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길

“전날 새벽 3시까지 일정을 소화했다”는 얼굴에선 피곤이 뚝뚝 흘렀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열기는 “끝나고 나니 어느새 내가 힘을 얻었다”는 말과 함께 함박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뮤지컬에선 이미 최고의 티켓파워를 지닌 슈퍼스타이자, 방송과 영화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배우 홍지민. 그리고 그녀의 열혈 팬임을 자처하는 캠퍼스 잡앤조이 대학생 기자들이 심야의 데이트를 즐겼다.

큰언니와 막내 동생, 혹은 멘토와 멘티로 만난 이들의 대화는 두 시간 내내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이어졌다. 내일이 두렵기만 한 청춘들, 그리고 그 내일을 희망으로 만드는 선배가 이들에게 털어놓은 금쪽같은 이야기들.
쿨한 언니의 따뜻하고 당당한 외침 “청춘의 고통 즐기라고? 아예 없애버려!”
가슴 뛰는 일 찾았니?

지금 3학년이에요. 내년에는 취업을 해야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엔 어떠셨어요?

음… 그 얘기라면 첫 시작부터 해야겠는걸. 중3 때였어. ‘유리동물원’이란 연극을 교회 오빠와 처음 봤지. 만날 홍콩영화만 보다, 압도하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며 문화적 충격을 받은 거야. ‘저걸 해야겠다.’ 고2 때부터 입시를 준비하며 극단 생활을 시작했어. 극단 마산. 고향 마산에서 유일하게 배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지.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물론 반대했지. 그때만 해도 연극영화과가 많지 않았는데 중앙대가 최고였어. “중대에 가면 허락하겠다”는 아버지 말에 열심히 했지만 똑 떨어졌어. 약속은 약속이니 창원에 있는 학교의 유아교육과에 들어갔어. 이것도 그냥 간 건 아니야. 담임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그나마 동화 구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해서 제일 비슷하다”는 거야.

자포자기하는 심정 반, 여자로서 나쁘지 않은 직업이란 생각 반으로 진학했지.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어. 노래 동아리 활동과 극단 생활도 여전했지. 어느덧 졸업반이 돼 교생 실습을 나갔는데 순간 내 길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거야. 사명감이 없으니 아이들을 전혀 감당할 수 없겠더라고. ‘다시 연극과로 가자.’ 졸업한 해에 바로 수능 보고 서울예전에 갔어. 이래봬도 수능 1세대야.(웃음)


연극과 생활엔 만족하셨어요?

물론! 그렇다고 스타일리시하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어. 탈춤 동아리서 만날 북과 장구만 쳤지. 그러다 1996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졸업반이 돼서야 뮤지컬을 보게 됐어. 극단 사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였는데 또 한 번 문화적 충격을 받은 거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일주일간 계속 꿈에 나오더라니까. ‘내 길이 바로 저거다’라 맘먹고 방법을 찾았어.

서울예술단에 운 좋게 합격했지. 샤워 한 번 하려면 주인집과 계단을 통과해야만 했던 가난한 자취생이 월급도 받고 샤워 시설도 빵빵한 곳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눈 뜨면 일어나 극단 가서 씻고, 또 제일 늦게까지 남아 혼자 연습하고. 그렇게 4년을 보냈어.
쿨한 언니의 따뜻하고 당당한 외침 “청춘의 고통 즐기라고? 아예 없애버려!”
조바심 낼 필요 없어

그런데 이름을 얻기까지는 꽤 오래 걸린 것 같아요.

사연이 있지. 그것도 아주 아픈 사연이. ‘바리’라는 작품을 하는데 이선희 언니와 유열 씨가 주인공이었어. 당시만 해도 인기 가수들이 주인공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 ‘뮤지컬 경험이 없어도 인지도만 있으면 금방 주인공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야.

‘나도 1, 2집만 내고 바로 주인공으로 컴백해야겠다’는 낮은 수가 든 거지. 마침 모 기획사에서 가수 제안도 왔던 터고. ‘태풍’이란 대형 작품에 조연으로 캐스팅이 된 상태였는데 그걸 박차고 나왔어. 거기서부터 인생의 시련이 시작됐다니까.


가수 데뷔가 잘 안 됐나요?

막상 기획사에 들어가고 나니 차일피일 미뤄지더라고. 노래도 안 주고 연습도 안 시키면서 ‘살만 빼라’는 거라. 매일 벽 보고 혼자 연습했어. 기획사 대표가 끌고 가 소위 스폰이랑 작자 앞에서 노래도 불러줘 가며.

