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210 ‘천재소년’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이처럼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의 삶을 강조했다. 서너 살 때부터 ‘신동’, ‘천재’ 등으로 불리며 온 국민의 관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해 불행했던 한 사람. 김웅용(52) 신한대 교양학부 교수다. 하지만 그는 이제 행복하다며 미소 짓는다. 그의 웃음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어봤다.
[My Dream My Way] “평범한 아저씨라 더 행복합니다”
김웅용 교수는
1963년 서울 출생
1974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선임연구원
1998년 충북대 대학원 공학박사
2012년 충북개발공사 사업처장
2014년 신한대 교양학부 교수


2년 전 ‘슈퍼스칼라(SuperScholar)’라는 미국의 비영리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을 선정했다. 여기에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 22세의 나이로 최연소 체스 그랜드마스터가 된 러시아의 게리 카스파로프,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미국의 폴 앨런 등이 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김웅용 교수(당시 충북개발공사 사업처장)가 포함돼 있었다.


천재소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시련
그는 신동(神童)이었다. 5세 때 4개 국어를 구사했고, 6세 때 일본 후지TV에 출연해 고등 미·적분을 막힘없이 풀었다. 당시 일본에서 측정한 그의 IQ는 210이었고 이는 기네스북에 올라 10년 넘게 깨지지 않던 기록이었다. 7세 때는 청강생 자격으로 한양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이듬해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주선으로 콜로라도주립대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 16세까지 NASA 핵물리학 분야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쉽사리 흉내 내지도 못할 ‘초특급 엄친아’ 같던 그의 어린 시절, 그는 어땠을까.
[My Dream My Way] “평범한 아저씨라 더 행복합니다”
“정말 귀찮았어요. 사람들은 저에게 ‘2 곱하기 7은 뭐냐’, ‘커서 뭐 될래?’ 등의 질문만 던졌고 저는 늘 같은 대답만 반복해야 했죠. 그리고 TV, 라디오, 신문 등에 출연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 참 부담스럽고 싫었어요.” 신동이니까, 천재니까 뭐든지 알 거고 잘 할 거라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는 경우도 많았다고. 그러다 보니 그를 시기하는 또래들도 생겨났다. “‘너 때문에 내가 혼났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대하는 게 힘들었어요. 저는 밖에 나가서 마음껏 놀고 싶었는데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서 살면 되겠느냐’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숨이 막혔죠.”

그는 미국에서의 학업과 연구원 활동을 ‘벽관 고문(창도 나 있지 않은 매우 비좁은 공간에 가두어 두는 고문)’에 비유했다. “신체 발달 정도의 차이 때문에 수업을 들을 때 특수한 장치가 있어야만 했어요. 심지어는 화장실을 이용할 때도요.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친구가 없었다는 거예요. 방과 후나 연구시간 외의 활동에서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지요.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고요. 참 외로웠습니다.”


평범함을 갈망…‘동문’ 만들기 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 검정고시와 대학예비고사를 치러 1981년 충북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천재가 지방대에 갔다며 ‘실패한 천재’ 운운했지만 그는 고향과도 같은 청주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혹독한 외로움의 터널을 지난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친구를 사귀고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데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을 친구는 역시 고등학교 친구들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모교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교 동문회의 문을 두드렸다. “청주 지역의 몇몇 동문회에 문의를 했지만 절 쉽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원주고등학교 동문회에서 문을 열어주었어요. 교가 외우기, 담임선생님 이름 맞히기 등의 테스트가 있었죠. 전 열심히 준비했고 결국 원주고등학교 동문이 될 수 있었어요.” 그는 지금도 충북대 재학 중인 원주고 출신 학생들에게서 메시지를 받는다며 즐거워했다.
[My Dream My Way] “평범한 아저씨라 더 행복합니다”
김 교수는 1988년부터 전공 관련 논문 10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고, 1993년부터 연세대, 성균관대, 카이스트 등 많은 대학에서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가르쳤다. 2006년에는 ‘마르퀴즈 후즈 후 인 더 월드’ 등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최근까지 충북개발공사에서 일하던 그는 올 1월 신한대(총장 김병옥)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인 관성의 법칙은 인간에게도 적용됩니다. 누구나 자기의 원래 상태, 즉 ‘지금 그대로의 편한 상태’를 유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만히 있으려 하기보다 변화와 도전을 추구했지요. 대학교수가 원래 꿈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제 학생들을 잘 가르치며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4000개 넘게 저장된 연락처… “사람들과 부대끼는 행복이 좋아”
김 교수는 공업수학과 물리학을 주로 가르친다.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과목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즐거운 강의가 되도록 노력한다며 자신이 직접 만든 ‘흥미로운’ 수업자료를 보여줬다. “강의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의의 목적이 타인을 이해시키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잖아요? 학생들이 호기심을 갖고 집중할 수 있게 강의를 이끌어 갈 겁니다.”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자랑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휴대용 전화기에 저장돼 있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다. “부모님과 형제밖에 몰랐던 제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껴요.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다 만날 순 없어도 가까이 하다 보니 좋아지더라고요, 사람 그리고 관계가. 요즘 참 행복합니다.”

특별한 성장기를 보낸 유명인으로서, 옆집 아저씨 같은 교수로서, 그리고 인생 선배로서 그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일까. 그는 가장 먼저 ‘사람’을 강조했다. “동아리 활동, 멘토링 등 인간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거든요.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세요.”

비범함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이 그 경험을 통해 비로소 평범함 속의 행복을 발견했다고 할까.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내가 잘 하는 게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요. 모든 것을 잘 하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해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늘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 보이시길 바라요. 겸손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닙니다. 사회적 비난을 의식해 자신의 능력을 잘 나타내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에요.”

교수로서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한 그는 설렘이 가득한 소년 같았다. 이제 더 이상 IQ 기네스 기록 보유자는 아니지만, ‘개인 행복지수’에도 기네스 기록이 있다면 그는 곧 다시 이름을 올릴 듯하다.



인터뷰 뒷담화

영화 ‘플랜맨’의 모티브는 김웅용 교수?
올 초 개봉한 영화 ‘플랜맨’에는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는 주인공 한정석(정재영 분)이 등장한다. 한정석은 어린 시절, 어떤 숫자도 소수점 끝자리까지 단숨에 맞히는 숫자 신동으로 방송에까지 소개된 천재소년. 하지만 한정석은 어린 시절 그에게 쏟아진 과도한 관심 때문에 결국 이름까지 바꾸고 1분 1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플랜맨’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모티브가 김웅용 교수로 밝혀져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자신이 모티브가 됐다는 사실도 몰랐고, 인터뷰 당일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또한 극중 한정석이 보인 강박증이나 결벽증도 전혀 없다고 한다.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유명인
김웅용 교수는 실제로 1960년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 인터뷰가 끝나고 김 교수와 학교 근처 식당을 찾았다. 식당주인과 점원들의 열렬한 환대와 계속되는 사진 촬영 부탁 그리고 서비스(?) 메뉴들은 기자로 하여금 ‘시간이 흘렀어도 한 번 유명인은 영원한 유명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글 박상훈 기자 | 정리 박다미 인턴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