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 (주)아이비김영 회장

현재 대학 편입학은 전국 200여 개 대학에서 5만5000여 명의 편입생을 모집할 정도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대학 정원의 10%가 넘는 학생들이 편입학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중 서울·수도권 대학의 합격자 70% 이상이 김영편입학원 출신이라고 한다.

편입계의 미다스손이라 불리는 김영택 회장은 어떻게 이런 성공신화를 이뤄냈을까. 그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끝없는 도전과 다사다난했던 인생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나라 대학생들 중 ‘김영편입학원’을 모르는 학생이 과연 있을까. 연매출 500억 원, 학원 수 전국 36개(직영 21개), 대학 편입학 시장점유율 70% 이상, 34년간 14만 명의 편입 합격자 배출 등등 … 숫자로 본 (주)아이비김영의 성공지표다. 1977년 서울 동대문에 처음 개원한 이래 줄곧 업계 NO.1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다 편입학원 학생 수만 현재 1만여 명에 이른다.

1951년 생으로 올해 딱 예순을 맞이한 김영택 회장은 자서전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의 인생을 거대한 표(사진)로 만들었다. 그 표를 보면 치밀함과 섬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기부터 5기로 구성된 지난 60여 년의 삶이 색깔별로 정리돼 있는데 까만색= 인생의 암흑기, 빨간색= 인생의 황금기, 초록색= 도전했던 시간, 희망 하나로 살았던 순간들이라고 한다. 1기부터 5기까지의 다채로운 색깔들은 험난했지만 희망찼던 그의 인생의 청사진을 보는 듯 했다.
대학시절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무조건 도전하라!
고학으로 공부, 험난했던 10대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영택 회장은 중학교 시절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남들처럼 입시에 매진할 수 없었고 고학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당시 막연하게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누군가 도와주겠거니 했는데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실에 안주했었던 때라고 한다.

“떨어지는 방법이 중요하더라고요. 어차피 떨어질 거라면 경기고 가서 떨어져야지, 어설픈 데 가서 떨어지면... 내가 자존심이 강했어요.(웃음)”

그래서 지원한 경기고, 하지만 첫 시간 영어 시험에서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일 정도로 높은 벽에 부딪혔다. 시험을 포기하고 나와 좌절하며 길을 걷던 중,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대입 검정고시 광고지를 보게 되었다.

바로 학원을 찾아가 그 곳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청소도 하고 수강증 검사도 하는 ‘기도’ 생활을 시작했다고. 먹고 자고 숙식하면서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한 결과, 경기고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당시 학원 영어 선생님이 장학금도 주고 전교 3등 안에 들면 독일 유학도 보내주는 경기공전(5년제·서울 산업대 전신)을 소개해 4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지만 1학기만 다니고 나오게 되었다.

사업수완 발휘, 군대에서 학벌의 중요성 느껴

길바닥에서 책장사를 시작했다. 무협소설 대본업을 시작했는데 단골만 200명이 생길 정도였다. 자본금 1만6000원으로 시작해 한 달에 6만 원을 벌었고 6개월 만에 권리금 20만 원을 받고 팔았다. 엄청난 돈을 번 것이다.

우연히 종로2가 금은방 골목에서 고장 난 셔터 고쳐주는 걸 구경하다가 ‘바로 저거다’ 싶어 셔터회사를 열었다. 동대문에 있던 오성여관 아줌마한테 부탁해 고객한테 전화가 오면 “오성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회사는 오성셔터라고 이름 짓고 첫 달 80만 원을 벌었다. 7층짜리 오성여관 매출보다 2배 많은 액수였다.

그러나 곧 사람한테 배신당했다고 한다. “어느 날 주문이 안 들어오더라고요. 알고 보니 영업 비밀을 다 알고 있는 회사 기술자가 서울역 뒤 어느 여관에 똑같은 방법으로 회사를 차린 겁니다. 그래서 망할 처지에 놓였는데 어느새 군대 갈 날짜가 다가와 더 이상 싸울 시간이 없더라고요.”

군대에서는 중졸이라고 괄시를 받았단다. 행정병으로 일은 제일 많이 하는데 책임은 항시 그가 졌다.

“아, 우리나라에서는 만사 제쳐놓고 학력 없이는, 능력이고 뭐고 소용없겠다 싶었어요. 군대 제대하면 딱 1년만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군 전역 후 공부할 기회가 왔다. “1976년 초에 제대하고 보니 그 해 8월 1일이 대입 검정고시, 11월에 예비고사가 있고 다음해 1월에 대학 본고사가 있더라고요. 5개월 만에 은석학원에서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끝마쳤어요. 그때 개발한 ‘기적의 암기노트’는 지금도 우리 학원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대학 입학 그리고 스타강사 인생 시작
대학시절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무조건 도전하라!
그렇게 10개월 공부해 고려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대학 1학년 때 교양영어를 하는데 내가 해석을 압도적으로 잘하는 거예요. 정규과정을 마치고 들어온 애들보다 내가 훨씬 잘하니까 자부심도 대단했죠.”

문제는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고등학교 방식에 익숙한 학생들은 문장을 하나하나 해석했다. 그는 모르는 단어가 많아도 아는 단어 위주로 전체 내용을 읽으며 큰흐름을 찾아나갔다. 그러면서 ‘아,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잘못됐구나. 회화도 못하고 공부한 것이 소용없구나’ 싶었다고.

