으로 반응해줬다.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박카스를 건네주셨다. 또 홍대에서 만난 한 학생은 큰 문제라고 공감하며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우리 수대로 비타민 8개를 놓고 가더라.


- 직접 현장에서 시민들을 만나보니 어떤가


무엇보다 학벌문제에서 안심할 수도 있는 인서울 등 소위 명문대 학생들이 문제의식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현재의 경쟁구조에서는 1등 외에 누구도 승자가 없다. 다들 앞 경쟁자에게 밀려난 것이다. 서울대조차도 그 안에서 경쟁하지 않나. 그러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내가 내 친구를 짓밟고 있는 구조인 것이다. 다 같이 인식을 바꿔서 나와 내 친구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자.


 사교육없는세상,“왜 서울대생은 취업도 잘 돼야 하나요?”



- 학벌이 우리 사회 곳곳에 쉽게 노출돼 있다


학원 같은 데 걸리는 대학 합격 현수막이 학벌문화를 조장하는 대표 사례다. 너무 천박하지 않나. 서울대라고 이름 써주고 지방대는 안 써주고. 서울대는 이름 다 써주면서 인서울은 누구 외 몇 명 이런 식이다. 실제 서울대 학생들을 만나보면 합격 당시에는 현수막이 자랑스러웠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학교에 와 보니 창피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서울대생도 지방대생도 모두 피해자로 만든다. 이름이 씌여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자랑스러울 수는 있지만 이건 이 학생의 인성을 망칠 수도 있다. 주변에서 서울대만으로 떠받들어주고 사방에 이름을 도배하는데 교만해지지 않을 방법이 있나.


- 또 다른 대표 사례가 바로 결혼정보업체다


서울대는 30점, 연고대는 20점 뭐 이런 식이다.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게 과연 누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나. 언론도 아무런 근거 없이 학교를 줄 세운다. 교육만큼은 양이 아닌 질적평가로 해야 한다.


- 학벌 말고 어떤 대안이 있나


물론 기업들도 탈스펙 움직임을 보이긴 한다. 하지만 아직은 정량평가가 수월하니까 쉽게 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학벌로 일정부분 거를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학벌이 직무수행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 하지만 고졸 및 지방대 채용에 대해서는 역차별 논란도 나온다


실제로 서명운동 할 때 지방대 우대 이야기를 하면 왔다가 공감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는 학생들도 있다. 현재 맨 위의 의사결정권자는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는 명문대가 아니다. 똑같은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면 무슨 좋은 답이 나오겠는가.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 역차별인가. 고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같은 직급이라도 대졸이 고졸보다 임금이 높다. 학벌로 차별하지 말자는 얘기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출신학교차별금지법’이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굉장히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동안 비슷한 운동들이 모두 실패했다. 이 생각이 이제 ‘된다’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움직이자.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