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독일 유학 중이던 김태근(한양대 파이낸스경영 4) 씨는 카페에 들어섰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카페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여행지의 분위기와 어우러진 그 모습은 유럽 감성의 향기를 물씬 품으며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참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그는 한국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꼴Q열전] 너도 비포선라이즈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김태근 씨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영화관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영화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언제나 선택은 지갑을 여는 자의 몫. 그는 아버지의 취향인 액션이나 스릴러 영화를 섭렵했고 그것이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김씨를 혼란에 빠뜨렸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마음 속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이상한 영화였다. ‘내 안에 소녀감성이 있었다니!’ 그때부터 그는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듯 비슷한 감성의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화려한 CG 대신 감성적인 화면 연출이 돋보이고, 120분 내내 관객을 흥분 시킬 순 없지만 생각할 여유를 주는 그런 영화. 그렇게 김씨는 다양성 영화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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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유럽 카페, 결과는 약물중독자 모임?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내면의 소녀감성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감성을 이해해주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친구들은 당구장이나 PC방에 가기 바빴다. ‘너는 공대왔으면 왕따 당했을 것’이라며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SNS에 글도 끄적여봤다. 하지만 다음 날 온전한 정신에 다시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삭제 버튼을 누르기 일쑤였다. 김씨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던 중 목격한 유럽 감성 터지는 영화 모임은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당장 소규모 영화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하야 ‘너도 비포선라이즈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이하 너비조아)’. 그의 소녀감성이 단번에 느껴지는 취향저격 작명이었다. 곧이어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samemovie)를 만들었고, 야심차게 광고를 띄워 모임 인원을 모집했다. 그렇게 지난 1월 ‘너비조아’의 첫 모임이 성사되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화관’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디든 영화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죠. 스크린이 있는 카페 여러 곳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매주 1~2회 정도 모임을 가져요. 누구든 페이스북에 신청 후 참석할 수 있죠. 매번 10명에서 20명 정도가 모이고 함께 영화를 본 뒤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사실 유럽의 카페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떠올리며 모임을 만든 것인데, 느낌은 조금 달라졌어요. 동그랗게 모여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얘기하다 보니 TV나 영화에서 보던 유럽의 약물중독자 모임(?)이 떠오르더라고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입니다.(웃음)”


너비조아에서는 서로의 나이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불필요한 과정 같아 생략했다.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더 활발한 이야기의 장이 펼쳐진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영화에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솔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낯선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아마도 너비조아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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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영화 선정은 김씨의 취향을 100% 반영한다. 첫 모임 때는 그를 다양성 영화의 세계로 인도한 ‘이터널 선샤인’을 상영했고, 이후 ‘퐁네프의 연인들’, ‘시네마천국’,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의 감성 충만한 영화를 상영했다. 영화에 따라 상영회 장소도 달라진다. 영화 ‘Her’의 경우 여성 관객들이 많은 만큼 혜화동의 아기자기한 플라워카페에서 상영회를 진행했고, 할렘가 이야기를 다룬 ‘굿윌헌팅’은 일부러 모임 장소를 어두컴컴한 문래동으로 선정했다.


너비조아를 찾는 사람들은 김태근 씨처럼 영화를 사랑하고, 또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이들이다. 의외로 그와 비슷한 소녀감성을 가진 남자 참가자들도 많다. 그는 “‘너비조아’ 페이지를 좋아하는 2800명 중 약 20%가 남자”라며 “만나면 통하는 이야기가 많아 한바탕 회포를 푼다”며 즐거워했다.


영화에 따라 그날 모임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도 그가 꼽은 너비조아의 매력 중 하나다. 페이스북에 상영 영화를 공지하고, 그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어떤 영화’를 상영하느냐에 따라 모이는 사람들의 성향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플립’을 상영한 날에는 수줍 열매를 먹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역대급 어색함을 자랑했어요.(웃음) 반대로 자유와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쇼생크탈출’을 상영한 날에는 안정적인 직업이지만 이직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왔죠. 청춘들의 자유로운 유희를 그린 영화 ‘몽상가들’을 본 날에는 뒷풀이가 아주 섹시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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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건비도 안 남지만 너비조아는 계속 된다

영화 한 편을 상영하기 위해 김씨는 바쁜 일주일을 보낸다. 영화에 맞는 카페도 섭외해야하고, 상영할 영화를 정한 뒤에는 배급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체 상영에 대한 협의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카페나 배급사 모두 너비조아의 순수한 취지에 공감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금액적인 부분을 배려해주고 있다.


그래도 1인 1만5000원의 참가비는 카페 대관료 및 영화 상영료로 쓰이고 나면 인건비조차 남지 않는 금액이다. 어찌 보면 씁쓸한 결과에도 그는 수익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닌 취미생활일 뿐이라며 위안을 삼는다. 다행히 최근에는 자발적으로 운영진을 맡겠다는 이들이 나타나 ‘삶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너비조아의 운영을 돕고 있다.


“수익도 없고 월급도 줄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있어 정말 감사하죠. 운영진들이 늘어나며 다양한 이벤트도 기획할 수 있게 됐어요. 남미축제에서 남미영화를 상영하는 단체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고, 상영관이 없어 아쉬웠던 한국의 독립영화,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이벤트도 계획 중이죠.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만큼, 나중에 제가 취업을 하게 되더라도 너비조아는 끝까지 운영하고 싶어요.”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허태혁 기자, 김태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