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록밴드는 배고프다. 몇몇 이름 있는 뮤지션을 제외하곤 ‘홍대 허름한 지하 연습실’ 같은 것이 머리 기른 이들에게 숙명과도 같이 따라오는 이미지다.

록음악의 본고장인 미국이나 영국의 슈퍼밴드 멤버들이 대저택과 술, 여자에 빠져 사는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흔히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라는 말을 쓰곤 한다. ‘백두산’의 김도균, ‘부활’의 김태원, ‘시나위’의 신대철을 가리키는 말이다. 1980년대 중반, 짧지만 가장 화려했던 한국 록밴드의 전성시대를 이끈 이들이다.

또래보다 수준 있고 뭘 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이들의 공연을 따라다니고 음악을 들어야 했던 게 당시 청춘들의 문화였다.

하지만 지금의 ‘빅뱅’ 못지않았던 인기는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댄스와 힙합, 달착지근한 발라드에 밀린 록음악은 1990년대 들며 급격히 설자리를 잃었고, 밴드 멤버들은 마치 연극판의 배우들이 배곯아하듯 다시금 무관심과 생활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3대 기타리스트의 맏형 격인 김도균 역시 그랬다.
[나의 꿈 나의 길] 기타리스트 김도균, 한국 록 황금기 다시 이끌 노장의 귀환
약력
1965년 대구 출생
1985년 밴드 ‘백두산’ 기타리스트
1986년 백두산 1집 ‘Too Fast! Too Loud! Too Heavy!’로 데뷔
1989년 밴드 ‘사랑(SARANG)’ 조직해 영국 활동
1990년 밴드 ‘아시아나’ 기타리스트
1999년 밴드 ‘김도균그룹’ 기타리스트
2009년 밴드 ‘백두산’ 재결성해 기타리스트(현)


“‘톱밴드’ 출연 이후요? 길을 못 걸어다닐 정도예요. 정말 놀랐던 건 예능에 출연했을 때였죠. 전 국민이 보는 프로에 머리 길고 가죽바지를 입고 나가면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방송도 혼자 마음 졸이며 봤고요. 그런데 주위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1980년대만 해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백이면 백 모두 쳐다봤어요. ‘남자야 여자야’ 하면서. ‘이제는 이 정도 외모나 문화가 대중에게 흡수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된 계기예요. 30년이 걸렸네요.”


최고 기타리스트에서 최고 멘토로

현재 시즌 2가 방송되고 있는 ‘톱밴드’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배고파하는 밴드들을 공중파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프로그램이다. 아이돌과 댄스 일색인 주류 가요계 속에서 소외돼 있던 밴드들은 음악적 순수함과 열정을 보여주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나름의 마니아층까지 형성하고 있다.

더불어 경연에 참가한 밴드의 음악을 듣고, 심사하고, 직접 나서 가르침을 전수하는 멘토들도 밴드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도균 역시 온화한 미소와 자상한 가르침으로 ‘보살미소’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새삼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30년 만이다.

1985년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으로 정식 데뷔한 후, 불꽃같은 한때를 제외하곤 그의 음악 인생은 인기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묵묵히 자신만의 음악과 기타에 빠져 살아온 세월이 30여 년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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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활동도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도 ‘그러려니’ 했어요. 음악적인 전력 질주를 멈추고 그동안 달려왔던 거리의 반지름을 측정했던 시기라고 할까요. 돌파구를 찾으려 하다 대마초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요.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잠시 쉬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죠.”

배고픈 로커의 길은 따지고 보면 고향 대구의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 시간에 배운 리코더를 또래보다 제법 잘 불었고, 리코더 합주반에 들어가 대회에도 나갔던 것이 그가 생각하는 음악 인생의 첫 경험이다.

“합주단에서 배운 연주곡은 동요 수준이 아니었어요. 헨리 퍼셀, 바흐, 헨델 같은 바로크의 명곡들이었죠. 어린 나이에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체험하면서 르네상스적인 요소에 눈을 떴다고 할까요. 그때부터 조금씩 ‘음악과 나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던 듯해요. 리코더 합주단 말고도 어린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며 콘트라베이스와 큰북을 다뤘어요. 음악적인 마음이 열리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음악을 좋아했던 평범한 아이가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생소한 서양 음악인 록에 빠져든 건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경북대 보컬그룹 연습실에 가보면 재밌다더라”는 친구의 말. 호기심에 따라갔던 곳에서 처음 들은 음악은 세포 하나하나가 감전된 듯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딥 퍼플(Deep Purple)의 ‘Child in Time’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키스(KISS) 같은 밴드의 음악도 들었고요. 그전의 삶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때부터 록음악에 빠져 살기 시작했죠.”

