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만큼의 ‘훈남’이었다.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연극영화과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납득이 됐다. 최근 ‘증권가의 장그래’라고 불리며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새삼 주목 받고 있는 차진혁(32) 삼성증권 주임의 이야기다. 드라마 속 장그래가 현실에도 존재했다. 차 주임은 10세 때 바둑을 시작한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다.
윤태호 작가가 웹툰 미생을 준비할 때 자료조사를 위해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본인과 닮은 주인공이라니 분명 흥미를 느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웹툰이 연재될 때 신기한 마음에 챙겨봤다”는 답이 돌아왔다. 차 주임과 장그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낙하산이 아니라 정식 채용으로 당당히 입사했다는 것이다.
윤태호 작가가 여러차례 연락해와...
인터뷰를 하기 전부터 왠지 바둑을 두는 사람은 과묵하고 진중할 것 같다는 인식이 있었다. 아마 바둑 자체가 정적이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몇 수 뒤를 읽어야 하는 머리싸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그래 역시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유형이다. 차 주임의 첫 인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이미지에 대해 그는 흔쾌히 “맞는 것 같다”고 긍정했다. “오히려 기원에서 나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이 많아진 것”이라며 “바둑 둘 때는 하루 16시간 동안 열 마디도 채 안 하며 지내기 때문”이라고 말을 이었다.
드라마 미생을 봤느냐는 질문에 차 주임은 “두어 편 정도”라고 답했다. 의아했다. 이에 “직장생활의 힘든 부분과 바둑을 관둔 사람의 힘든 부분이 모두 여실히 드러나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몰입돼 오래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고 웃으며 털어놨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 속의 장그래’로서 차 주임의 노력과 고생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드라마 미생에서 바둑연구생 시절의 장그래는 새벽별을 보며 기원에 갔다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햇빛 한 번 제대로 쬐지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차 주임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오전 7시 반에 가서 오후 10시 반에 나왔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겪는 야간자율학습 같은 생활을 초등학생 때부터 감당한 것이다. 집에서 공부한 시간까지 포함해 총 16시간을 오로지 바둑에만 쏟았다.
열일곱살때 바둑접고, 검정고시로 중ㆍ고등학교 PASS!
중학교 대신 바둑도장을 다니며 프로바둑기사를 꿈꿨던 차 주임은 그러나 17세 때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유는 재능의 한계였다. 전국대회 우승 등 다양한 입상경력을 자랑하며 소위 ‘상위 클래스’에 속했지만 “나보다 잘 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차 주임이 한국기원에서 어울렸던 아이들은 현재 이세돌, 최철한, 박정환 등 대부분 타이틀홀더가 되거나 세계 챔피언에 오른 실력자들이었다.
둘째 이유는 나이였다. 현재는 20대 전후에도 입단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중학교 2학년 때 입단하는 것이 일류기사의 모범 사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고등학교 1학년 전후에 입단하지 못하면 일류가 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차 주임의 결단을 부추겼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꿈을 접어야 했던 장그래와 달리, 차 주임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다.
‘증권가의 장그래’로 불리며 주목
이후 차 주임은 중·고등학교를 모두 검정고시로 통과했다. 학교 대신 기원에 다녔던 차 주임이었기에 학과 공부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러나 바둑연구생 시절 몸에 익힌 참을성이 그를 도왔다. “바둑을 둘 때 길게는 6시간씩 앉아있었다”며 “책상에 오래 붙어있는 것은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였다”고 당시 비결을 이야기했다.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밖에 구별할줄 알았던 영어실력
검정고시는 한 번에 통과했지만 수능은 어려운 관문이었다. 차 주임은 “알파벳 소문자와 대문자를 구별하는 법 정도만 익힌 상태에서 외국어 영역은 결코 간단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말했다. 대국할 때 발휘했던 끈기와 집중력을 총동원한 결과, 1년 반 만에 대학 입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차 주임은 검정고시를 통과하기까지 장그래와 같은 경로를 걸었지만, 고졸에서 멈추지 않고 도전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다. CF감독인 아버지와 연극배우 출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선택이었다. 이때 배운 시나리오 쓰는 법은 삼성증권에서 상품에 대해 고객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설명할 때 유용하게 적용됐다. 또 특정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세상이 흘러가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
“숫자에 좀 약하다”고 고백한 차 주임은 “게다가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듯 설명을 한다고 해도 고객에게 잘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며 자신의 전공을 어떻게 증권업에서 활용하는지 설명했다. “수치를 설명하는 대신 고객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최근 이슈나 중요한 아이템(상품) 등과 연관시켜 설명합니다. 시나리오를 통해 배운 스토리텔링 능력이 저의 주요 무기인 셈이죠. 특히 증권업은 일상과 밀접하기 때문에 어떻게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차 주임은 자신이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리더십, 사회성이 부족할 것 같다는 편견이 생길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복무했다. 이때 증권사에 입사하겠다고 마음먹고 구체적으로 목표를 정했다.
