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소리 귀를 가득 메우고 우렁차게 들려오더니/문으로 들어와 말을 내리자 그들의 기개 무지개 빛처럼 찬란하다/낙양의 인재며 대문호라 불리던 그대들/무수한 별들 가슴에 가득 펼쳐져 있고/하늘의 정기는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날개 늘어뜨리고 있는 내가 오늘 하늘을 훨훨 나는 기러기를 만났으니/언젠가는 이 시절이 부끄럽지 않은 용이 되리라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790~816)의 ‘고관의 방문(高軒過)’이라는 제목의 시다. 이하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이미 일곱 살 때 시를 읊고 글을 지어 신동으로 유명했다. 이하는 20세 때 한유(韓愈·768~824)의 방문을 받고 그 감격을 시로 지어 바쳤다.

이 시는 시인 이하의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을 노래하고 있다. 한유는 당시 시인으로 유명한 황보식과 함께 방문했는데 웅장한 말발굽 소리로 이들의 도착을 알린 다음 이들의 복장과 수레의 화려함과 찬란한 기상을 묘사한다. 이들의 학식과 기개를 칭송하고 특별히 이들의 문학적인 천재성도 강조한다.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자신이 ‘기러기’처럼 당대를 풍미하고 있는 이들과 만남으로써 다시금 의기가 충천해졌음을 말하면서 지금은 비록 초라하지만 언젠가는 훌륭한 인물, 즉 ‘부끄럽지 않은 용’이 되겠다고 다짐을 밝히고 있다.
[최효찬의 ‘인문학이 에너지다’] 이하의 섬세함보다 한유의 배짱을 배워라
>일러스트 신성희">
이하는 17세 때 머리가 하얗게 세는 신체상의 변화를 겪고 심한 충격에 휩싸이기도 한 인물이다. 재능이 뛰어난 인재도 삶의 고뇌가 얼마나 컸던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8세 되던 해 시를 들고 직접 한유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어쩌면 천재 시인의 조급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재능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일일 것이다. 시의 ‘귀재(鬼才)’라는 평가를 받은 이하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한유는 낙양에 와 있었는데 이하가 찾아간 날은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매우 피곤한 때였다. 시종이 시를 가져오자 옷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게 읽던 한유는 옷을 다시 입고 시종을 시켜 이하를 불러들여 만난다.

이를 계기로 이하는 당시 대문호인 한유에게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고 한유의 문하생들과 교류를 갖는다. 이 사건은 이하가 과거에 응시해 재능을 드높이고 관료로 출세하고자 하는 결의를 더욱 다지게 한 계기가 됐다.

‘시의 귀재’는 왜 과거시험에 집착했나

21세 때 이하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시험을 보러 장안으로 갔다. 하지만 시험도 치르기 전에 경쟁자들의 시기와 방해를 받아 시험에 응시조차 못한다. 이때 실망이 어찌나 컸던지 “내 인생 20년에 뜻을 이루지 못하니 마음은 마른 난초처럼 근심으로 시들어간다”고 읊었다.

충격을 받은 이하는 더욱더 시 창작에 몰입하는 한편으로 생계를 위해 장안으로 가 말단 관직생활을 한다. 그러나 24세에 자신의 포부와 너무도 다른 말단 관직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결국 이하는 20세 때 한유의 방문을 받고 쓴 시에서의 다짐처럼 ‘용’이 됐지만 너무 일찍 승천한 용이 됐다. 세상을 하직하기 전 이하는 친구에게 233수의 시를 전했다. 그때 나이 27세였다.

이하의 불우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너무 일찍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긴 생애를 놓고 볼 때 반드시 ‘행운’을 불러오진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하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그의 천재적인 시인의 자질이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대 대문호인 한유의 문하생이 되었다는 것도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게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이다. 한유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은 시인이라면 차라리 시인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게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생계를 위해 밥벌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지만 관직에 나가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당시에는 과거시험 이외에는 지식인이 생계형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하는 당나라 황실의 후예로 알려져 있지만 집안은 이미 몰락해 상당히 빈궁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 가난을 벗어나고 황실 후예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 이하는 더욱 과거시험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한유의 삶을 봐도 그렇다. 그 역시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10여 년 동안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한유는 19세 때 진사과에 응시하지만 계속 고배를 마시다 25세 때 네 번째 만에 합격한다. 원래 진사과에 합격하면 바로 관직을 할 수 있었으나 한유 시대에는 진사과에 합격해도 다시 ‘박학굉사과’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한유는 이 시험에 응시해 세 번 모두 실패하자 28세에 장안을 떠난다. 그는 장안 인근 지인의 집에 기거하면서 시험 준비를 했지만 이내 포기한 것이다. 경제적 궁핍이 한 요인이었지만 가문의 배경이 한미한 탓에 시험에 합격할 확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면 고관대작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데 여러 번 요청했는데도 매번 성과가 없었다. 당시 고관대작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을 알리고 급제하는 데 도와달라고 청하는 행위를 ‘간알(干謁)’이라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한유도 남들처럼 고관대작의 문을 두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28세에 과거 급제의 꿈을 접는다.

장안을 떠난 한유는 변주 지방정부의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32세 때까지 지방정부 관료를 하던 한유는 낯선 땅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다시 장안으로 온다. 마침내 34세에 관리선발시험에 합격해 사문박사(교수)라는 직책을 맡는다.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삶

한유의 관직생활은 승진과 좌천을 거듭했고 국방부 차관급인 병부시랑을 거쳐 이부시랑을 끝으로 사직한다. 그리고 57세였던 이 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한유는 관료생활을 하면서 직언을 서슴없이 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다.

그의 문장은 사람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고 우리나라의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백곡 김득신 등 수많은 문인의 문체에 영향을 주었다. 한유는 당송팔대가의 첫 번째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하와 한유의 삶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힘들게 공부하며 과거시험에 도전했다. 한유는 과거시험에 도전한 지 15년 만에 시험에 합격해 중앙 관료로 입문하며 죽을 때까지 고위 관료로서 살았다.

한유의 문장은 힘 있고 재미난 산문(散文)으로 우리나라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시인 이하는 10대부터 ‘신동’으로 소문났지만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 탓인지 한 번의 좌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결국 배짱 두둑하게 갖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법이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마침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취직을 걱정하고 있다면 한유처럼 도전하고 또 도전해보자. 한유는 심지어 ‘간알’까지 하면서 자존심을 접기도 했다.

한유처럼 생활고를 해결해야 한다면 한 단계 낮춰 생계형 자리라도 마련해 잠시 인생의 풍랑을 피해가는 것도 지혜로운 처신일 것이다. 시인 이하처럼 한 번의 좌절을 결코 마지막이라고,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비관하지 말지어다.

덧붙여 시인 이하는 메모광이었다. 메모지를 깨끗한 ‘비단주머니’에 넣어놓고 사용했으며 집을 나갈 때도 반드시 이 비단주머니를 달고 갔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메모지를 꺼내 쓴 다음 집에 와서 정갈하게 손을 씻고 다시 옮겨 적었다.

그가 쓴 233수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천양희 시인은 이하의 삶을 접하고 그처럼 가방 속에 항상 메모지를 넣고 다니면서 시를 쓴다. 이하 역시 오늘날까지 문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인 이하의 삶도 역사 속에서는 결코 불우하지 않다. 그를 닮고자 하는 시인들이 지금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거친 세상을 살아가자면 이하의 예민한 ‘섬세함’보다 한유의 거친 ‘배짱’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최효찬의 ‘인문학이 에너지다’] 이하의 섬세함보다 한유의 배짱을 배워라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겸 자녀경영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 다수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