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자 대학교. 오르막길이라 힘들었다. 오르막길 등산을 마치면 바다가 펼쳐져야 할 것처럼 더운 날씨였다. 더워서 다들 바다로 놀러 갔는지 학교에는 학생이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건물 입구에는 ‘숙대 스노우관 카페’라고 쓰여 있었다. 카페테리아처럼 생긴 고급진 학생식당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불닭그라탕과 치킨까스덮밥. 학생식당치고 꽤 비쌌다. 여대생의 입맛은 역시 쉽지 않구나. 심지어 신세계푸드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고급진 식당이 확실하군. 맛은 있겠군. 하면서 결제를 했다.


나랑 학식 먹을래 1화. "500일 만난 남자친구가 있어요."

l 숙대 스노우관 치킨까스덮밥과 불닭그라탕(각 4000원, 4500원)


학식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물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

내 앞에 앉은 스물넷 여대생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발견한 수많은 신기함 중 하나는 누굴 만나든, 몇 년 만에 만나든, 어떤 대화로 시작하든! 결국 대화의 끝은 항상 ‘현재 나의 최대 고민’ 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만나는 대학생들에게 처음 건넬 말로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를 택했다.


밥 먹는데 기왕이면 달달한 사랑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당황함에 의한 어색함도 잠시 잠깐이었다. 우리는 불닭그라탕에 있는 치즈가 눌러 붙도록, 치킨까스덮밥의 마요네즈가 밥알에 스민 것도 모른 채 이야기를 나눴다.


“전 사실 고민이 없는데..”

만난 지 500일. 순딩(*무슨 말만 하면 웃고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타입의 여대생이었기에)과 남자는 미팅으로 처음 알게 돼 4번 만나고 사귀기 시작했다. 남자는 순딩이 첫 연애 상대였고 순딩은 그 전에 2명 정도 더 만난 경험이 있었다. 남자가 첫 연애라는 말에 당연히 연애 초반에는 매일같이 만났을 줄 알았는데 일주일에 딱 2번 이상은 안 만난다고 했다.


그것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초지일관에 뚝심 있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남자친구구나 했다. ‘그래, 자주 안 만나야 오래 가는 거야.’ 하며 혼자 속으로 끄덕끄덕 하던 찰나에 고민을 꺼낸 순딩, “이제 일주일에 2번도 못 봐요”


“이미 학기는 다 마쳤어요”

순딩은 지금 2개월 째 인턴을 하고 있다. 정규직 전환 전제 인턴이 아니기 때문에 9월에 인턴이 끝나면 당장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에서 기 졸업자보다 졸예자(졸업예정자)를 선호한다는 말에 학교는 졸업을 유예한 상태다. 부산에서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오게 된 순딩은 현재 1호선 구로역 근처에서 자취 중이다. 학교인 숙대 근처는 대학가임에도 방 값이 비싸 구로역 근처에 둥지를 텄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이미 취업이 된 거나 다름 없어서…”

순딩의 남자친구도 고향은 지방이다. 순딩과 마찬가지로 대학 때문에 서울에 와서 하숙을 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순딩은 여대, 인문대. 남자친구는 공대라는 점이다. 지난 학기 순딩과 남자친구는 함께 취업준비를 했다. 순딩은 5곳 정도 원서를 썼는데 모두 떨어졌다.


반면 남자친구는 한 번에 척! 심지어 졸업도 한 학기 남은 상태였는데... 졸업 후에 바로 입사하는 게 아니라 합격한 회사에서 대학원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취업했다고 한다. 2년의 대학원 공부를 마친 후 입사가 보장된. ‘공대생은 회사에서 학비까지 지원해주는구나.’ 하면서 속으로 ‘좋다’ 생각하다가도 또 한편으로 문과 나온 입장에서는 마음이 짠했다.


나랑 학식 먹을래 1화. "500일 만난 남자친구가 있어요."

“이제 방 계약도 끝나고… 서울에 있을 이유가 딱히 없어요”

인턴기간이 끝나는 시기와 비슷하게 구로역 자취방 계약기간도 끝이 난다. 그렇게 되면 순딩은 이제 부산으로 내려가야 한다. 물론 취업은 서울로 생각하고 있다.


미디어 전공, 경영학 복수전공인 순딩은 전공을 살려 미디어 쪽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고 부산보다는 서울에 관련 일자리가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취업이 된 것도 아니고 현재 인턴마저 끝나버리면 단순 구직활동만을 위해서 서울에 있겠다고 하는 건 부모님에게 핑계거리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적성, 면접보러 매주 서울에 올 거예요.”

‘남자친구랑 이제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겠다’고 했더니 서류 붙으면 인적성 시험 치러, 면접 대상자 되면 면접 보러 매주 서울에 오겠다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순딩. 그래도 막상 내려갈 생각을 하면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숨겨뒀던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Dear. 순딩

‘고민을 고민이라고 생각 안 하는 능력’을 가진 긍정녀 순딩. 서울에서든 부산에서든 밝고 씩씩하게 구직활동 잘하길 바라.


학식을 다 먹었는데 이야기는 끝이 안 났다. 결국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야 대화를 끝맺을 수 있었다. 프롤로그에서 말했지만 해결방법은 나도 모른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금까지 보고 듣고 읽었던 것들을 조언 삼아 말해주긴 했지만. 대신 마지막으로 ‘속풀이 타임’을 줄 테니 두서 없어도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했다. 다음은 순딩양의 육성이 담긴 속풀이(음성파일 지원 안됨)를 글로 썼다. 속풀이 타임과 함께 첫 화도 끝.


‘순딩’양의 속풀이 타임

졸업, 취업이라는 현실이 닥치니 갑자기 모든 게 그 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달라졌다. 취업준비라는 게 이렇게 대책 없이 힘들 줄 몰랐다. 1학년 때부터 취업준비를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여대라 경쟁이 치열한 만큼 수업은 착실하게 들었다. 용돈은 벌어 써야겠다 싶어 아르바이트도 꾸준히 하며 4년 대학생활을 했다. 의미 없이 휴학한 적도 없고, 스펙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학점 4.0, 토익 900점 기본요건도 맞췄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토익스피킹, 컴퓨터 자격증, 이제는 ‘스펙초월’이라고 해서 이색경험도 필요하다. 취업스트레스가 쌓이면서 남자친구에게 힘들다고 말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처음에는 잘 받아주다가 결국 그게 계기가 되어 몇 번 싸우기도 했고 잠깐 헤어지기도 했다. 고작 3일 정도 헤어지긴 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계속 힘들다 힘들다 하는 건 서로에게 실례인 것 같다. 가끔씩 투정만 부려야지. 어쨌든 부산 가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서울로 컴백해야지. 잘 되겠지?


기획·글 캠퍼스 잡앤조이 nyr486@hankyung.com

그림 BOXI(웹툰 '여대생의 정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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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학식 먹을래. 프롤로그

나랑 학식 먹을래 2화. "공대생은 광고/마케팅 공모전 하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