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의 갈채를 받는 꿈의 직업,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남몰래 흘린 눈물의 양은 겪어보지 않고는 쉽게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로 발버둥치고 있는 백조의 비밀, 그들의 생활을 상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기자가 일일 동행 취재를 제안했다. 첫 번째 순서는 증권가의 꽃 ‘애널리스트’다.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여의도 유진투자증권의 본사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 기업분석팀과 매크로팀이 위치한 11층 사무실로 들어서니 회의를 준비하는 RA(리서치 어시스턴트)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모닝 미팅 시작하겠습니다.”

7시 30분. 변준호 기업분석 팀장의 말에 사무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30여명의 직원들이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한쪽 테이블에 가지런히 쌓여 있던 각종 보고서들은 금세 바닥이 났다. 회의실 한쪽 벽면 스크린엔 주요 종목 주가 그래프가 나타났다. 이날 첫 일과의 시작이다.

“유통 담당 김미연입니다. 9월 유통업체 실적이 나왔습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여성 애널리스트가 나와 설명을 시작했다.

“9월 대형 마트 매출은 6개월 만에 성장세를 기록했는데요, 7월에 -8.2, 8월에 -3.3, 9월에 +0.3으로 숫자는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는 걸로 보이지만 7월 둘째·넷째 일요일에 전국 점포가 휴무였고 9월엔 상당 부문 점포들이 휴무를 안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입니다. 11월 지나서는 다시 의무휴업 점포수가 확대됨에 따라 대형 마트는 보수적인 전략을 유지합니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RA들의 메모하는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업분석팀에서 매일 아침 개최하는 ‘모닝 미팅’은 전국 지점에 사내 방송을 통해 전해진다. 회의에서 발표되는 내용이 직원들의 영업에 바로 활용되는 것이다.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섹터별 보고를 모두 듣고서 모닝 미팅은 마무리됐다. 회의실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 있다.

“간단히 요기 하실래요?”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건네는 이는 17년차 애널리스트 김미연 부장이다. 이른 출근 시간 때문에 아침을 챙겨 먹을 여유가 없어 대부분 식사는 회사에서 간단히 해결한단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책상마다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식빵과 콘프레이크, 커피 등 먹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각종 비타민, 기능성 방석이나 무릎담요, 최신식 키보드나 마우스도 야근이 많은 애널리스트와 RA들이 애용하는 ‘핫 아이템’이라고.

“10월은 각 기업의 실적 발표가 이어지는 ‘어닝 시즌’이에요. 연중 가장 바쁜 시기죠.”
김 부장은 담당하는 산업과 기업에 대해 실적과 뉴스를 분석해 주가 전망 및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애널리스트의 주 업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통·교육·제지 섹터를 책임지고 있는데 담당하는 기업만 10~15개에 달한다.

연간 네 차례씩 기업 실적이 나오면 ‘풀 리포트(Full Report)’로 불리는 20~100장 분량의 사업보고서와 기업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날의 주가 상황과 뉴스에 따라 시시때때로 짤막한 보고서도 발표한다. 시장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일인 만큼 시장의 흐름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퇴근했다가도 갑자기 중요한 뉴스가 터지면 한밤중에도 다시 회사에 나와야 하죠. 주말을 반납하는 일도 많고요.”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RA’는 전문가로 성장하는 인고의 과정

애널리스트들의 옆엔 항상 ‘RA(리서치 어시스턴트)’가 있다. 애널리스트를 도와 기업의 각종 실적 자료를 모으고 시장 뉴스 흐름을 살피는 일을 하는 그들은 입사 2~3년차의 젊은 연구원들. 시니어 애널리스트로 데뷔할 날을 기다리며 실력을 다지는 일종의 ‘연습생’ 신분이다.

그들에겐 하루하루가 인고의 시간이다. 매일 업데이트할 정보가 수없이 쏟아질 뿐 아니라 담당 애널리스트들의 곁에서 업무를 보조하고 스케줄을 조정하는 일까지 맡아해야 한다.