그렇게 2년 동안 생활하니 어느덧 20대 끝자락인 29살이 됐더라고. 겨울에 난방할 돈이 없어 두꺼운 외투를 덮고 자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어.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난 거야. 이렇게 된 게 다 뭐 때문일까? 그래, 바로 ‘조바심’이야.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괜찮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명확했어. 뮤지컬! 그때부터 다시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지. 정신 차리고 매진하니 의외로 그렇게 힘들지 않더라고. 작품도 계속 들어오고 말이야.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하나야. ‘뭘 하고 싶은지 찾으라’는 거! 진짜 가슴이 뛰는 일 말이야. 언니 나이가 마흔인데, 내 친구들 중에도 여건상 하고 싶은 일 못하는 사람이 많아. 만족해하는 사람 한 명도 못 봤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설사 돈이 안 된다 해도 참을 수 있어. 버틸 수 있는 힘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야. “넌 잘됐으니 그런 말 하지” 하는 사람도 있어. 나? 시간 많이 걸렸어. 이름 알려진 지 불과 얼마 안 돼.
쿨한 언니의 따뜻하고 당당한 외침 “청춘의 고통 즐기라고? 아예 없애버려!”
너무 위만 보면 부러져!

원래 PD가 꿈인데, 너무 힘들 것 같아 망설여져요. 기자 일에도 관심이 있고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아서 그래. 해보지도 않고 힘들다는 건 머릿속의 생각일 뿐이지. 기자 일은 쉬울까? 심지어 살림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쉬운 건 없어. 공짜가 없듯이. 단, 이 말은 해주고 싶어.

‘너무 꼭대기만 바라보지 말라’고. 모든 사람이 다 톱이 될 순 없어. 뮤지컬에선 홍지민이란 배우가 톱클래스지. 전체 연예인에서도 그럴까? 그렇다고 내 삶이 분하고 억울한가? 그렇지 않아, 좋아. 당연히 꼭대기를 봐야지. 하지만 중간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정상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아. 처음부터 위만 보면 힘들고 지쳐서 못 가.



과정 역시 너무 힘들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흔히 ‘고통을 참아야 얻는 게 있다’고 말하잖아? 내 생각엔 고통을 없애야 해. 힘든 걸 무조건 참고 견디면 다치고 부러져. 즐길 수 있는 장치들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지. 올라가면서 꽃도 보고 단풍도 보고 흙냄새도 맡다 보면 어느새 정상인 거야. 내 주위에 잘된 사람들을 보면 ‘하다 보니 여기까지’인 경우가 많아. 가끔 ‘이런 마인드로 20대를 보냈다면 얼마나 멋지게 살았을까’를 생각하곤 해. 여러분도 경험하게 될 거야.
쿨한 언니의 따뜻하고 당당한 외침 “청춘의 고통 즐기라고? 아예 없애버려!”
아는 만큼 보인다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재능이 부족한 것 같아 고민이에요.

이런 질문 특히 많이 받아.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뭘까? 돈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지. ‘아웃라이어’란 책을 보면 프로가 되기 위해선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당연한 것 같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지. 하루에 3시간씩 10년 동안 노력하면 그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는 프로가 된다고 해.

재능이 없다 생각한다면 내게 필요한 재능을 구체적으로 체크해봐. 그리고 제대로 된 연습방법을 찾아 10년간 매진해. 30대 초반의 넌 벌써 프로가 돼 있을 거야. PD가 되고 싶다고? 그럼 공부하고 연습을 해. 요즘은 매체가 너무 발전해서 맘만 먹으면 어떤 공부라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생각만 했지, 뛰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아. 내 주위에서도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심지어 마사지숍 원장님까지도. 하지만 거기서 끝이지. 난 거기서 나아가 실제로 행동한 거고. 지금도 매일 트레이닝해. 더 잘하고 싶으니까.



연습하고 공부하는 방법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좋은 질문이야. 자기 길을 찾았으면 헛짓하는 데 시간 쓰지 말고 제대로 연습해야 해. 열심히 하는 걸 넘어 제대로 해야지. ‘드림걸즈’ 할 때 커버를 하던 후배가 있었어. 진짜 열심히는 하는데 다음 날 안무 나가면 걔만 틀리는 거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너무 신기해서 연습하는 걸 며칠 지켜봤지. 엉터리로 연습하고 있더라고. 틀린 걸 틀린 대로 계속 반복하는 거야. 누가 잡아주지도 않고 자세 교정도 하지 않고. 혼자 틀리고, 혼자 열심히 하고. 붙잡아 세워놓고 차근차근 끊어서 하나씩 바로잡았어. 결국 성공했지.

나도 노래 잘 부르기 위해 클래식 발성책 보고, 심지어 해부학까지 공부했어. 요즘도 새로운 보컬 이론이 나오면 찾아가 배워. 내가 레슨하기도 하지만, 보컬 선생님께 1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배우기도 하지.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 그러다 보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알게 돼. 아는 만큼 보이는 거야.
쿨한 언니의 따뜻하고 당당한 외침 “청춘의 고통 즐기라고? 아예 없애버려!”
누구에게나 시행착오는 있어

쿨하고 당당한 이미지가 보기 좋으세요. 그런 모습이 부족해 고민인데, 천성이신가요?