드라마 장그래(임시완)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무역상사”인 원인터내셔널에 입사한다. 검정고시 고졸출신, 제2외국어는 물론이고 영어실력도 형편없는 ‘무스펙’으로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는다. 현실의 차 주임은 이름만 대면 모두 아는 삼성증권에 입사했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모두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소위 ‘SKY’라고 불리는 최상위권 대학 출신도 아니다. 심지어 전공도 증권업과 전혀 무관한 연극영화과다. 금융 자격증도 소지하지 않았다. 차 주임의 고초 역시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면접에서 의지와 성실함을 높게 평가받아 합격한 차 주임이었지만, 입사 후에도 고군분투는 끝나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왔을 때 무역용어를 알아듣지 못하던 미생의 장그래처럼 증권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차 주임은“경제·경영을 전공한 적이 없었고 따로 용어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장백기’같이 스펙 빵빵한 입사동기들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미생의 장백기처럼 스펙이 매우 빵빵한 동기들이 즐비했다. 차 주임은 “함께 입사한 동기 중에 미국 하버드대 출신부터 국내 최상위권 대학 출신들, 경영·경제학을 전공하고 금융 자격증까지 모두 갖춘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기업 입사 스펙의 정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제부터 그들과 경쟁해야 했다.
“나의 노력은 질과 양이 (남들과) 다르다”고 외쳤던 장그래처럼 차 주임 역시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주말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받고 매일 밤 9~10시까지 회사에 남아 공부했다. 콤플렉스처럼 작용했던 금융 관련 자격증도 입사 후에 땄다. “항상 무거울 정도로 두툼한 자료를 들고 다니며 집에서도 공부했죠. 그렇게 2년을 하니 조금씩 증권업이 몸에 익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노력은 실제로 꽃을 피웠고, 차 주임은 회사에서 좋은 성과를 낸 주니어 직원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영 마스터 클럽(Young Master Club)’에 선정됐다. 또 주식 분야에 뛰어난 프라이빗 뱅커(PB)를 지점별로 두세 명씩 뽑는 제도인 ‘스타 PB’로도 선정됐으며 2014년 2~4분기에는 사내 평가 기준을 거쳐 1위 PB로 뽑히기도 했다. 비전공자가 1위를 차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란 말 실감
드라마 미생에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인 오상식 차장의 명언 중 하나는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였다. 차 주임 역시 “회사 생활에 적응할수록 중요한 것은 인내와 끈기였다”고 손에 꼽았다. “증권업에서 필요한 사람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의지가 강하고 끈기가 강한 사람입니다.
결국 누가 더 성실한가, 누가 더 인내심을 갖는가, 누가 더 자신의 ‘멘탈’을 잘 관리하는가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죠.”
왜 하필 증권업이었을까. 차 주임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둑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다. 본인의 노력과 실력으로 바둑을 두면 그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연극·영화 분야도 두 시간의 쇼를 만들어 1만 명을 즐겁게 하면 2만 시간, 즉 본인이 준비한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차 주임은 “증권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며 “내가 노력하면 실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바둑과 증권업. 얼핏 보면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미생이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둑과 무역이라는 연관 없어 보이는 두 분야를 절묘하게 접목했기 때문이다. 무역회사에 점점 적응해 가면서 장그래는 바둑을 통해 익힌 지식과 습관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과연 현실에서도 이러한 접목이 가능한 것일까.
