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개척하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면 개척한 길을 단단히 다지는 것은 ‘위대한 도약’이다.

너도나도 ‘스토리’를 외치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학생들에게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며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유명해질 테니 사인을 받아놓으라”며 농담을 던진 최시한 교수도 위대한 도약자 중 한 명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가로, 또 국문학자로 글쓰기에 오롯이 시간을 바쳐온 최 교수의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묵직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최시한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경건하게 삶을 대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보일 것”


1952년생

서강대 문학박사

1982년 <낙타의 겨울>로 등단

1984년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2000년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2004년 숙명여자대학교 의사소통능력개발센터장


저서

낙타의 겨율(문학과지성사, 1991)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외(두산잡지BU, 1995)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문학과지성사, 1996)

수필로 배우는 글읽기(문학과지성사, 2001)

소설의 해석과 교육(문학과지성사, 2005)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문학과지성사, 2010)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문학과지성사, 2015)






최근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펴냈다. 소설이 아닌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실용서를 출간한 이유가 있나?

주 전공분야인 ‘현대소설론’, 이론적으로 보면 ‘서사학’이 시대의 요구에 잘 맞아떨어졌다. 보통 ‘서사’라고 하면 ‘소설’만으로 한정짓는 경우가 많은데, 서사는 ‘이야기’를 다루는 분야다. 디지털 혁명을 계기로 글쓰기 중에서도 실용적 글쓰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짙어졌고, 그 수단으로 서사학이 중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즉,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콘텐츠, 문화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콘텐츠가 바로 ‘이야기’인데, 막상 스토리텔링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고 10년간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책을 냈다. 덕분에 매번 인쇄물로 대신해야 했던 수업에서 교재를 사용하게 돼 기쁘다.



최근 취업과 관련해 ‘스토리’가 떠오르며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스토리텔링이 최근에 등장한 개념은 아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스토리텔러였으니 말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가 주목받은 시기는 내가 수업을 시작했던 2000년인데, 스토리가 문화산업의 중요한 도구로 여겨지면서부터다. 이후 이화여대 디지털스토리텔링학과,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등 많은 곳에서 스토리텔링에 대해 연구해왔다.

아쉬운 점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나 인재 양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부족함을 느낀다. 또한, 스토리텔링에는 허구적 분야와 비허구적 분야가 있는데, 현재 화제가 되는 스토리텔링은 비즈니스, 즉 비허구적 분야에 쏠리는 경향이다. 심지어 스토리텔러 자격증을 주는 곳도 있을 정도로 무분별하게 팽창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연구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개념이 흐트러지고 잘못된 지식이 사실인 양 퍼져 혼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은 정확히 무엇인가?

관련 책의 대부분이 ‘스토리텔링’을 ‘스토리’를 ‘텔링’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정의 내린다. 그래서 ‘스토리텔링 마케팅’ ‘수학스토리텔링’ 같은 모호한 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의 ‘스토리’는 단순히 이야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떠한 큰 이야기 기둥이 있고, 그 위에 의미와 다양한 전달방법이 더해질 때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예를 들면, 연극이나 희곡은 모두 이야기에 속하지만 연극은 문학이 아니고, 희곡은 문학이다. 왜 그럴까? 희곡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언어’라서 그렇다.

어떤 ‘매체’를 가지고 ‘사건’을 서술하면 스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특정한 사건을 연쇄시킬 때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똑같은 스토리라도 서술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콘텐츠로 탄생할 수 있다. 스토리와 매체, 서술 등 층위를 구별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의 개념을 잡는 데 매우 중요하다.



기업에서 인재 평가 수단 중 하나로 ‘에세이’를 택하는 추세다. 글쓰기 능력이 새로운 ‘스펙’으로 떠올랐는데, 앞으로도 글쓰기가 중요한 역량이 될까?

많은 이들이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면 종이책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활동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우리는 과거보다 현재 더 많은 글을 쓴다. 디지털 시대에는 무엇이든 입력해야 하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글쓰기 능력은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에서 에세이를 쓰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지원자의 에세이를 ‘누가 평가하느냐’다. 예를 들어 입학사정관제도의 경우 제도 자체는 좋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입학사정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같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좋은 제도라고 하면 따라가기에 급급할 뿐 내실을 갖추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창의력을 배운 적도, 가르친 적도 없는 이가 창의적 인재를 채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토리텔링을 왜 못해요?”라고 묻는 학생에게 “느끼지 못해서다.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 말고 자신의 느낌을 적으라고 하면 “잘 못 느끼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답은 ‘알지 못해서’다. 알아야 느낀다.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워야 가능한 일이다. 많이 읽고 써야 한다.