따로 연습을 하는 건 아니야.(웃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건 ‘내가 해보니 이렇더라’는 확신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야. 난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만 힘주어 말해. 그렇다고 무조건 크게 말한다고 카리스마를 가질 순 없어. 목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내공이 쌓이면 고수들은 그를 알아보지.

진짜로 속이 꽉 차 있다면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연기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보다 속삭이는 게 더 무서운 것처럼. 지금 내 보컬 선생님도 10년 만에 다시 찾아간 케이스야. 나도 10년 만에 진짜 고수를 알아본 거지. 의외로 이런 경우 정말 많아. 대신 내가 알아야 보이는 거지.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야. 책도 많고 선생님도 많지만 그만큼 가짜도 많아. 그걸 선별하는 눈을 길러야 해. 가짜와 놀다 보면 깨지고 박살나게 돼 있어.



깨지고 박살나는 게 두렵진 않으세요?

난들 시행착오가 없겠니. 지금도 고민거리가 산더미인데. 사무실 식구들끼리 자주 하는 얘기가 있어. ‘아님 말고!’ 가보고 아니면 다시 한 번 해보면 되지 않을까? 재미있는 애기 들려줄게. 2009년 뮤지컬 ‘드림걸즈’ 때야. 오디션을 봐서 캐스팅됐는데 실제로는 그때가 내 배우 인생 중 최악이었어.

노래도 안 되고 감정도 살지 않고. ‘여기가 내 한계구나’ 생각하며 매일 울었지. 공연 직전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헨리 크리거(드림걸즈 OST를 만든 세계적 작곡가) 할아버지가 부르더니 “전 세계에서 잘나가는 디바들과 작업해봤지만 네가 부르는 에피(극중 이름)가 제일 사랑스럽다”는 거야. 눈물을 펑펑 흘렸어. 그다음부턴 날아다녔지. 자신감이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놓은 거야. 그렇게 데뷔 13년 만에 여우주연상도 받고.

트로피를 들고 미국에 가서 헨리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어. 레스토랑 테이블에서 뭔가를 꺼내 쓱 내미는 거야. CD였지. “곡 하나 써주면 안 돼”라는 2년 전 애교를 잊지 않으셨던 거야. “뭐 하게”라고 묻는 할아버지에게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얘기했어. “드림걸즈의 에피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제목이 ‘빅걸’이지 뭐야)라며 맘에 안 들면 얘기하라”는 거야. 실제로 들어보니 별로더군. 그래서 “한 곡 더 달라”고 말했어. 그렇게 곡을 하나 더 받았는데, 정말 죽여줘. 싱글로 낼 거야.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물어. “어떻게 그렇게 세계적인 작곡가에게 곡을 받았느냐”고. 진심을 다해 말했을 뿐이야. 거절당하면 어때? 그렇다고 내가 손해 보나? 그럼 다른 사람들은 왜 얘기 못할까? 두려움! 거절당할 것 같은 두려움! 나쁜 목적, 불순한 목표가 있었다면 거절당할 확률도 높아지지. 만약 진심을 몰라준다면? 그럼 그 사람 안 보면 되는 거야.
쿨한 언니의 따뜻하고 당당한 외침 “청춘의 고통 즐기라고? 아예 없애버려!”
진실함으로 다가가렴!

말은 쉽지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요.

진심이니까, 욕심이 없으니까. 돈을 벌겠단 욕심으로 노래 달라고 접근한 게 아니잖아. 내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에너지, 내가 발견한 가능성. 그런 메시지를 다른 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뿐이었지. 그런데 우린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많이 재.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하지 않아. 무시당할까 봐. 그것도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지. 나? 정말 무식해.(웃음) 컴퓨터도, 영어도 잘 몰라. 그렇다고 창피할까? 아니야. 적어도 내 분야에선 최고니까.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도 없어.



주위의 평가, 시선을 엄청 신경 쓰는 편이에요. 언니는 쿨하게 넘기실 것 같아요.

나 엄청 예민해. 어떤 청탁이든 거절하지 못해 끙끙대는 게 나야. 사실 이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 상대의 마음 다치지 않게 거절하는 방법을 배울까도 생각 중이야. 나와 작업하는 사람 모두, 스태프 한 명에게도 사랑받고픈 욕심 때문이지. 집에서도 그래. 일하면서 살림까지 완벽히 챙기려니 너무 피곤해. 결혼식 축가 부탁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런데 하나는 있어. 내가 상대방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은 비즈니스야. 반대로 억지로 일하면 결국엔 들키고,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걸 알게 되면 상대와 계속 어긋나기만 하지.

함께 일할 사람 중에 비양심적·비도덕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야. 그렇지 않은 사람과만 비즈니스하면 돼. 대신 예의는 지켜야 돼. “너 완전 싫어, 꺼져!” 할 순 없잖아? 정중하게 거절해야지. 좋은 사람들과는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지. 대신 좋은 사람과 일에는 티를 팍팍 내라고! 그리고 일단 하기로 한 일은 열심히 해야 해. 투덜거리지 말고!



글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