“하루에 거의 15시간을 함께 보내니까 어떻게 보면 부부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셈이죠.” 3년차 RA 장문수 연구원은 “RA로 일할 땐 선배와의 호흡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RA들은 선배 애널리스트를 보며 산업에 대한 시각을 키울 수 있고, 시니어 애널리스트들은 RA 덕분에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어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2~3년의 RA 생활을 거쳐 애널리스트가 되면 본격적인 ‘생존 경쟁’이 시작된다. 한 분야의 애널리스트 수는 수십 명에 달한다. 그 안에서 자신의 보고서를 ‘셀링’하기 위해서는 다른 애널리스트보다 차별화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널리스트들이 중요한 업무 기반으로 삼는 것이 기업 탐방. 자신이 담당하는 업체의 IR 담당자를 만나 기업 실적과 현황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다. 깊이 있는 분석의 근거를 찾아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똑같은 수치를 놓고서도 남다른 분석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해요. 저는 백화점 담당이기 때문에 백화점에 쇼핑하러 갈 때도 고객들 동선까지 파악하려고 하죠. 제가 담당하는 기업 재무제표를 화장실 벽에 붙여두고 외울 때도 있어요.”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김미연 부장의 이날 일정은 두 번의 세미나와 점심 미팅으로 구성됐다. 세미나는 펀드매니저들을 만나 자신이 담당한 분야의 동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 오전 10시에 세미나, 12시에 점심 미팅, 오후 2시 또 다른 세미나로 이어지는 강행군 속에서도 그는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OOO 주가가 왜 갑자기 올랐을까요?”
펀드매니저와 만난 자리에서 질문이 나오자마자 자료집을 펼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김 부장. 소매 유통시장의 성장률 도표에 대한 분석부터 기업의 내부 인사, 최근 히트 상품과 새로운 정책까지 산업 전반에 걸쳐 이야기가 오고갔다. 진지한 표정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동작, 당당함이 깃든 목소리는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는지 보여주는 지표였다.

단순한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애널리스트의 숙명이자 매력이다.

“애널리스트의 몸값이 높은 이유는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이 주어지죠.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잘못 분석했을 때 바로 돌아오는 뭇매도 직접 견뎌내야 하고요.” 김 부장은 “며칠만 쉬어도 트렌드에서 뒤처지기 때문에 휴가를 내기조차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밤샘하다 애 낳아도 이 일이 좋아”

야근이 잦은 환경에서 ‘여성 애널리스트’로 사는 것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문제다. 커리어가 절정을 향해가는 30대에 맞닥뜨리게 되는 결혼과 임신은 애널리스트라는 직업 종사자에겐 위기로 다가오기도 한다고.

“싸이가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임신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우스갯소리를 던진 그는 “일에 대한 욕심을 놓을 수 없어 임신했을 때도 이를 악물고 일했다”고 고백했다. “8개월 4주차에 밤샘하다가 119에 실려 가서 아기를 낳았다니까요. 그런데 아기를 낳으러 가는 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더라고요.”

그럼에도 애널리스트는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열심히 할수록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일이죠. 1인 기업처럼 자기 역량에 맞게 자리를 옮기며 몸값을 올릴 수도 있고요.”

기업이 발전해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점도 커다란 장점이라고. “계속 일하다보면 이 분야에서 ‘대표 선수’로 활동하는 느낌이 들어요. 또 쉽게 만나기 힘든 기업의 관리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지죠.”
[일일 동행 체험] 애널리스트 24시 “끝없는 경쟁 속에 집념으로 피는 꽃”
내로라하는 인재가 모인 애널리스트 사회에서 끝없이 경쟁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김 부장 역시 17년간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 “펀드매니저들이 선정한 ‘베스트 애널리스트’ 순위에 처음 올랐을 때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말할 정도다.

“연봉도 높고 자유로워 보이는 직업이지만 RA부터 시작해 애널리스트로 성공하는 경우는 5% 정도예요. 최고가 되더라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선 하루라도 더 뛰어야 하죠. 때로는 이 직업이 연예인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는 “일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론 하기 힘든 직업”이라고 못 박았다. “정말 이 일이 하고 싶다면 단시간에 성과를 내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요. 일을 배울 때만큼은 미련하게 접근해야죠. 포기하지 않으려면 자기만의 스트레스 관리법도 필요하고요. 가족들의 뒷받침도 정말 중요해요.”

세미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출근 9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내일 프레젠테이션이 두 군데서 있거든요. 자료 정리하고 나면 오늘도 밤 10시는 되어야 퇴근할 것 같네요.” 화장실에 다녀올 틈도 없다며 바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는 그를 뒤로한 채 사무실을 나왔다. 창밖으론 농익은 가을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의 업무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취재협조 유진투자증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