최시한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경건하게 삶을 대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보일 것”

<소설의 해석과 교육> 등의 책에서 국내 국어 교육에 대해 수차례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은 실질적으로 감수성이나 사고력을 길러주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보니 문화적 능력, 창의력을 중요시하는 문화산업시대에 적절한 일들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는 현재 내 세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 탓에 우리말로 사고력이나 감수성? 상상력을 계발하는 교육 노하우가 부족해서다. 한국사람이 순수 한글로 공부한 역사가 오래되지 않다 보니 체계적 교육 시스템이 부실한 것이다. 떠올려보자. 우리는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문학작품에 줄을 긋고 내포된 의미를 적기에 바빴다. ‘쓰기’나 ‘읽기’보다 ‘받아적기’와 ‘외우기’를 했다. 단 한 번도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논술시험을 보고, 사회에서는 창의적 인재를 원하니 아이러니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대학 진학 전부터 문학에 관심이 워낙 많아 고등학교 때부터 늘 국문과를 목표로 뒀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대표를 하기도 했고, 틈나는 대로 읽고 썼다. 정말 좋아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연극을 했다. 배우도, 연출도 했다. 소설을 읽으며 연극?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으니까. 대학도 서강대가 연극동아리로 유명해 선택했을 정도다. 하지만 연극 하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겠더라. 시골에서 농사지어 학비를 보내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학업에 열중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술도 잘 못해 적응이 힘들었다. 그래서 교직을 이수하고 교사를 하게 됐다.



1991년 첫 소설 <낙타의 겨울>을 낸 뒤 ‘제2의 직업’으로 교수를 택했다

소설가가 되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신춘문예에서 계속 떨어졌고, 결국 석·박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됐다. 당시에는 졸업정원제 시행으로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어서 박사 과정 중에 교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운이 좋았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는 서울 영일고등학교에서 3년간 국어교사로 재직했는데,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국어교육에 대해 문제를 느꼈다. 이후 제대로 된 국어교육을 하고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소설가와 교수로서의 삶은 어떤가?

교수를 하며 낸 소설집이 두 권 정도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자원이 고갈되게 마련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몰두해 소설 쓰기를 게을리 한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그러더라. 작품 쓰는 뇌와 연구하는 뇌는 다르다고. 연구자로서 매진하다 보니 작품 쓰는 뇌가 작아진 느낌이다. 정년이 3년 정도 남았는데, 이제는 기행문이나 소설을 쓰고 싶다.


최시한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경건하게 삶을 대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보일 것”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같은 실용서와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포함한 소설까지 수많은 작품을 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이번에 출간한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애정이 크다. 지금까지 국문학도로서 관심을 두고 연구한 분야이기도 하고, 후배들과 소통하고 학생들과 수업한 내용이 모두 들어있어서이기도 하다. 개론서의 특성상 모든 에너지를 쏟아 만들었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현재를 사는 청년들을 보며 느끼는 점은?

자기 삶에 경건하지 않다. 자신의 미래를 직업 중심으로 생각하는 청년들이 대부분이다. 남의 시선, 현재의 쾌락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 눈에 멋져 보이는 것을 하려 하는 것이다. 한 번 사는 인생이고,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육성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저런 사람은 되지 않겠다’ ‘나는 저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것을 추구하는 경건함이 필요하다. 연봉을 많이 받는 것, 대기업에 다니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왜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채용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삶인가? 자신을 스스로 자본주의의 도구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2015년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내가 고민하는 것은 남들도 고민했던 일이다. 그러니 답은 도서관에 가서 찾으면 된다. 도서관에는 모든 답이 있다. 여기저기 끌려 다니지 말고 도서관에서 지혜를 찾아라. 이렇게 말하면 학생들은 인터넷을 검색할 뿐이다. 인터넷은 정보가 무분별하게 나열돼있어 도움될 것이 없다. 도서관에서 해결책을 찾으며 얻는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또한, 읽고 쓰는 능력을 키우기 바란다.



소설가 최시한을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가 많다. 앞으로의 계획은?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 소설 쓰는 일이었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소설 쓰는 일에 게을렀지만, 이제는 소설을 쓰고 싶다. 고향에 내려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싶기도 하고.










글 김은진 기자

사진 김기남 기자











온라인에디터 jobnj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