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도 스펙이 돼 버린 세상

“이래도 부족하다굽쇼?”


취업을 위한 구직자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이제 구직자들은 영어시험, 학점관리 뿐 아니라 조금 더 차별화되고 특별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특별한 경험이 최종합격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탈스펙이 또다른 스펙을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고 이어 열심히 준비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신 두 지원자의 이야기와 전문가의 조언을 함께 들어본다.


① 이색 경험 요구하는 기업들, 이색 경험 없다는 취준생들

② 누구보다 열정 있는 그들은 왜 탈락했을까?



“다른 회사에도 적용 가능한 자소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지, 그래서 얼마나 우리 회사만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는지를 평가합니다.”


채용 시즌이 되면 인사담당자들은 늘 비슷한 말을 한다. 흔히 말하는 ‘복붙’은 탈락 1순위요, 반드시 ‘우리 회사’와 관련된 열정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언이다.


그래서 요즘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아르바이트나 인턴은 경험 축에도 못 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적어도 아프리카쯤은 횡단 해주고 매스컴에 이름 석 자 한번 실려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이제 ‘스펙 상향평준화’는 더 이상 영어성적이나 학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경험’이라는 정량적인 역량도 갈수록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경험도 인플레가 된 것이다.


몇 년 간 공들인 자소서, 결과는 서류탈락


취업준비생 이모씨는 올 상반기 CJ그룹의 신입공채에 지원했다가 인적성검사 전형에서 탈락했다. 결과 발표 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이씨는 여전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CJ는 꼭 입사하고 싶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입사준비를 했던 회사였기 때문이다.



[탈스펙 유행] ① 이색 경험 요구하는 기업들, 이색 경험 없다는 취준생들

고객에게 상품을 설명하고 있는 CJ CGV 미소지기. 사진제공=CJ


“7년 전, CJ CGV에서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비스업이 제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다니던 공대를 자퇴하고 서비스 경영학과에 새로 입학했죠. CJ의 인재상에 최대한 부합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어요. 서비스직 입사를 위해 교복판매부터 특급호텔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자소서에 쓸 트렌드 기획안을 위해 6천여 명의 시민으로부터 투자도 받았죠.”


하지만 이씨는 인적성검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오직 CJ CGV 입사만을 위해 전공을 바꾸고 관련 아르바이트만 골라 했지만 그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취업준비생 A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3년 전, 현대모비스의 상·하반기 공채 해외영업 직군에 지원했다 모두 서류전형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에게 현대모비스는 특별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4학년 1학기, 이 회사에 다니는 학교 선배에게 취업 조언을 구하면서 회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 길로 한 곳만 바라본 A씨는 모비스 공모전에서 2년 연속 입상을 했고 상금 전액으로 다시 모비스 기념품을 만들어 홍보 도구로 활용했다. 현장 조사를 위해 모비스의 해외 사업장도 찾아다녔다. 하지면 결과는 8번 연속 서류탈락이었다.


스펙 대신 '열정' 보여 달라는 기업들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최근 주요기업의 채용동향을 보면 이러한 특이한 경험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외치는 ‘스펙 대신 열정’에서의 열정은 곧 회사나 직무와 관련된 관심과 역량을 의미하는데 이는 다시 관련 경험으로 귀결된다.


이런 ‘경험 중심’ 채용을 위해 최근 몇 년 새 많은 기업이 이색 전형을 도입하고 있다. 자기PR이 대표적이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2012년부터 ‘자기PR’을 통해 5분간 직무관련 경험이나 관심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어필하는가에 따라 일부를 선정해 서류전형을 면제해주고 있다.



[탈스펙 유행] ① 이색 경험 요구하는 기업들, 이색 경험 없다는 취준생들

KT의 자기PR전형에 응시한 지원자. 사진제공=KT



이러한 오디션 형식의 자기PR 유행은 곧 기하급수적으로 번져나갔다. SK그룹은 2013년 ‘바이킹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PR면접을 도입했고 같은 해 KT도 ‘스타오디션’을 도입했다. 다음 해인 2014년에는 LG유플러스가 상반기부터 수도권 외 지역구 지원자를 대상으로 하는 발표면접인 ‘캠퍼스캐스팅’을 도입했다.


은행권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나왔다. IBK기업은행은 2014년부터 ‘4분 자기PR’을 운영하고 있다. 역시 자신만의 경험과 경험을 통해 배운 점들을 발표하는 자리다.


경험을 평가하는 시험은 자기PR만 있는 것은 아니다. LG생활건강은 올해 상반기 마케팅, 영업 공채서 ‘괴짜전형’을 도입하고 이색경험 보유자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 이색경험이란 ‘벤처사업, 세계일주, 도서출간, 철인3종 경기 등’이라고 명시했다.


KT는 스타오디션과 함께 직무관련 특이한 경험이나 역량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달인채용을 시행하고 있다. AK그룹도 열정캐스팅을 통해 차별화된 능력과 경험 보유자를 뽑는다.


탈스펙 채용, 구직자는 힘들다


하지만 구직자들은 기업이 요구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이 가중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구직자 지난 3월, 439명을 대상으로 ‘스펙 초월 채용으로 취업 부담감이 줄어들었는지 여부’를 조사한 결과 10명중 8명에 달하는 79.7%가 ‘오히려 늘어났다’고 답했다.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에서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주최로 열린 '스펙초월 채용 설명회'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스펙보다 사람을 봐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허문찬기자  sweat@  20140528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에서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주최로 열린 '스펙초월 채용 설명회'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스펙보다 사람을 봐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허문찬기자 sweat@ 20140528

지난 2014년 5월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에서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주최로 열린 '스펙초월 채용 설명회'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스펙보다 사람을 봐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사진제공=한경DB



또 같은 곳에서 지난 10월, 구직자 637명을 대상으로 ‘스펙초월 채용이 취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인 64.2%가 ‘불리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유로는 ‘기본 스펙 외에 준비할 게 더 늘어난 것 같아서’(49.9%, 복수응답)가 가장 많았다. 또 ‘돋보일만한 경험이나 역량이 없어서’(43.5%), ‘정확한 평가기준을 몰라서’(38.9%), ‘무엇을 위주로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29.8%) 등이 뒤를 이었다.


취업 준비 시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기업별로 다른 자격조건 갖추기’(60.8%, 복수응답)가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새로운 유형의 자기소개서 항목 작성’(42.2%),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 면접 준비’(41.4%), ‘난이도 높아진 인적성검사 유형 대비’(26.1%), ‘스토리텔링 소재 발굴’(23.5%) 등이 이어졌다. 응답자 중 78.2%는 전형 준비가 어려워서 입사지원 자체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기업의 요구와 취업준비생의 실제 입사준비활동 간에는 좁지 않은 간극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무조건 ‘탈스펙’ ‘스펙보다 열정’을 외치기보다는 채용전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안내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