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링 인터뷰] 통역사 출신 변호사 김희연

“남들보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거다”라는 말을 아는지? 개그맨 박명수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비틀어 웃음을 자아낸 명언 중 하나다. 김희연 변호사는 인터뷰가 끝날 즈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박명수의 어록에 한마디를 더 보탰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은 거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억대 연봉 통역사 그만두고 선택한 변호사, 그 이유는?






















김희연 변호사

1980년생

2014년~ 법무법인(유) 율촌

2014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석사 졸업

2006~2011년 국제회의 통역사

고려대 통번역대학원 강의

2006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2003년 아주대학교 영문과/국제통상학과 졸업



2014년 법무법인 율촌에 입사한 김희연 변호사는 서른여섯 살의 신입 2년차다. 요즘은 대학 때부터 로스쿨을 준비하는 학생이 많다보니 20대 중, 후반에 로펌에 입사하는 신입 변호사들이 많다. 동기나 후배들에 비해 그는 꽤 늦은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얻은 셈이다.


“이제 변호사 2년차이니 햇병아리 수준이죠. 지금은 IT 정보 보호나 HR 관련 업무를 주로 맡고 있어요. 언어에 강점이 있다 보니 외국인 고객을 상대하는 일도 많죠.”


사실 그는 4년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통역사였다. 국제회의장에서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통역하고, 전 세계를 누비며 수행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뛰어난 능력으로 업계에서 인정받던 그가 갑작스레 로스쿨 진학을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걱정과 스스로의 불안을 딛고 그는 통역사를 그만둔 지 3년 만에 변호사로 성공적인 커리어 체인지를 했다.


이과 출신 영문학도, 통역사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다


“학부 때는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사실 인문계 학생들이 졸업 후 뭘 해야 할지 많이 고민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국제통상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여러 진로를 생각해봤어요. 외환관리사 자격증도 따고 이것저것 많이 도전해봤죠. 그러다 졸업할 즈음에는 통역대학원으로 마음이 기울었어요. 일단 통역사가 되면 기본적으로 수입이 보장되었고, 해외에 자주 나가면서 훌륭한 사람들과 만날 기회도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졸업 후 통역대학원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뒤 국제회의 통역사로 활동했어요.”


한 번쯤 ‘통역’에 관심을 가져보았다면 통역대학원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을 터. 입학도, 졸업도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김희연 씨가 입학하던 때도 50명을 모집하는데 1300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26 대 1을 기록했을 정도. 졸업시험의 난이도도 높아 상위 30% 정도만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날고 기는 네이티브’들이 상당한 그 세계에서 김희연 씨는 당당히 입학시험을 통과했고, 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높은 학업수준을 자랑했다. 학부 전공이 영문학인 만큼 ‘원래 영어 실력이 출중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과였어요. 이과여서 영어를 뛰어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영문과 입학은 생각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IMF로 인해 유복했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어요.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죠. 결국 그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어요. 1년 후 다시 수능을 봤는데, 아주대 영문과에 장학금과 생활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영문과에 입학하게 된 거죠.”


알파벳을 중학교 입학 후 처음 배우고, 이과생으로 영어와 그리 친하지 않았던 그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영문학과에 진학해 ‘멘붕’에 빠지게 됐다. 어떤 진로를 정해야 하는지 막막해 복수전공도 해보고 각종 자격증도 취득하며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기 위해 방황했다. 그러다 영문학과 학생들이 많이 희망하는 ‘통역사’라는 직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통역대학원에 진학할 때 교포나 유학생, 조기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넘쳐나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 영어도 영문학과에 입학한 후에야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으니까요. 매일 외국 잡지를 끼고 살고,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해외 채널만 봤죠. 통역 연습 파트너를 바꿔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했고요. 그렇게 했더니 1년 만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노력의 승리였다. 그는 꿈에 그리던 통역대학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프리랜서로 통역 업무를 맡았다. 뛰어난 영업능력과 실력으로 금세 많은 클라이언트로부터 인정받은 그는 통역사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부스에 앉아 회의를 통역하기보다 전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수행통역이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한번은 모 기업 회장님을 따라 아프리카의 한 자원부국 대통령을 비밀리에 접견하러 간 적이 있어요.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여서 가는 곳마다 무장군인이 동행했죠. 몇 시에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마냥 호텔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 저를 군용차에 태우더라고요. 그러더니 눈을 가리고 총을 겨눈 채 대통령궁으로 데려갔어요. 기관총 앞에 서 있자니 정신이 아득했죠.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을 접견했을 때는 환대도 받고 협상도 잘 마치고 나왔지만, 호텔로 돌아와서도 손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덕분에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남들이 타보지 못한 다양한 교통수단을 많이 경험했다. “자동차, 비행기, 기차는 흔하지만 헬리콥터나 개인 전용 비행기, LNG 가스선 등을 모두 타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웃었다.


억대 연봉 통역사 그만두고 선택한 변호사, 그 이유는?


