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수십 번 좌절 끝에 ‘무산일기’로 주목

탈북자가 자본주의 무게에 눌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독립영화 ‘무산일기’. 부산, 네덜란드, 폴란드, 샌프란시스코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9개의 트로피(5월 17일 현재)를 받으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산일기’는 박정범(35) 감독·주연인 영화다. 각본을 쓰고 제작도 맡았다. 연세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체육 교사를 꿈꾸던 그는 2000년 단편 ‘사경’으로 연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무산일기’는 첫 장편 데뷔작이자 동국대 영상대학원 졸업 작품. 실존 인물이자 그의 친구인 ‘승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특강을 위해 고려대를 방문한 그를 신록이 짙어가는 교정에서 만났다. “친구의 마음을 직접 영화에 담아내고 싶어 연기를 자청했다”는 박 감독은 영화 속 ‘승철’의 수더분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날 기자는 ‘무산일기’라는 영화에 한 번, ‘박정범’이라는 사람에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다.
[인터뷰] 영화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체육교육을 전공하다 어떻게 영화에 입문하게 됐나요?

군대에 있을 때 주말마다 부대 밖으로 나가 야한 비디오를 빌려와야 했어요. 어느 날 비디오를 빌리러 갔는데 마침 옆에 헌병대가 있는 거예요. 눈치를 보다 아무 생각 없이 집어든 게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였어요.

선임에게 엄청 두들겨 맞고, 혼자 그 영화를 다섯 번 보다가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대 후 복학을 하니 마침 ‘영화제작실습’이라는 수업과 교내 영화제가 처음 생긴 거예요.

수업에서 만든 영화가 대상을 탔죠. 교수님들이 다시 제대로 만들어보라고 해서 다시 손을 본 다음 한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또 상을 탔어요. ‘아, 내가 소질이 있나보다’ 하고 영화를 시작했죠.

7년 동안 40편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상은커녕 매번 좌절했죠. 그때마다 술을 마시면서 ‘그래도 나 상 탔었어’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동국대 영상대학원에 가서도 3학기 동안 8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7편이 망하고 8번째 영화 ‘125 전승철’이 주목을 받았어요. 그 후 조감독으로 이창동 감독과 일하게 됐죠.

직접 주연을 한 이유가 있나요?

[인터뷰] 영화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대학원에 다니며 바쁘게 지낼 때 승철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승철이는 대학에서 만난 친구예요. 북한에서 아이스하키 선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체육을 전공했죠.

탈북자라는 이유로 상처를 많이 받다 보니 마음의 문을 닫기도 했던 친구예요.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커서 그 친구의 마음이 되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연기에 대한 부담은 없었어요. 졸업 작품으로 준비한 거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이니까 ‘액션’을 외치고, 연기하고 잠시 있다가 ‘컷’을 외치는 모습에 처음에는 스태프들이 빵 터져서 NG가 많이 나기도 했죠.

탈북자들을 대변하고 싶었나요?

탈북자 전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없어요.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나온 사람들은 여기서도 그럭저럭 잘 살아요. 하지만 정말 배고파서 넘어온 사람들은 할 것이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실 전 세계 어디에나 있지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잘 보지 않고 얘기를 듣기도 싫어하죠. 사회·정치적 비판 의도는 없었어요. 친구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든 겁니다.

내로라하는 국제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을 했는데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목을 끈 것 같아요. 해외에선 이 영화를 유럽, 미국의 이주자 문제와 연관 짓기도 해요. 어느 사회에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공감을 일으킨 것 같아요. 한 미국 관객은 “홈리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고 하더군요.

차기작 계획은 섰나요?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을 모아서 이번 겨울에 1억짜리 영화를 하나 찍으려고 해요. ‘산다’라는 제목인데 주변에서 시나리오가 별로 재미없다고 해서 열심히 고치고 있어요. 이 영화 역시 친구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또 직접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주인공이 박정범이에요. 딱 ‘산다’까지만 하고 다시는 배우 안 할 거예요.
[인터뷰] 영화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독립영화의 매력은 뭘까요?

독립영화라서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예산이 적다 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고통과 희열이 매력 아닐까 싶어요. 독립영화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해야 하고 기존 영화에 없던 것을 보여줘야 해요. 재기발랄함, 신선함,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이 있지요.

영화 같은 예술 전공 학생들이 꿈을 이루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

영화는 진출입이 자유로워요. 아무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정을 못 받으면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작가’가 돼야 해요. 장인으로서, 연출자로서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성실하면 어디서든 살아남아요.

영화라는 직업에는 감시와 통제가 없는데, 농부와 비슷해요. 결과물로 평가를 받죠. 뿌린 만큼 거둘 수 있어요. 연출은 창작력 등 재능이 필요한데, 만약 이런 재능이 없는데도 정말 영화를 하고 싶다면 테크닉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어요. 조명, 제작 파트처럼 말입니다. 둘러싼 환경이 어렵다고 굴복하면 성공하기 힘들죠.

‘무산일기’ 만들 때는 어땠나요?
[인터뷰] 영화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예산도 적고 스태프도 적었죠. ‘가내 수공업’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얼마나 열악했으면 아버지를 다 섭외했겠어요(박 형사 역의 박영덕 씨는 박 감독의 실제 아버지다). 낮에는 촬영부가 반사판 들고 뛰어다니고 밤에만 조명을 썼어요.

매 끼니를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고 스태프들도 돌아가면서 밥을 했어요. 아버지는 영화 속 역할과 이미지가 잘 맞을 것 같아서 부탁드렸는데 한 번도 NG를 내지 않고 잘해주셨죠. 아이들 숙제 도와주는 느낌으로 편하게 하셔서 그런가 봐요. 술 마시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술을 드셨어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영화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자신이 정말 좋아해서 시작했다면 증명을 해보여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난 아닌가 보다 하면 안 되겠죠. 영화를 사랑하고 목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스스로의 생활도, 영화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무조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잖아요. 어느 순간 스스로가 만든 영화를 보고 희열을 느낄 때가 올 거예요. 그러면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어요.

글·사진 노지원 대학생 기자(고려대 영어영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