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째 이어지는 신세계의 인문·예술 경영 ‘주목’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정용진 부회장은

1968년 서울 출생
경복고,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
신세계 전략기획실 대우이사(1995년)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사장(2000년)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회장(2006년)
신세계·이마트 대표이사(2010년)
신세계그룹 부회장(2013년)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정용진 부회장이 추천하는 인문서적 및 문학작품
●철학서적 <삶은 무엇인가>, 김태길
●고전 〈채근담〉, 홍자성
●소설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시 ‘그 꽃’, 고은
●시 ‘대추 한 알’, 장석주


앙증맞게 피어난 개나리도,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도 스펙 쌓기라는 그늘 아래 가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취업준비생들. 이들에게 인문학은 그저 스펙 충만한 이들의 요깃거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채용시장에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가 환영받기 시작했다는 사실. 이에 한 기업은 크게 한 판 벌이기도 했다. 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이다.

지난 4월 8일 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4월의 서막(이하 지식향연)’이 열린 서울 연세대 대강당. 2000여 명의 학생들은 마치 오매불망 기다린 인기 가수의 공연장에 와 있는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촘촘히 앉아 있었다. 정지영 전 SBS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된 지식향연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강연으로 이어졌다. 외부 강연에 처음으로 직접 나선 정 부회장은 “혼란의 시대,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을 준비하며 우리 사회를 이끌 미래의 리더들에게 ‘청년 영웅’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며 인문학적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신세계의 인문·예술 경영은 정 부회장이 경영일선에 나선 2010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그해 10월부터는 매주 토요일 신세계 우수고객(VIP)을 초청해 콘서트를 열었다. 2010년 7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정 부회장은 “윤리경영과 효율 및 내실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신세계에 창조와 혁신, 소통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덧입히겠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신세계를 유통업계의 애플로 만드는 게 목표”라며 “애플처럼 변화와 혁신을 통해 고객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회사로 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부회장의 인문·예술 경영에 대한 관심이 이번에는 대학생과의 소통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세계그룹이 마련한 ‘지식향연’은 이번 연세대 공연을 시작으로 오는 6월까지 성균관대·이화여대·부산대·전남대·제주대 등 전국 10개 대학에서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최종 선발된 20명의 ‘인문학 청년 영웅’에게는 세계 각지의 인문학 중심지를 찾아가는 ‘그랜드 투어’ 기회를 제공하고 소정의 장학금 지급과 함께 입사 지원 시 가산점 부여 등의 혜택을 준다. 1단계 지식·지혜 경연을 통해 선발된 150명을 대상으로 오는 6월 말 경기도 용인의 신세계 인재개발원에서 2단계 인문학 경연을 벌여 최종 20명을 뽑는다. 신세계는 이를 포함해 인문학 전파에 매년 2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정 부회장은 첫 외부 강연이었지만, 초반부터 ‘소탈한 표현’으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췄고, 취업 준비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고충을 공감하면서 기업인으로서의 뜻을 전하려는 진정성으로 강연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청년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고, 40분 강연하는 동안 자리를 뜨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정 부회장의 생생한 특강 전문을 정리한다.


“인문학 없는 스펙은 모래성”
회사 임직원 앞에서 연설한 적은 있었는데, 오늘처럼 회사 밖에서 많은 말을 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솔직히 긴장도 된다. 교수님처럼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나운서처럼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기업을 경영하고 사람을 채용했던 노하우를 나누고 싶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여러분 앞에 서게 되니까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추운 겨울 동안 그토록 고대했던 아름다운 계절, 이런 좋은 날씨에 산책도 해야 할 텐데…. 대학생들은 안타깝게도 마음껏 누리기는커녕 ‘알바’와 취업준비 등 힘겨운 시간 보내고 있다.

스펙이 중요하다고 해서 없는 돈과 시간을 들여 스펙을 쌓았더니 이제 또 ‘인문학’이라고 한다. 기운이 빠질 것이다. 저라도 짜증날 것이다.

인문학이 대체 뭘까.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들다.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 또는 인간의 조건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참 어렵다. 인텔의 제네비브 벨 박사는 “공학적 사고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은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지? 어떻게 하면 성공하지?’가 아니라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나의 소명인가’를 살피자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면 되느냐(how-to)’에 집중하던 우리가 이제 어려운 질문인 ‘왜, 무엇을 위하여(why, what-for)’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를 맞았다. 상대의 겉만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는 관심과 이해가 인문학의 시작이다.