답은 “그렇다”였다. 삼성증권 내에서 차 주임은 종목을 분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선후배를 대상으로 특강을 하기도 한다. 비결은 “복기(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보는 것)가 습관화 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 주임은 기원에 다닐 때처럼 회사에서 일할 때도 하루의 장을 마치면서 그날의 잘못한 점, 잘했던 점을 꼭 생각한다. “제가 산 종목이 떨어졌을 때 왜 떨어졌는지 분석하고,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 앞의 수를 복기하면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차 주임이 언급한 복기는 미생의 장그래가 유령회사를 통해 돈을 횡령하던 박종식 과장의 비리를 찾아내는 에피소드에서 활용했던 개념이다. 바둑을 잘 모르는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차 주임의 말에 따르면 “복기할 때 바둑판 위를 몇 개의 구간으로 나눠놓고 각각의 변화도를 외워 전체적으로 퍼즐조각을 완성시키듯 합친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몇 백 수를 두어도 자연스럽게 외울 수 있는 것이다. 차 주임은 “복기를 습관화해 실제로 남들보다 차트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고 귀띔했다. 또 “증권업계의 차트가 바둑판과 유사하게 느껴진다”며 “그 덕분에 감각적으로 지금 갈 자리인지, 갈 자리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바둑과 증권업의 연관성은 복기뿐만이 아니다. 바둑의 기본 메커니즘은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상대가 못 두게 만드는 것”이라고 차 주임은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바둑은 두는 사람이 묘수를 생각해 내야 이긴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정 수준 이상의 바둑을 둘 수 있다면 상대의 수를 막는 것이 승리의 원칙이다. “진정한 고수는 상대에게 괴롭힘을 줘서 원하는 대로 둘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우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며 “주식도 이와 통하는 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진짜 고수’는 어떤 분야든 통하게 돼 있는 듯했다.
차 주임은 “누적된 공부량과 준비성도 바둑과 증권업의 공통점 중 하나”라고 했다. 그 뜻을 묻자 “3시간의 바둑을 두기 위해 100시간 이상의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규 주식시장이 열리는 건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다. 그러나 노력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 “주식시장이 열리는 시간 이상의 노력을 해야 고객들에게 더 전문적이고 신뢰할 수 있을만한 투자 제안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바둑 복기를 하듯 차트 외워
실제로 차 주임을 따라 어릴 때부터 배우던 바둑을 그만두고 증권업계로 넘어온 사람들도 여럿 있다. 얼마 전 K증권에 입사한 S 씨와 H증권에 입사한 W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처럼 차 주임 같은 프로 PB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그는 “성실성”을 강조했다. 쉽게 말해 “남보다 더”가 핵심이었다.
“남보다 더 많이 준비하고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면서 공부하고, 고객에게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소통하고 편지 보내는 사람이 성공한다”며 “물론 머리도 좋고 일도 잘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자신을 낮추고 성실하게 일하는 꾸준함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다”라고 답했다.
차 주임은 매일 오전 5시 10분에 일어나 6시 30분까지 출근한다. 회사에서 더 천천히 오라고 할 정도다. 주말에도 종종 혼자 회사에 나와 흐름을 살피고 공부에 매진한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공부할 준비가 돼 있는지, 평생 동안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준비된 자는 아무도 없지만, 앞으로 계속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앞으로 꾸준히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그동안 변화무쌍한 길을 걸어온 차 주임은 어떤 미래를 보고 있을까.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는 말을 품은 채 살고 있어요. 내가 이 증권사에 왜 왔는지 늘 생각합니다. 단순히 ‘대한민국 1등’을 꿈꾸는 것은 의미도 없고, 마치 찰나의 순간과 같은 것이에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저와 제 주변 사람들, 제 고객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PB이자 금융인이 되고 싶습니다.”
차진혁 주임 약력
- 1984년생
- 2001년 검정고시 합격
- 2009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 2011년 ROTC 전역
- 2012년 삼성증권 주임(현)
이시경 인턴기자 cky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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