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 지하철 한양대역과 ‘애지문’이라 불리는 학교 정문(?)이 연결된 건 참 좋은데 딱 거기까지였다. 산을 깎아 만든 학교라 그런지 보이는 곳곳마다 경사가 예사롭지 않다. 다른 건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팔팔 계단(계단이 88개?)을 필수코스로 거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아침마다 뛰어올라갈 친구들이 상상되면서 멀쩡한 내 종아리가 다 시렸다.


오락가락한 요즘 날씨 중에 그 날은 유난히 더운 가을이었다. 가뜩이나 더운데 ‘학생식당 가려면 팔팔 계단 지나야 해요’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식당은 계단이 시작되는 건물 앞에 있었다.


나랑 학식 먹을래 9화. "6개월 노량진출퇴근 끝에 공무원 합격했어요"

l 한양대 ‘학생식당’ 오므라이스와 만둣국 (각 3,500원 3,000원)


학식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물었다.


“빨강머리? 취업 준비생 이라더니?”


“취업준비는 그만하려고요”


[ 6개월 노량진출퇴근 끝에 공무원 합격했어요 ]


더 레드 양은(*공무원 면접 보고 바로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단다. 입사 전까지는 고수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에게 굳이 표명한 의지의 한국인) 지난 6월 있었던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현재 발령 대기 상태다. 원래 집은 울산이지만 경기도 공무원 직에 합격해 앞으로는 경기도민으로 살아갈 운명에 처했다.


더 레드 양이 합격한 직군은 설치직군에 디자인 직렬로 생긴지 몇 년 안됐다. 전국에서 다 모여도 60명이 조금 넘는다. 선발 인원이 없는 해도 있다. 다행히 이번에는 한 자리 수준(3명)이지만 자리가 있어 지원할 수 있었다.


4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3명 중 1명이 된 더 레드 양의 살인적인 스터디 스케줄은 어땠을까.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헬스장에서 1시간 운동하고 밤 10시까지 ‘꼼짝 마’를 마음속으로 수 백 번 외치며 노량진 제 1의 공부머신을 자처했다.


워낙 소수 직렬이라 인터넷 강의도 없었는데 사실 이 점이 더 레드 양에게는 열심을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직접 문제와 풀이를 만들어가며 공부해야 했으니까. 이제는 그 노트가 최신판 교재가 된 거 아니냐고 했더니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나랑 학식 먹을래 9화. "6개월 노량진출퇴근 끝에 공무원 합격했어요"


매일 아침 버스에서 마주치는 노량진 고시생 중에 더 레드 양이 있었다니…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열심 정도가 아니라 살인적으로 공부했구나 알고 나니까 순간 경외심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 얼마나 걸렸어?


“올해 초부터 시작했으니까 딱 6개월 했어요”


[ 1년의 취업 실패, 벼랑 끝에 선택이었어요 ]


더 레드 양은 원래대로라면 올해 8월 졸업했어야 지만 내년 2월로 연기했다.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못한 게 아니라 채용시장에서 기 졸업자보다 재학생이 유리하다고 생각해 졸업을 유예한 것.


“취업준비를 했었어?”


취업을 위해 졸업을 유예했다는 말이 의외였다. 로맨틱유생군(3화 성균관대)만 해도 주변에서 회계사를 많이 준비하지만 본인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딱 잘랐다.


반대로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취업으로 돌아선 친구들은 종종 봐왔다. 더 레드 양처럼 취업준비하다가 공무원 준비를 해보자 마음먹은 건 내 주변에도, 생각 범주에도 없었던 터라 놀랐다.


2014년 2학기까지 취업이 목표였어요. 복수전공도 하고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영어점수도 만들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하고 ‘공격 개시!!’ 하는 마음으로 원서를 썼어요. 자소서는 대부분 붙더라고요. 근데 이상하게 면접은 줄줄이 다 떨어졌어요."


“너무 마구잡이로 지원한 게 아닐까? 전공 무관으로?”