늦깎이 로스쿨생, “‘민법총칙’ 저자가 누구예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가 통역사에서 변호사로 전직한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실력으로 인정받던 통역사를 그만두고 굳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법률 공부를 시작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일하면서 통역사로서 한계를 느꼈어요. 서울 지하철 9호선 입찰 관련 컨소시엄 통역을 맡은 적이 있었죠. 지하철회사, 차량제조사, 토목건설회사, 은행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죠. 그런데 각 회사의 전문가들은 오래 일해 온 자신의 분야는 잘 알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할 때가 많아요.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솔루션이 보일 때가 있지만 직업윤리상 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죠. 통역사의 직업윤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거든요.(웃음) 또 오늘은 건설, 내일은 가스, 이런 식으로 매일 전문분야가 바뀌다보니 다양한 분야를 접할 수는 있지만 한 분야의 지식도 제대로 쌓이지 않는다는 아쉬움도 있었고요.”


그는 통역을 하며 많이 접했던 법무법인 일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됐다. 영어 실력을 살려 미국 로스쿨 진학을 준비했는데, 국내에도 로스쿨이 생긴다는 소식에 바로 진학을 결심하게 됐다.

국내 로스쿨은 학점, LEET(법학적성시험), 외국어능력이 기본 조건으로 요구된다.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니 학점이야 큰 문제가 없었고, 통역을 했던 만큼 외국어능력도 갖춰져 있었다. 문제는 LEET였다. 단기간에 점수를 올릴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보니 기본 실력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다. 입학 동기 중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지만 말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하나 낳은 후 로스쿨에 입학했으니 남들보다 많이 늦은 편이었죠. 게다가 입학하고 보니 법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절반 이상이더라고요. 저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입학 전 지인이 ‘민법총칙’을 미리 보면 좋다고 했는데, 그게 우리나라 민법 중 앞부분에 있는 법령이거든요. 저는 그게 책 이름인 줄 알고 ‘저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정도예요.”(웃음)


나이도 어린 데다 이미 4년을 공부하고 온 동기들 사이에서 처음 보는 용어와 싸움하며 수업을 따라가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늘 여기저기 빨간 펜 투성이가 되는 시험지를 받는 것도 자신감을 하락시켰다.


그래도 그는 “다행히 못하는 와중에도 공부가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입학 후 첫 학기에는 수업이 재미있어 눈물까지 흘렸을 정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매 수업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지하철에서 교과서를 보느라 내릴 곳을 지나치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2학년 1학기 때는 수석을 할 정도로 높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즐거운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대형 로펌에서는 인재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대부분 로스쿨 1, 2학년 때 채용을 진행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학점.


그렇다보니 학생들의 학점경쟁이 치열해 늘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김희연 씨는 결혼 후 로스쿨에 입학해 2학년 때는 임신까지 한 상태로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결코 뒤처지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원하던 로펌에 인턴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인턴 합격 후에는 2주간 로펌에서 과제를 진행한다.


“생 기록을 주고 소장을 써보라는 과제를 받아요. 몇 십 명의 인턴이 모여 쉬지 않고 과제를 진행하죠. 저녁때는 식사 겸 술자리로도 이어져요. 변호사는 팀으로 함께 일할 때가 많다보니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는 과정이죠. 그렇게 2주간의 평가가 끝나면 마지막 면접을 통해 합격자를 선발해요.”


만삭의 몸으로 인턴 과제를 수행하고, 출산 후에는 모유 수유를 하면서 시험공부를 했다. 그의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결국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원하던 로펌의 변호사로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억대 연봉 통역사 그만두고 선택한 변호사, 그 이유는?


'갑질'하는 변호사? NO! 살아남기도 버거워


변호사 2만 명 시대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제 예전같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갑질’하는 변호사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도 ‘고객을 보살피는 마음가짐’이 변호사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라고 강조했다.


“변호사도 서비스업 중 하나예요. 서비스업은 고객이 원하는 것에 맞춰 해야 하잖아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해요. 변호사업계는 변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변호사자격증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죠. 실제로 현업 변호사들도 수입 격차가 크고요. 그래서 ‘변호사가 되면 좋은 대우를 받겠지’ 하는 허상을 꿈꾸는 친구들을 보면 좀 안타까워요. 끊임없는 경쟁의 시대예요. 자신의 전문분야를 특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죠.”


인터뷰가 끝난 뒤, 그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인터뷰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메일에 빼곡히 적어 보냈다. 대학생 독자들을 위한 응원의 한마디였다.


“<캠퍼스 잡앤조이> 독자 중에는 아직 진로를 정확히 정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을 거예요. 시간은 흐르는데 남들은 다 잘나가는 것 같으니 마음이 불안할 수 있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한 우물을 판 친구들은 저만치 앞서있는데, 이제 변호사생활을 시작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으니 한참 어린 친구들에 비해 시간적으로 많이 뒤처진 게 사실이죠. 그런데 늦게 시작한다고 그동안 보낸 시간이 모두 허송세월인 건 아니에요. ‘내공’이라는 게 쌓여있거든요. 다양한 경험을 한 만큼 더 풍요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요. 도중에 진로를 바꾸었다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걱정할 시간에 뭔가 행동하세요. Carry on smiling, and the world will smile with you. 결국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죠.”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