그렇게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던 차에 편입학원 영어 강사 자리를 제안 받았다. 71년도 대학 1년 때였다. 강의실에 11명이 앉아있는데 남학생 1명, 여학생 10명이었다.

“그 중 프랑스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이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몸이 마비돼 버렸어요. 책이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강의를 제대로 했겠어요?(웃음)”

그 다음날 학원 갔더니 달랑 1명 앉아있었다. 오기가 생기고 다시 도전하고 싶었다. 어떻게 도전할지를 많이 고민했다. ‘명강의는 전달력이다. 무엇이 가장 재밌게 전달될까’ 생각하다 ‘김영’식 드라마틱 강의가 생겨났다. 다음 회 드라마가 기다려지듯 강의가 기다려지는 수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내가 학생들한테 1시간 강의하면서 5~6시간 준비하는 건 부족하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20시간 이상 준비했어요. 한 구절 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 고민했죠.”

의외로 기회가 빨리 왔다. 모 학원에서 고려대 편입을 준비하는 학생 40명을 모집했는데, 초빙 강사들이 줄줄이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그가 시범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20시간 넘게 준비한 명강의는 대박을 터뜨렸고 그렇게 학원 강사 생활이 시작됐다.

가르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토론학습을 하면서 합숙까지 시켰다. 그 결과 40명 중 34명이 고려대 편입에 성공했고 다른 학생들도 성균관대, 한국외대 등에 합격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그렇게 ‘김영택’이 아닌 스타강사 ‘김영’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학원 경영 실패, 수많은 회사 거쳐 재기
대학시절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무조건 도전하라!
하지만 스타 강사 김영의 편입학원은 81년도 문교부의 서울대 편입 정책 취소로 인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명성콘도 영업사원으로 입사해 특수영업본부장에 올랐고, 어쩔 수 없이 국졸로 위장 취직한 우산무역회사에서는 한겨울에 우산을 3만 개나 파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회사를 거치면서 인정받고 돈도 벌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놀 물은 아니구나’ 했다고.

그렇게 다시 1987년 김영편입학원을 차리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업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난 어떤 꿈이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대입까지는 누구나 잘 준비해요. 하지만 대학만 가면 본인들이 의욕이 없더라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준비를 안 해요, 인생이 걸렸는데. 내가 젊어져서 다시 결혼하라고 하면 준비를 아주 많이 해서 결혼할 겁니다.(웃음)”

그는 본인의 성격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괴로웠던 시기는 돈이 없었던 시기가 아니라 희망이 없던 때라고. 희망을 꿈꿨던 시기, 꿈을 가지고 도전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때라고 그는 회상한다.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에 삶이 다양해졌다고 생각해요. 본능적으로 도전을 즐겨왔어요. 언제 죽어도 원도 한도 없습니다.”

“요즘 대학생들, 눈은 높지만 도전 싫어해”

그는 대학생이라면 큰 목표, 중간 목표 등 뭔가를 향해서 뛰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취직이든 창업이든 정보를 공유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애들이 눈이 높아요. 그러니까 결혼하기도 어렵고 웬만한 직장도 눈에 안 차는 겁니다. 하지만 난 그게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자기를 비하시킬 때 괴로운 거지, 자기를 높이면 자꾸 도전하게 되잖아요.”

우리 사회는 한 번 선택을 잘못하면 되돌리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경부고속도로를 타면 부산까지 계속 가야했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대입 시험 한 번 망치면 기회가 없어요. 편입은 이런 기회를 활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도전하면 실패든 성공이든 남는 게 분명 있어요. 나는 도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꿈을 잃고 방황하는 게 싫어요.”

그는 본인의 인생을 교훈적이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자식들에게도 “내가 밟은 길을 가지 말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만큼 어렵고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호랑이는 죽어도 풀잎을 먹지 않나니’라는 말을 언급하며 젊은이들에게 꾸준히 ‘자기 길을 가라’고 조언했다.

“캠퍼스 잡&조이 같은 취업매거진이 정보도 주지만 자극도 줄 거라 봅니다. 뭐든 하게 해야 해요. 시험공부를 하게 하든지, 동아리를 하게 하든지, 뭐든 열심히 하게 해야 합니다.”
그는 “대학생이 실패하는 건 실패가 아니고 실패를 해도 그건 경험으로 남고 실력으로 남기 때문에 절대 손해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졸업장? 나는 그게 뭔지 몰라!”

김영택 회장은 평생 졸업장이 단 한 장도 없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졸업 3개월 전에 이사 가는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고, 중학교 때도 졸업 직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서울로 오는 바람에 졸업장이 없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패스. 77년도에 입학한 고려대는 대학 4년 때 휴학해 94년도에 늦깎이 졸업을 했다. 그 해 졸업식장에 갔더니 수많은 제자들 역시 졸업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차마 ‘나도 너희와 같이 졸업하러 왔다’고 밝힐 수가 없어 이름을 부르는데 나가지 못했다고. 한 달 후 학교에 졸업장을 찾으러 갔더니 누가 타갔다고 했단다. 다시 졸업장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졸업장은 재발급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

김영택
1951년생
고려대 교육학과 졸업
연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한국경영인 리더십 센터 소장
제주도지사 관광개발 정책고문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복권위원회 위원
(주) 아이비김영 대표이사 회장(현)

한상미 기자 hs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