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
TV가 없던 시절, 집집마다 라디오도 귀한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극장’은 가던 걸음도 멈추게 하던 놀라운 힘이 있었다. ‘제5공화국’, ‘이수일과 심순애’의 대사 한마디를 놓칠 새라 귀를 쫑긋 세우며 하던 일도 멈춰 듣던 시절, 몇 번이고 들었던 똑같은 내용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웠던 라디오 극장이 2021년 끝자락에 부활했다. 밀리의 서재가 제작한 현대판 라디오 극장 ‘오디오 드라마’는 독자들에게 이미 검증받은 책을 드라마 타이즈로 각색해 선보이는 오디오 콘텐츠다. 영상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오디오 드라마로 독자들의 귀를 사로잡겠다는 김민경(33)오디오 콘텐츠 기획자를 만나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해 달라.“조금 생소하실 수도 오디오북으로 만들 책을 선정하는 일부터 회원들에게 서비스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책임지는 일이다. 밀리의 서재는 독서의 허들을 낮추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스타트업으로 책 읽기 어려운 이들에게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오디오 콘텐츠로 제작하고 일을 하고 있다.”
오디오 콘텐츠의 주요 타깃층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물리적으로 책을 읽기 어려운 사람들인가.
“책을 잘 안보는 분들이다. 독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 책은 읽고 싶은데 막상 책을 펴면 진도가 잘 안 나가는 분들이다. 더 나아가 몸이 불편해 책을 못 보는 분들도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오디오 콘텐츠 제작 시 어떤 부분이 중요한가.
“각색 없이 낭독하는 콘텐츠의 경우 어떤 사람이 읽느냐가 중요하다. 기획자는 어떤 이가 읽었을 때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가 있을지를 본다. 그래서 저자가 직접 하기도 하고, 셀러브리티(celebrity) 또는 성우가 맡기도 한다. 책의 내용에 따라 다르고 낭독자의 개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오디오 드라마, 베스트셀러 또는 인기 있는 책을 드라마로 각색한 콘텐츠···
2040세대를 타깃으로 제작“
최근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했다. 어떤 콘텐츠인지 소개해 달라.
“오디오 드라마는 베스트셀러나 인기 있는 작품을 드라마로 각색해 제작한 콘텐츠다.다들 예전 ‘라디오 극장’을 떠올리신다. 라디오 극장의 소비층이 연령대가 5060세대라면, 오디오 드라마는 2040세대가 대상이다.”
오디오 드라마의 제작과정은.
“우선 어떤 작품을 할지 IP확보를 하고, 제작사를 선정한다. 기획을 토대로 녹음과 섭외 등을 맡아줄 제작사가 선정되면 대본 각색 작업에 들어간다. 보통 원작자도 함께 참여하는데, 어떤 부분을 드라마화 할지를 정하고 대사 작업도 하게 된다. 각색이 마무리되면 성우, 배우 등을 섭외해 녹음을 진행하고, 후반작업에 들어간다.” 대본 각색 작업 시 원작의 내용 중 편집되는 부분도 있겠다.
“물론이다. 책 안에는 워낙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다보니 어떤 사건을 에피소드로 쓸지에 따라 등장인물이 달라진다. 때문에 필요에 따라 인물을 없애는 경우도 있다. 오디오드라마 첫 작품인 ‘놈의 기억’을 기획할 때도 사건의 큰 줄기를 토대로 에피소드를 구성했다.”
퇴고 작업도 오래 걸렸을 것 같다.
“‘놈의 기억’이 1,2권으로 나눠져 있어 각 권 마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선정했다. 적어도 네다섯 번 이상 고친 것 같다. 이 내용이 왜 없어져야 하는지, 반대로 왜 이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읽는 것과 듣는 것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대사 톤도 많이 고쳐야 했다. 거의 작업 기간 동안에는 대본을 내내 달고 살았다.”
오디오 드라마의 첫 작품이 ‘놈의 기억’이다. 선정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후보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해외 작품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작가나 출판사와 소통의 문제가 있었다. 그 중 ‘놈의 기억’은 네이버에서 주최한 ‘지상최대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이었다. 스릴러 장르인 이 작품은 몰입도가 뛰어나고, 전개가 흥미진진해 드라마로 제작해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오디오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출판사나 원작자의 반응은 어땠나.
“첫 반응은 ‘그게 뭐죠’였다.(웃음) 아무래도 오디오 드라마가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생소한 반응이었다. 책을 읽어주는 오디오 콘텐츠에 효과음이 들어가는 정도라고 생각하셨는데, 실제 나온 걸 보곤 아주 만족해 하셨다. 작가님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는 반응이셔서 작업할 때 도움이 많이 됐다.”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아무래도 첫 작업이다 보니 예산이 가장 고민거리였다. 러닝타임 15분, 10부작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넘쳐 애를 먹었었다. 작품의 퀄리티와 예산, 그리고 코로나19로 모이는 것도 쉽지 않아 여러 가지를 체크해야 했다. 그게 기획자의 역할이기도 하니까. 한번은 아주 미세한 부분으로 재녹음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만드는 사람 아닌 이상 잘 모르는 부분이었을텐데, 내내 마음이 걸리더라. 그래서 재녹음 일정을 잡았는데, 배역을 맡은 성우가 녹음 당일 코로나19 밀접접촉자로 분류돼 결국 재녹음을 하지 못한 적도 있다.” 밀리의 서재 내부 반응은 어땠나.
