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만세

“필리핀 어느 산속, 산들이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 이푸가오라 불리는, 수천 년 전부터 산을 개간해 수천 미터의 계단식 논을 만들어낸 독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 논은 산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는데, 한 군데라도 관리가 소홀하면 주변 논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우리의 품앗이나 두레를 시시때때로 엿볼 수 있다. (중략) 논둑을 밟아서 무너뜨리는 한심한 관광객이 아닌, 구경한 만큼 일손을 보태는 양심적인 여행자는 없을까? 지나가는 아주머니 짐을 들어주는 여유로운 여행은 어떨까? 조금씩 모은 돈으로 마닐라의 가난한 학생을 초청해 함께 넓은 세상을 보러 떠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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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여행(Fair Travel)’을 모토로 하는 여행사 공감세상(cafe.naver.com/riceterrace)의 공동 설립자인 고두환 대표(공주대 국제통상학과 4)가 쓴 글이다.

그는 지난해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여행을 다니다 머물게 된 이푸가오에서 ‘착한 여행’을 생각했다. 골프·섹스 관광의 오명을 벗고, 여행자와 현지인이 평등하면서도 서로 도움되는 관계를 맺는 여행 상품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해외봉사를 통해 만난 친구 송지환 대표(충남대 법학과 4)와 손을 잡고 상품을 세팅, 지난 1월 첫 여행객 16명을 이푸가오에 보냈다. 현지인들과 가슴으로 교류하는 ‘진짜’ 여행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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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여행은 ‘공정 무역(Fair Trade)’에서 따온 개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등한 관계를 맺는 공정 무역처럼 여행자와 여행 대상국의 국민이 평등한 관계를 맺는 여행을 말한다.

인기 TV프로그램 ‘1박2일’에서 소개되기도 한 공정 여행은 유럽이나 동남아에서는 이미 책임여행, 윤리적 여행, 에코 투어리즘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고 있다.

공감세상 역시 관광 풍토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설립됐다. 회사 이름은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기존의 여행 문화에서 소비적이고 환경 파괴적인 요소를 줄이고 현지인의 안내를 통해 여행지의 문화를 깊이 있게 향유하며 환경 친화적인 방법으로 여행 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공감세상 멤버는 총 8명이다. 모두 수도권과 대전·충남, 대구·경북 지역의 대학생들이다. 이들의 밑천은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유학 등으로 생활해본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 이를 활용해 소비적 관점이 아니라 현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무엇을 체험하고 서로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여행 상품을 기획하고 있다. 공감만세의 대표 상품인 필리핀 여행의 경우 수많은 여행사가 내놓는 상투적인 관광지 방문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던 필리핀의 전통적 계단식 논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가 복원될 수 있도록 일손을 보태고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탐아완 예술인 마을을 방문한다. 현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게 이 여행의 목적이다. 또한 빡빡한 스케줄이 다반사인 패키지여행과는 달리 하루 3번 명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숙박지 역시 기존 여행 상품과 확연히 구별된다. 환경 파괴적인 고급 호텔, 리조트가 아니라 필리핀 최대 빈민지역인 바세코 지역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빈민 생활을 체험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같이 느끼는 식이다.

비용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해법을 추구하고 있다. 기존 패키지 상품에 비해 10~20% 저렴하게 운영하면서도 여행 경비 나눔을 통해 뜻깊은 이벤트까지 진행한다. 한국인 10명의 여행객이 떠날 때 십시일반 모은 여행 경비로 현지인 1명 이상을 여행에 동반하게 하는 것이다. 동반하는 현지인은 여행자들의 훌륭한 가이드이자 친구가 된다.

국내여행 상품도 평범하지 않다.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상을 수상한 서울 북촌의 한옥과 골목길을 탐방하는 ‘너 북촌 아니?’라는 상품은 아름다운 가게와 그룹 등 사회적 기업과 협력해 운영하고 있다. 또 백제의 수도 공주의 문화유산을 공주대 교수의 강의와 연계하는 상품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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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출범한 새내기 기업이지만, 성과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송 대표는 “약 10회의 여행 상품을 운영하면서 초기 투자비를 상당 부분 회수했다”면서 “대학생, 직장인, 환경 등 관련 시민단체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전망을 밝게 내다본다”고 말했다.

사회적인 평가도 긍정적이다. 쇼핑을 강요하거나 현지 노동력을 싼값에 사는 기존 여행 상품과 전혀 다른 콘셉트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최근에는 희망제작소의 ‘희망별동대’라는 청년 사회적 기업 발굴 육성 프로그램에 참여해 투자대상 사업 아이템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4월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친 데 이어 현재는 협동조합 형태의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기업의 형태를 갖추고 여행 상품을 기획하고 추진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요즘은 추석을 겨냥한 상품 개발에 고심하고 있다.

공감세상은 앞으로 공정 무역과 공정 에너지의 연계를 통해 하나의 ‘공정 프로젝트’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특히 시민단체나 NGO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제기구의 형태로 키워나가겠다는 당찬 목표도 세워두고 있다.

박수진 기자 sjpark@hankyung.com┃사진제공 공감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