부모님을 졸라 당시 돈 4만 원을 주고 전기기타를 샀다. 친구 세 명과 ‘중성자’란 이름의 밴드도 조직했다. 청소년잡지 과학 코너에서 봤던 말로 ‘괜히 멋있어 보여서’가 밴드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 방음이 될 리 없는 친구집 지하실에서 온 동네가 떠나가라 연주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했다. 사달이 난 건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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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기타 하나 메고 상경하다

“1학년을 마치고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음악을 좀 좋아하나 보다’ 하셨던 부모님이 난리가 났죠. 학교 다니기 싫다,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얘기를 1학년 때부터 슬슬 흘리다가 2학년 돼서는 아예 나가지 않았어요. 그렇게 일주일 정도 되니 집으로 연락이 간 거예요. 옷 두 벌에 기타 하나 들고 산으로 가 하루 종일 연습하다 내려오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교복 입고 머리 깎는 데서부터 거부감을 느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들어 더 심해진 거죠.”

제대로 된 기타 교본도 없던 시절. 일본 교본을 주문하고, 미국 음악잡지와 태블러추어 악보를 어렵게 구해 연습했다. 처음 기타를 사 학원에서 한 달간 C코드를 잡을 때까지 배운 것이 교습의 전부.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기타 실력은 오로지 독학으로 얻은 결과다.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18세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겨우겨우 하숙할 정도의 돈과 기타 한 대가 가진 것의 전부. 당시 기타와 밴드 뮤지션들의 메카였던 낙원상가부터 찾았다. 일자리를 구하는 연주자들이 상가에 모이면 악기 가게 주인이 아는 뮤지션들을 조직해 나이트클럽 등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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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세 때까지 나이트클럽 반주자 생활이 이어졌다. 20세가 되던 해 신중현 선생이 이태원에 ‘라이브클럽’을 열면서 그의 인생도 바뀌기 시작한다. 소문을 듣고 놀러간 자리에서 안면 있는 선배들이 ‘한번 쳐봐라’고 주문해 무대에 올랐고, 연주를 들은 클럽 관계자들에게서 ‘내일부터 나와 연주하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트클럽 생활을 하면서도 퇴근해서 연습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어요. 19살 겨울에는 설악산에 민박을 얻어놓고 두 달간 하드트레이닝을 하기도 했죠. 가지고 들어갔던 피크 두 봉지가 모두 닳아 없어졌을 정도였어요.”

대단한 젊은 연주자가 등장했다는 소문은 당시 메이저 레이블 중 하나인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작곡가로 활동 중이던 유현상의 귀에도 들어갔다. 레코드사 사장과 함께 클럽을 찾은 유현상은 연주가 끝나자마자 무대로 올라와 콜라를 먹이는 정성으로 스카우트에 나섰다.

“당시 관객으로 오거나 오디션을 보러 왔던 친구들이 지금 한국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주역이에요. 새로운 세대의 출발점이었죠. 숙명여대 앞에서 디제이를 하면서 자주 놀러왔던 친구가 임재범이었고, 김종서가 보컬로 있을 때의 부활이 오디션을 보러 왔었죠. 신중현 선생님이 ‘내 아들인데 기타를 친다’며 소개했던 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신대철이고요.”

매일 밤 계속되는 라이브 공연. 보컬까지 소화하느라 진이 빠져 있던 차에 ‘앨범을 내고 데뷔시켜 주겠다’는 약속은 꿈같은 일이었다. 레코드사의 녹음실을 연습실로 쓰는 호강을 누리며 탄생한 밴드가 바로 백두산이다. 1985년 당시의 대세는 헤비메탈이었다. 첫 헤비메탈 앨범을 시나위가 냈고, 뒤를 이어 백두산이, 그 다음 부활의 데뷔 앨범이 차례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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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우체부 아저씨들이 한 자루씩 팬레터를 가져다주고, 종이학 같은 선물도 엄청 받았죠. 어찌 보면 지금 아이돌의 토대가 당시의 록밴드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이태원 라이브클럽에서부터 새로운 흐름이 시작됐지만 1990년대 들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록음악이 대중과 기존 가요계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거죠.”

1989년 김도균은 무작정 영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18세 ‘상경’에 이은 또 한 번의 무모한 도전. 록음악의 본질을 보고 배우고 싶다는 욕망은 그를 런던으로 이끌었다. 외국 잡지에서나 보던 전설의 클럽에서 공연을 보며 그곳 뮤지션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다. 지역 잡지에서 기타리스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통해 ‘사랑(SARANG)’이라는 우리말 이름의 밴드도 조직했다.