예전에는 기업들이 스펙이 좋은 사람들을 뽑았다. 학생들도 스펙 쌓기에만 집중했다. 과거에는 기존 정보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능력자이고 스펙이 높은 사람이 우수한 인재라는 등식이 성립됐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하나의 정답은 없다. 우리가 새로운 답을 만들어 가야만 하는 시대다.

이 급변하는 시대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세상을 다르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실적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더 깊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든 개인생활이든 행복하게 잘 살려면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통찰력을 키우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문학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힘이다.

지금 내 나이가 마흔일곱인데, 젊은 여러분이 부럽다. 그런데 내가 부러워하는 그 젊음이 ‘진짜 건강한 젊음인가’라고 묻고 싶다. 피곤하고 지쳐 있는 청춘이 늘 안쓰러운데, 그 부분에 대해 사회적 리더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나부터라도 ‘열심히’에 집중하던 청년들에게 ‘제대로’라는 지표를 제시하고 싶었다.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고전 속 등장인물의 감정을 읽어라”
요즘 많은 국내 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기업의 조직, 제품 개발, 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아야 한다.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최근 전화기를 샀는데, 이 스마트폰 ‘삼성 갤럭시 S5’는 대충 만든 것 같아도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질, 행동패턴 같은 인문학적 통찰이 제품과 서비스에 모두 반영돼 있다.

매년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직접 면접을 본다. 매번 면접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던 것은 많은 지원자들이 자신의 주관적 소신을 말하지 않고, 모범답안을 외우고 와서 한결같이 대답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제대로 전하는 인문학적 소양만 더 갖춘다면 좋은 스펙이 더 빛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신세계는 비슷비슷한 스펙만으로 사람을 뽑지 않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통찰력을 갖추고 건강한 주관을 가진 차별화된 인재를 선발할 것이다. 어떤 전공을 했나를 떠나서 사회 문화에 대한 관심, 열린 세계관을 중시할 것이다. 우리 회사만 해도 5만 명이 넘는 임직원이 근무하고 있는데, 조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생각을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혁신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럼, 왜 신세계가 갑자기 인문학을 들고 나왔을까. 경영 이념의 중심에 바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인문·예술·문화를 통해 고객의 행복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인문학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고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젊은 세대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사회와 청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현재 취업 트렌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스펙을 넘어선 인문학을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취업이든 창업이든 인문과 철학에 바탕을 둔 삶의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책을 들고 나오며) 이 책은 고(故)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의 <삶이란 무엇인가>이다. 개인적으로 경영학·경제학 서적보다 철학 전공자인 교수님의 이 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삶의 태도나 회사를 운영할 때 중요한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내용도 공유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모자라서….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저는 인문학자가 아니지만, 조금 더 인생을 산 선배로서 여러분께 3가지 제안을 드린다.

첫째, 고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 고전은 빠르고 자극적인 것에 익숙한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이것만으로도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다만 줄거리와 결말에만 집중하는 독서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레미제라블>을 예로 들면 사람들은 대개 장발장의 기구한 스토리에만 집중하는데, 여러분 스스로가 장발장이 되어서 절박함과 죄책감, 사람들과의 갈등을 느껴보기 바란다. 이런 고전 속에 나오는 인물의 삶과 감정을 곱씹어보고, 이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과 비교해봐야 한다.

둘째, 주변을 살필 여유를 가져야 한다. 시를 하나 낭송하겠다. 고은 시인의 ‘그 꽃’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 이 시에 나오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면 놓치는 것이 많다. 꽃같이 아름다운 게 특히 젊은 시절에 널려 있는데, 눈앞의 현실에 쫓겨 당장 필요한 공부와 스펙에만 매달리다 보면 소중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게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을 통해 생각의 폭을 넓히고 주변을 살폈으면 한다.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셋째, 사안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보자.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대추의 생김새나 대추의 개수보다는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대추의 고뇌와 외로움, 익기까지의 과정 등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사물의 껍데기만이 아닌 본질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란다.

인문학은 결코 취업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문학은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처하든 중심을 잡아주고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미래를 만드는 사람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혼란의 시대에 올바른 가치관과 남다른 생각을 갖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들에게 ‘청년 영웅’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리고 청년 영웅들이 튼튼한 뿌리를 갖추며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겠다. 지식향연을 통해 많은 청춘들이 인문학적 지혜와 성찰을 나누고 진정한 행복과 가치를 되찾기 바란다.


