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의료통역사

△이진주 의료통역사.
△이진주 의료통역사.
“처음엔 꼬불꼬불하고 이상하게 생긴 글씨가 너무 부담스러워 그 책을 만지기도 싫었어요. 과연 ‘내가 아랍어를 좋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는데, 유학을 가고 아랍문화를 체험하면서 완전 푹 빠졌죠.(웃음)”

사람은 좋아하는 걸 닮아간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반려동물, 취미도 마찬가지다. 오래 마주하다보면 점점 그것과 닮아가는 현상은 당연해 보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언뜻 보면 실크로드를 건너 온 외국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구적인 외모의 이진주(30) 씨도 그렇지 않았을까. 우연한 기회로 아랍어를 전공으로 선택한 그녀는 아랍권 특유의 문화와 정(情)에 푹 빠져 의료통역사라는 직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아랍인들의 깊은 눈망울을 닮은 이 씨에게 의료통역사의 세계를 들어봤다.

의료통역사는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
“의료통역사라고 하면 진료실 안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의료적 소통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현장에서는 아주 다양한 일들을 하는 직업이다. 외국인 환자가 병원 앞에서부터 진료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까지 함께 동반하는 직업이다. 물론, 의료통역사 중에서는 단순히 통역만 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게 문진표 작성, 수납, 검사 동의서, 진료실 통역, 검사, 입·퇴원 수속, 진료통역 일지 등 환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맡아서 하고 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의료통역사는 낯선 타국의 병원에 있는 외국인들의 가장 친한 친구다.”

하이메디에서 의료통역사로 근무 중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나.
“하이메디는 외국인 환자들이 한국의 의료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업이다. 현재 중동, 몽골, 러시아 등의 환자 유치를 하는데, 저는 중동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의료 통역뿐만 아니라 원격진료 서비스 통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19로 한국에 오지 못하는 중동 환자들이 비대면 화상 플랫폼을 통해 1차 진료를 볼 수 있도록 가이드 해주고 있다.”


‘아랍인들을 위한 유튜브 채널 개설, 7개월 만에 10만 명 구독자 달성’
한국인들이 본 아랍문화에 대한 반응, 현지인들에게 인기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뒤로 외국인 환자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회사에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시작하게 됐다. 채널명이 ‘hikuri'이다. 중동인들을 위한 채널이고, 구독자 99%가 중동 분들이다. 2020년 7월에 개설해 7개월 만에 10만 명 구독자를 모았다. 현재는 15만 명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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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는 어떤 주제의 영상을 담고 있나.
“처음엔 중동 음식이나 음악, 뮤직비디오를 본 한국 사람들의 반응을 담았는데 의외로 호응이 좋더라. 그러다 한 에피소드가 100만 뷰를 찍으면서 급성장하게 됐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업로드를 하면서 운영 중이다.”

채널을 운영하다보면 기억나는 댓글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이집트 등 아랍권 나라에서 구독을 많이 하는데, ‘아랍은 좋아해 줘서 고마워’, ‘한국 문화를 알고 싶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 ‘너희 때문에 한국에 가보고 싶어’ 등의 댓글을 보면 뿌듯하다.”
△이진주 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hikuri'.
△이진주 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hikuri'.
의료통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2017년에 하이메디에 입사했다. 당시 맡은 업무는 중동에서 온 환자들의 컨시어지(concierge)서비스를 제공하고 통역하는 일이었다. 배우면서 일하다 보니 의료통역에도 관심이 생기더라. 지금은 역량을 쌓아 아랍어 의료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의료통역사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2015년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의료통역사 예비 양성 과정에 참여했다. 또 2019년 아랍어 의료통역 전문가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는 예비과정은 진행하지 않고 아랍어 의료통역 전문가 과정만 실시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면접 후 합격자에 한 해 과정을 들을 수 있고, 언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병원 시스템, 의료 법률, 문화, 진료과별 의학 상식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전반적인 의료분야를 들을 수 있다. 매주 토요일 8시간씩 6개월 간 출석해야 하고, 영어 의료용어 시험, 아랍어 필기 및 회화 시험을 통과해야 수료 가능하다.