“그쪽 발음으로는 ‘서랭’에 가까웠어요. 오히려 ‘록 냄새가 난다’며 좋아하더군요. 당시 영국인들은 오노 요코(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일본인 아내)나 딥 퍼플의 ‘우먼 인 도쿄’ 같은 노래 덕에 동양인에 대한 호감이 컸어요. 영국인 드럼과 베이스 주자를 확정하고 싱어를 고민하던 차에 임재범을 부른 거죠. 처음 이태원 클럽을 찾았을 때도 재범이는 눈에 확 띄었어요. 인상도 서구적이고 체구도 컸죠. 음악적으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며 뮤지션으로 자리 잡도록 도와주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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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밴드 멤버들이 살던 웨일스를 중심으로 클럽, 대학 아트센터 등에서 공연하며 1년 정도 활동했다. 하지만 본토 공략은 거기서 멈췄다. 임재범의 향수병이 지독했고, 일본의 세계적 록밴드 ‘라우드니스’의 조인트 공연 의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만든 밴드가 전설 속의 슈퍼밴드 ‘아시아나’다.

“라우드니스와 공연하려고 만든 밴드였어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았죠. 뮤지션으로서 세계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전력 질주했던 시기예요. 하지만 월드투어 조인트 공연은 흐지부지됐고 아시아나도 곧 해체됐어요. 그 후 영국에서 돌아온 걸 15년 동안이나 후회했죠. 지금 생각해도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거라 확신해요.”

아시아나는 당시 일본의 록음악 전문 잡지에 소개될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갖춘 밴드였다. ‘한국에도 드디어 슈퍼밴드가 출현했다’는 기사 내용답게 ‘Tomcat’ ‘Paradom’ 같은 곡은 요즘 들어도 세련된 한국 록음악사의 명곡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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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다섯, 다시 ‘백두산’으로

“몇 년에 한 번씩 ‘같이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전화는 왔어요. 그때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며 고사했죠. 그러다 지금 정도면 다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게 3년 전부터예요. 1980년대는 맥도날드도 들어오기 전이었어요. 지금 한국은 IT 강국이 되었죠. 이제 백두산 정도는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것조차도 조금 앞섰다는 느낌이 들지만요.(웃음)”

트로트 가수로 충격의 변신을 했던 리더(보컬) 유현상과 김도균을 중심으로 백두산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샤우팅과 금속성 강한 헤비메탈을 고수한다. 힙합과 일렉트로닉, 모던록이 장악한 시장에서 헤비메탈은 자칫 흘러간 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대로 가는 게 맞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에요. 영국의 3대 밴드라 불리는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데프 레퍼드 같은 밴드를 보세요. 키스도 그렇고요. 모두 팬들과 함께 늙어가는 거예요. 그 팬들이 나중에 자녀들의 손을 잡고 공연장에 오는 모습을 봅니다. 그게 바로 음악적·사회적으로 우리의 역할이죠. 후배들에겐 그들의 세대에 맞는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게 또 제 역할입니다. 톱밴드에 출연한 이유죠.”

아직도 아쉬운 음악 환경 역시 그가 해결하고픈 과제 중 하나다. 공연 장비와 멤버들의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이 됐지만, 근본적인 공연 시스템은 아직이라는 게 그의 생각.

“무대와 공연을 하나의 배라고 생각하면 함장, 부함장은 있는데 배 밑의 선원들은 약한 격이죠. 무대 위에서 정확한 소리가 나도록 잡아주는 시스템이 부족해요. 음향업체 사람이 아니라 밴드 음악을 아는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해요. 달랑 밴드 멤버들만 올라가서 공연하는 건 통신병, 위생병 없이 전투하는 것과 같아요.”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그에게 ‘음악인으로서 성공했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뱉은 대답은 ‘숙제’였다.

“요즘 와서 자꾸 맴도는 말이 ‘I have a dream’이에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말이죠. 사회적인 시각, 객관적인 의미에서는 성공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도 계속 숙제를 풀어가야 하는 길을 가고 있어요. 성공을 향해, 꿈을 향해 아직 걷고 있는 거죠. 소위 선진국에서는 록밴드가 돈을 제일 많이 버는 직업 중 하나예요. 한국에선 밴드 문화 자체의 기반이 너무 약하죠. 요즘 들어 비로소 그런 가능성의 흐름이 진행되는 것 같아요. 밴드가 하나의 잡(Job)으로 인식되는 단계로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제 임무죠.”


글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장소협찬 커핀그루나루 청담점(02-2202-0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