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요조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의 어느 날, 홍대의 아늑한 바에서 가수 요조를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쉬운 질문에도 바로 답하지 않고 의미를 천천히 곱씹었다.

인터뷰 내내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 건 대학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부터. 라디오를 진행하며 접한 20대의 고민에 깊이 공감하는 듯 보였다. 꿈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대학생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요조는 모든 질문이 끝난 뒤에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인터뷰에 동석했던 김지예 대학생 기자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대 동생에게 진심을 다해 조언하는 친언니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스타와 커피 한 잔] 요조가 오늘의 행복을 노래하는 이유
가수 요조의 어린 시절 꿈은 ‘달고나 장사’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놀이터 옆 달고나를 팔던 천막을 자주 찾아갔다. 설탕을 휘휘 돌려 동그란 달고나를 만들던 노부부의 일터는 따뜻하고 아늑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꿈을 믿지 않았다. “장난치지 말고 진짜 꿈을 얘기해봐.” 친구들이 재차 물을 때마다 그는 받아쳤다. “더 큰 꿈이 필요해? 그럼 난 세계를 돌아다니는 달고나 장사가 될래.”

대학은 영문과로 진학했다. ‘달고나 장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몰라 가장 좋아했던 영어 과목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곧 학교 수업에 흥미를 잃었다. 심지어 이중전공으로 선택한 관광경영학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3학년이 되어서야 전공을 불문학으로 바꾸고 ‘아베세데’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요조는 그 시기를 ‘영양가 없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수업에 재미를 못 느끼고 도서관에만 박혀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워요. 왜 더 빨리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지 못했을까요?”

음악을 하겠다는 꿈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재즈바의 옛 동료가 “노래를 만들었는데 피처링을 해달라”고 부탁해온 것. 요조의 목소리를 처음 세상에 알린 노래 ‘허밍어반스테레오’의 ‘샐러드 기념일’이었다.

2004년 EP 앨범이 발표된 뒤, 귓가를 간질이는 요조의 목소리는 대중에게 신선하게 각인되며 입소문을 탔다.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서 청소하다가 여고생 둘이 제가 부른 노래를 듣고 ‘이 노래 좋지 않냐’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순간 ‘내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의 일이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2년간 학교를 휴학했다. 남다른 길을 가려는 딸을 부모님은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젊을 때 엄마 꿈이 밴드를 하는 것이었대요. 아빠를 만나면서 반대에 부딪혀 못했다고 하셨어요. 엄마에겐 제가 꿈을 대신 실현해줄 수 있는 존재였고, 아빠도 엄마의 꿈을 알고 계셨기에 제 도전을 응원해주셨어요.”

하지만 음악을 전공한 적도,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었던 요조에게 가수 데뷔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근근이 들어오는 피처링 작업을 하면서 긴 무명 생활을 보냈다. 015B, 드렁큰 타이거, 소규모 아카시아밴드 등과 작업했지만 뮤지션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불안한 시기가 계속됐다.

‘오늘’을 사는 의미를 깨닫다

인생의 전환점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온다. 요조에겐 2007년 동생의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그것이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삶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누구에게나 오는 ‘내일’이 동생에겐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구든 내일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비관적 사고가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바뀌기까지 일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쓰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함께 활동하던 소규모 아카시아밴드의 멤버가 용기를 줬다. “이제 네 노래는 네가 직접 만들어. 할 수 있어.”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기타를 잡았다. 그렇게 탄생한 첫 번째 자작곡은 2008년 발매된 첫 정규앨범 1번 트랙에 실렸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 ‘Giant’였다.

데뷔 후 그는 여성스러운 외모와 여린 목소리, 일상의 소소함을 담아낸 가사로 주목받았다. ‘홍대 여신’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인디음악 열풍의 중심에 섰다. 쏟아지는 관심과 비판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수많은 ‘우연’을 거쳐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된 자신을 돌아봤다. “제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전공을 바꾼 것도, 휴학을 했던 것도, 데뷔 전 무명 시절을 보낸 것도요. 그날들이 다 모여서 오늘이 된 거죠. 그러니까 더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조는 뮤지션에서 배우, 라디오 DJ로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2009년엔 영화 ‘카페 느와르’에, 지난해엔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에 출연했다. 다른 뮤지션들과의 합동 공연, 20대를 대상으로 한 문화 강연에 서기도 했다.

또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2년째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마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은 ‘익숙해지지 말기’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깨어 있고 싶은 마음은 ‘내일을 기다리기보다 빛나는 오늘을 살겠다’는 다짐과도 일치한다.

꿈 위해 ‘막 나갈 수’ 있는 용기

요즘 대학생들이 취업 걱정에 충분히 ‘오늘을 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대학생들 사연을 많이 받는데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친구가 대다수거든요. 어떤 친구는 저한테 무엇을 전공할지 물어보기까지 해요. ‘제가 운동을 하는데 경호학과에 갈까요, 태권도학과에 갈까요?’ 하는 식이에요. 이게 내 길인지 아닌지 몰라서 막막한 기분, 저도 이해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대학생 때는 조금 무모해도 될 것 같아요. 주변 사람 신경 쓰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은 일에 다가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요조는 오는 5월 열리는 그린 플러그드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세계무대 진출을 위한 샹송 앨범과 일본어 앨범도 준비 중이다. 부지런히 활동하는 요조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소박하게도 그의 바람은 다시 ‘무대 위’로 돌아오는 것.

“얼마 전 ‘피나 바우쉬의 댄싱드림즈’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거기서 백발 머리가 돼서까지 활동하는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그렇게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노래를 들려주는 게 꿈이에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살살 녹여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달고나’ 한 입에, 바쁜 생활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 한마디에, 홀로 걷는 길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노래 한 구절에 있다. 행복한 ‘달고나 장사’가 되고 싶었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어쩌면 ‘달고나’처럼 친근하고 달콤한 그녀의 음악 속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지 모른다.
[스타와 커피 한 잔] 요조가 오늘의 행복을 노래하는 이유
요조

1981년 생
경기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2007년 데뷔 앨범 ‘My Name is Yozoh’ 발표
2008년 정규 1집 ‘Traveler’ 발표
2009년 영화 ‘카페 느와르’ 출연
2010년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출연
2011년 KBS DMB & 2FM ‘요조의 히든트랙’ 진행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장소협찬 묘한술책(02-326-0845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2-13번지 한스빌 4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