“디자인 쪽으로만 넣었어요. 디자인을 하고 싶었으니까. 일반 취업과 디자인을 비교했을 때는 디자인이 낫다고 판단했거든요. 일반 회사나 디자인 회사나 둘 다 치열하고 둘 다 야근해야 되는데 일을 많이 할 거면 좋아하는 일을 하자 했는데. 다 떨어지고. 총 20곳 정도 썼어요. 정말 디자인 직군 나온 데는 다 썼어요."


“그럼 다 떨어지고 결심한 거야?”


“공무원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해가 바뀌어 올 초 울산 집에 내려갔는데 이모가 권유하시더라고요. ‘다 떨어졌는데 앞으로 살 길이 있냐며, 앞가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아직 스물다섯이니까 공무원 한 번 준비해보는 게 어떻겠냐’ 하시면서요.”


그렇게 이모의 권유로 시작해 6개월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합격한 더 레드 양. 도대체 학식타임은 왜 신청했을까?


‘공무원 준비 6개월이면 완성!’

대한민국 19만 고시생에게 용기를 주려고?

(*참고: 2015년 9급 국가직 공무원 공개 채용 시험 응시자 19만 987명, 인사혁신처)


‘채용은 100대 1, 공무원은 51대 1’

취업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공무원을 홍보하기 위해서?

(*참고: 2014년 금융권 채용 평균 경쟁률 100대 1, 9급 공무원 평균 51대 1)


진짜 마음을 들어봤다.


[ 더 레드 양의 속풀이 타임 ]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나간 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말이죠. 공무원 시험은 몇 월 며칠 정해져 있잖아요.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취업은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취업준비하면서 몸보다 정신이 많이 힘들었어요. 우울증 온 것처럼 요. 하루는 인터넷 하다가 우울증 체크하는 게 있어서 해봤는데 스윽 봐도 5개 더라고요. 한 번 해보세요.


우울증 테스트(다음의 증상 중 5가지 이상이 동일한 2주일 동안에 나타나면 우울증 일 수 있다.)

① 거의 하루 종일 슬프거나 공허한 마음이 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② 하루 종일 그 어떤 활동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스스로 or 타인이 보기에)

③ 식이 조절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체중 감소 또는 증가가 나타난다. (예: 1개월에 체중의 5% 이상 변화) 또는 거의 매일 식욕의 감소 또는 증가가 보인다.

④ 거의 매일 불면 또는 과수면

⑤ 거의 매일 정신운동 흥분 또는 지체 (단순히 안절부절못하거나 느려진다는 주관적 느낌뿐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도 관찰이 가능함)

⑥ 거의 매일 피로 또는 에너지 상실

⑦ 거의 매일 단순한 자기 비난이나 아픈데 대한 죄책이 아닌 무가치감 또는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책이 보임 (망상적일 수도 있음)

⑧ 거의 매일 사고와 집중력의 감소, 결정 곤란을 보임 (주관적 설명 또는 타인에 의해 관찰됨)

⑨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님), 구체적 계획이 없는 반복적인 자살 사고 또는 시도나 자살을 자행하려는 구체적 계획

(출처: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장애 진단 통계 편람(DSM-Ⅳ-TR))


저는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몸이 안 움직였어요. 진흙, 늪 속에 머리가 푹 잠겨서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거예요. 방구석에 들러붙어있어요. 그러다 진짜로 해야 될 때 학교를 가야 할 때. 그럴 때 뛰쳐나가는데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물론 취업 스트레스 때문이려니 하고 있었는데 저렇게 테스트해보고는 ‘나 혼자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가족 있는 울산으로 내려간 거예요.


저한테는 오히려 공무원 공부가 정신적으로도 차라리 도움이 됐어요. 정해진 시험일이 있어서 무기력할 틈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까요.


저 같은 분이 있다면 진단도 해보고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진짜' 지나가거든요.


기획·글 캠퍼스 잡앤조이 nyr486@hankyung.com

그림 BOXI(웹툰 '여대생의 정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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