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술 마시다 연애에 성공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술 때문에 다 잡은 인연을 놓쳤다고 한다. 모임도 많고 덩달아 술자리도 많아질 이때, 연애와 술의 관계를 생각해봤다.


내 첫 연애는 술로 시작되었다

97학번인 나의 대학 입학 후 첫 연애는 1997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당시 제대하고 갓 복학해 내가 있던 동아리에 돌아온 선배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같이 밥 먹지 않을래?”라는 한마디 말과 함께 나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밥 먹으면서 술도 한잔하고 그러는 거지 뭐”라는 말과 함께.

대학 생활을 재미없게 한 탓에 별달리 술을 마시지 않았던 내게 그 선배와의 술자리는 뭐랄까 시간의 경계, 현실과 꿈의 경계, 가도 좋을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의 경계, 오후와 밤의 경계, 그렇게 무수하게 많은 ‘경계’를 떠올리게 했다. 너무 철학적인 얘기인가? 쉽게 얘기해 ‘한 잔 더 마시면 정말 기분이 더 좋을 것만 같은 느낌’과 ‘한 잔 더 마시면 앞에 있는 사람과 큰일이 나버릴 것만 같은 느낌’의 경계였다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어쨌든 그 선배는 그 후로도 나를 여러 번 밥집(을 가장한 술집)으로 이끌었고, “밥 먹으면서 술도 한잔하고 그러는 거지 뭐”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술잔을 부딪치며 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인생 상담을 나보다 겨우 몇 년 더 살았을 뿐인 까까머리 복학생에게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던가. 볼이 발그레한 20대의 두 남녀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서로를 향한 액셀러레이터를 꾹꾹 밟았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당연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커플이 되었다. 돌아보면 참 달콤한 기억이다.

하지만 1년쯤 지난 어느 날 밤, 둘만의 술자리에서 나는 술기운을 빌려 그에게 모진 말을 했다. “그냥 이렇게 만나는 게 지겨워졌어. 그만하고 싶어.” 술이 취하지 않았다면 몇 주 혹은 몇 달 뒤로 미루고, 어쩌면 결국 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그 이별의 칼날 같은 말들을, 그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용감하게 할 수 있었다. 술김에 하는 이별은 말 그대로 술김에 하는 이별이라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붙잡았고, 설득하려 애썼다. 하지만 역시 술김이었기에 나는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돌직구를 던지듯, 옆을 볼 수 없는 경주마가 달리듯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술이 깨고 보니 우리는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렸다. 그렇게 이별했다. 돌아보면 참 슬픈 기억이다.
[LOVE] 술, 연애에 독일까 약일까
술은 ‘양날의 검’

추억을 돌아보다 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사람들은 연애할 때 적당한 음주는 필수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도 술과 연애는 자주 연관 지어 그려지곤 하니까. 로맨틱한 데이트를 했다 하면 남자주인공은 항상 와인을 주문하고,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는 남녀는 당연히 깊숙이 친해지며, 위스키를 마시는 남자에게 여자가 은근한 추파의 눈길을 보내는 등 술과 남녀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는 거다. 그런 이미지들을 학습해왔기 때문일까. 나 역시 연애를 시작했다 하면 와인, 사케, 소주, 맥주, 보드카, 데킬라에 막걸리까지 세상의 모든 술을 섭렵이라도 하려는 듯 마셔댔었다. 그렇게 해야 서로의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들어가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든 연애에 술이 약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술은 평상시에 감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용감함 딱 그만큼의 판단력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정말 좋은지를 판단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이 사람과 계속 가도 좋을까를 고민하는 꽤나 심각한 상황에 알코올이 개입되면 분명 곤란해지는 어떤 지점을 만나게 된다는 얘기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판단력을 가져가 버리는, 양날의 검 같은 것이 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술이 약일까 독일까라는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스스로의 판단력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술은 약이 될 테지만, 여전히 용기가 없는 자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말 뿐이니까.


인생 선배들이 ‘술을 꼭 한 번 왕창 먹여보라’고 연애 조언을 하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술을 마셨을 때 평상시보다 거친 말을 내뱉거나 거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 맨정신인데도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



술과 연애가 합하는 날, 기억해야 할 것들

연말연시, 술 약속도 잦고 다양한 모임도 많을 때다. 더불어 커플도 많이 생겨난다. 북적이고 일렁이는 연말연시의 불빛 속에서 외로움을 타는 눈빛도 강렬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런 술자리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을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아무래도 술자리 비매너가 아닐까.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이든 꽤 시간이 흐른 커플이든 술을 마시다 보면 평소엔 감히 하지 못하던 비매너 행동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억지로 술을 마시라고 하는 남자, 취기가 오르면 예전에 서운했던 이야기를 구구절절 꺼내는(그러다 울기까지 하면 정말 최악이다) 여자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술을 마셨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라는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남녀가 여전히 이 ‘비매너’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동들 때문에 깨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억지로 술을 마시라는 남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소셜 데이팅 업체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남자의 20%는 여자친구와 다음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 꼭 술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지만 여자는 4%만이 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한마디로 여자들 대부분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다음 진도를 나갈 마음의 준비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까. 술기운을 빌리지 않아도 진도를 나갈 수 있는 여자들이 어쩌면 남자들보다 용감하다는 증거는 아닐까.

또 한 가지, 로맨틱함에 대한 강박관념을 덜 가졌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 영화 속에서, 각종 드라마 속에서 연인의 술자리는 늘 로맨틱한 것으로 표현해온 덕분에 현실의 연애를 하는 많은 연인들은(특히 남자들은) 단둘의 술자리에서 오히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상대방을 위한 힐링 캠프 사회자가 되어준다는 생각 말이다. 로맨틱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술자리가 부담이 될 뿐이다. 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힐링 캠프를 열어주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들어준다는 생각을 하는 커플이라면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가 로맨틱해지지 않을까.

만약 그 사람에게 정말로 마음을 줄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술자리를 통해 상대방의 취약한 어떤 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인생 선배들이 ‘술을 꼭 한 번 왕창 먹여보라’고 연애 조언을 하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술을 마셨을 때 평상시보다 거친 말을 내뱉거나 거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 특정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맨 정신인데도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 술버릇이 좋지 않은데도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러는 걸 거야’라고 너그럽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그 너그러움이 오히려 스스로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많은 술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1월, 당신은 어떤 술자리를 기대하는가. 로맨틱한 술자리이든, 조금은 수줍은 술자리이든 당신의 연애를 좀 더 뜨겁고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자리이기를! 그리하여 이번 겨울엔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LOVE] 술, 연애에 독일까 약일까
곽정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이자 연애·성 칼럼니스트. '내사람이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