“완성된 이후 팀에 공유했을 때 다들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재미있어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일까라는 의구심이 컸는데, 재미있다는 반응을 듣곤 긴장이 풀렸다.(웃음)”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명의 성우들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는 멀티캐스팅과 풍부한 음향효과를 넣은 ‘완독 오디오북’에 대한 이용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7~8시간에 달하다 보니 끝까지 듣는 걸 어려워하시더라. 그래서 좀 더 쉽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게 됐다.”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는 커뮤니케이터···제작사, 작가, 성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잘 소통하며 이끌어 가야하는 역할”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가 갖춰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커뮤니케이션을 꼽고 싶다. 개인적으로 쓴소리를 즐겨하는 편은 아닌데, 작업할 땐 부캐를 뒤집어쓰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는 걱정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닌 부분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라는 대안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작PD 출신이다. 어떤 드라마들을 작업했나.
“첫 작품이 '후아유(tvN)‘였다. 이후 ‘시그널(tvN)’, ‘판타스틱(JTBC)’, ‘오늘부터 사랑해(KBS) 등의 드라마에 제작PD로 참여했다. 대학 때부터 교양PD가 되고 싶어 언론고시를 준비했는데, 결과는 잘 안됐다. 낙방을 반복하다가 제작사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제작PD는 어떤 일을 하나.
“쉽게 말해, 살림을 맡아서 하는 역할이다.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전 기획 단계부터 작가·촬영팀 섭외, 방송국 제안 등 아이템 발굴부터 대본 작업, 촬영, 후반작업 등 예산을 짜 모든 부분을 진행한다.”
PD에서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로 이직한 이유가 있나.
“PD로 근무하면서 방송된 드라마보다 그렇지 못한 작품들이 더 많다. 드라마 작가와 기획만 하다 무산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한 3년 정도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내 안의 에너지가 많이 소진됐던 것 같았다. 전공이 국문학이라 평소 책을 좋아했다. PD시절에도 TV보다 책을 더 많이 읽을 정도였으니까. 밀리의 서재 채용공고를 보고 왠지 나와 잘 맞을 것 같았다.”
스타트업(밀리의 서재)과 방송국·프로덕션의 업무 스타일이 많이 다를 것 같다.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 프로덕션이나 방송국은 밤낮없이 바쁘다가도 드라마가 끝나면 약간의 휴식기가 있다. 업무가 프로젝트별로 나눠지다 보니 업무의 업-다운이 있는 반면, 밀리의 서재는 루틴하다. 특히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는 매주, 매달 나와야 하는 오디오 콘텐츠가 있어 꾸준한 컨디션 관리가 필요하다. 스타트업의 특징이라면 한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어떤 목표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계획해 시작한다. 스스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일할지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업무 방식이 개인적으로 긍정적 자극이 많이 됐다.”
PD경력이 어떤 도움이 되나.
“물론이다. 아무래도 구성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PD나 기획자의 공통분모다. 드라마 제작PD로 일했던 경험이 오디오 드라마화 되는 작품을 고르거나 각색하는 부분에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원작에서 어떤 서사를 이끌어낼지, 그리고 현장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그림을 그려나갈지 구상하는 것들도 경험을 살릴 수 있었다.”
일하면서 보람됐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나.
“첫 오디오 드라마가 나오고 구독자들 사이에서 이슈가 됐었다. ‘영화같다’, ‘재미있다’는 리뷰가 많았는데, 그 중 ‘시즌2 듣고 싶다, 제작해달라’는 리뷰를 받았을 때 기분이 좋더라. 나중에는 우리만의 IP로 제작할 수도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일하고 있다.”
“오디오 드라마를 글로벌 콘텐츠로 키워 해외 유명 배우 섭외하는 ’즐거운 상상‘도···
유튜브 등 영상콘텐츠 범람 속 틈새시장 공략“
즐거운 상상은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상상하나 해본다면.
“요즘 팀에서 주로 하는 이야기가 정말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상상을 공유하는 건데, 오디오 드라마로 오스카 시상식에서 수상한다거나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 하자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늘어놓는다.(웃음)”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의 비전은 어떻게 바라보나.
“앞으로의 콘텐츠 시장은 시간 싸움일 것 같다. 요즘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를 많이들 보는데, 영상을 볼 수 없는 상황 또는 시간대가 있다. 그런 일상 순간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오디오 콘텐츠를 꾸준히 제공한다면 앞으로의 시장은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오디오 콘텐츠 기획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콘텐츠 기획은 다양한 아이템과 접목이 필요하다. 오디오 콘텐츠에만 집중하기보다 폭넓은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구독 서비스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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