전문가 특강
이번 지식향연 프로그램에 핵심 자문 역할을 한 송동훈 문명탐험가는 정용진 부회장에 이은 특강에서 ‘청년 영웅’의 그랜드 투어에 대한 의미를 역설했다. 또 승효상 건축가는 ‘지문(地文)’이라는 단어로써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인문학과 건축을 이야기했다. 이날 윤한 팝피아니스트와 송소희 국악인 등이 감수성 넘치는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랜드 투어”
- 송동훈 문명탐험가

이번 지식향연을 통해 뽑힐 청년영웅 20명을 데리고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떠나게 된다. 그랜드 투어는 배움과 영혼이 있는 여행이다.

어렸을 적 공부하기 싫을 때면 아버지 서재에서 소설책을 보는 것으로 반항심을 표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서도 나는 아버지 서재에서 책에 빠져 있었다. 그때 유독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바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열린 남부군의 파티장 모습이다. 파티에 참가한 귀족들은 남부가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사업가 레트 버틀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북부에 직접 가보니 제철소, 화학공장, 수십 명의 인력 등 남부가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북부는 강하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알다시피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여행은 나를 위한 최고의 즐거운 배움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책을 단숨에 7번 연달아 읽어버렸다. 덕분에 시험 성적은 뚝 떨어졌지만 그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신세계그룹이 처음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18~19세기 유럽 귀족 사회에서 이미 유행한 교육방법이다. 아담스미스나 홉스, 로크 등 유명 철학자들은 모두 그랜드 투어의 선생님이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으로도 확대됐다. 미국의 대표적인 수혜자는 바로 존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다. 그에게는 매우 잘난 형이 있었다. 이 형은 하버드에서도 미래의 대통령감으로 인정받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형과 달리 놀기만 좋아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그를 그랜드 투어를 하도록 떠밀었다. 독일에 도착한 그는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의 독재체제 아래 당시 유럽은 긴박한 전쟁 직전 상황이었음에도 정작 국민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유럽의 정치 생태를 연구해 논문으로 제출했다. 그가 논문을 내자마자 2차 대전이 터졌고 이를 계기로 케네디는 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대통령직까지 진출한다. 형이 평생 이루고자 했던 꿈을 그랜드 투어를 계기로 그가 이루어낸 것이다.

중세 로마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라며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지 올해로 2000년이 됐다. 우리는 그의 이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봐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자원이 마땅치 않다. 게다가 4대 강국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기댈 곳은 결국 사람밖에 없다. 여러분이 인재고 우리의 미래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랜드 투어를 떠나자.
[스페셜 리포트_신세계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 정용진 부회장, 인문학으로 대학생과 소통하다
“지문(地文)을 알면 인간이 보인다”
- 승효상 건축가

혹시 건축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 건축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문(地文)’이라는 단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지문이란 내가 직접 만든 단어로서, 글자 그대로 ‘땅의 무늬’를 뜻하는 말이다. 인간은 땅에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 즉, 지문을 알면 인간에 대해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예로, 르네상스의 건축물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인간 사회가 얼마나 계급 중심으로 운영됐는지를 알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만큼 이 시기에 인간을 위한 건축물들이 대거 탄생했다. 하지만 당시의 ‘인간’은 종교나 정치권력이 있는 특별한 몇 사람에 국한된 의미였다. 이런 가치관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바로 로마의 ‘성 베드로사원’이다. 성 베드로사원은 교황만을 위한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원의 메인 건물인 돔은 온전히 교황의 거주지로 사용됐다.

이런 계급 중심 가치관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1955년 세인트루이스의 푸르트-아이고(Pruitt-Igoe) 단지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 이곳은 저소득층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으로 ‘꿈의 단지’란 찬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이 슬럼화 되는 등 단지 간 계급차가 발생하면서 세입자들이 떠나갔고 범죄자들이 빈집을 차지하게 됐다. 결국 흉악한 도시 범죄가 연이어 터지면서 1972년에 정부가 이 단지를 폭파해버렸다.

안타깝게도 유럽에서 실패한 이런 계급 기반의 건축 문화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요즘 서울 지도를 보면 재개발 등 경제적 이익을 기준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는 걸 느낀다. 과거 자연과 조화를 이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풍경이다. 우리는 건축을 공부하기에 앞서 인간 사회를 사랑하고 이해해야 한다.


글 박상훈·이도희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