아랍어를 전공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어를 사용하면서 일하는 어른들이 멋있어 보였다. 막연하게나마 나중에 커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직업을 가져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처음엔 당시 일본에 거주 중이었던 사촌 언니를 따라 일본어를 전공하려고 했었는데, 당시 한창 중동이 오일 머니로 뉴스에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희소성이 있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사촌 언니의 추천에 아랍어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됐다.”
△이진주 씨가 아랍어를 공부한 전공책.
△이진주 씨가 아랍어를 공부한 전공책.
“시리아, 요르단 어학연수를 계기로 아랍권 문화에 푹 빠져
K-POP 영향으로 한국인들 인기 많아, 한국과 비슷한 정(情) 문화 있어“
의료통역사, 환자와 친밀감 만드는 ‘라포형성(Rapport building)’ 중요해
한국 병원 방문한 아랍인들, ‘3분 진료’에 가장 놀라



희소성이 있는 언어라 배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공부했나.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그 해인 2010년 시리아, 2014년 요르단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중간에 2012년 바레인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잠시 일을 하면서 중동에서의 생활이 나와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아랍인들이 의외로 정이 많다. 특히 당시엔 K-POP이 뜨고 있는 시기여서 한국인들이 인기가 많은 시절이었다. 아랍인들이 친구하자며 잘 대해줘 더 호감이 컸던 것 같다.(웃음)”

의료통역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면 무엇인가.
“의료통역사는 환자와 보호자를 직접 만나 일을 하는 직업이라 이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을 ‘라포형성(Rapport building)’이라고 하는데, ‘라포’의 사전적 의미는 의사소통에서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또는 신뢰관계를 말한다. 보통 병원에서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을 ‘라포를 형성하다’라고 한다. 통역사 역시 환자나 가족과의 라포가 형성되면 문제가 발생돼도 쉽게 해결된다. 이 라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사교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교성은 의료통역사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가 중요하다. 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 그들이 쓰는 단어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스테로이드를 많이 쓰는데 아랍에서는 코르티졸로 사용한다. 아랍어라 하더라도 각 나라별 사투리가 있어 통역 전에 환자의 국적과 쓰는 사투리를 미리 알아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다. 중동의 문화는 한 명이 진료를 받기 위해 대단위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평균 4명에서 많게는 10명의 가족들이 한국으로 온다. 한국문화를 모르는 상황에서 요청사항이 많을 수밖에 없어 조율을 잘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랍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는 문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처음 한국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이 ‘3분 진료’에 대해 많이 놀라신다. 환자나 가족들은 담당의와 면담을 원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빨리빨리 진행되는 진료에 대해 미리 설명을 드리곤 한다. 예전에 여성 환자가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히잡을 쓰지 않고 입원실에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셔서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슬림 여성들은 히잡을 쓰지 않는 모습을 가족 외 남성에서 보이면 안 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처음엔 서로 당황해 하셨다. 지금은 아랍 환자가 많아져서 의사선생님들도 노크를 먼저 한 뒤 히잡 쓸 시간을 드리곤 한다.”
생명 위해 이역만리 한국으로 날아 온 아랍인들의 ‘찐’ 친구 [강홍민의 굿잡]
“예민한 상태의 외국인 환자들과 함께하는 직업이라 스트레스 있지만
오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보람된 직업”



의료통역사로서 보람된 적도 많았을 것 같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직업이라 굉장히 고된 직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도울 수 있는 감사한 직업이다. 저희 어머니와 동갑이셨던 분이 암을 치료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다. 처음 저와 마주했을 때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 눈물을 글썽이며 첫 진료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이 완치돼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고 나서 축하하는 종을 울릴 때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SNS로 안부를 주고받는데, 늘 아랍에미리트에 오면 꼭 우리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신다. 이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친구가 생겼다.(웃음)”

의료통역사의 직업적 장단점을 꼽는다면.
“장점은 일을 통해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분야라는 점이다. 그리고 의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의학 지식 쌓인다. 반면 단점은 몸과 마음이 지쳐 예민한 상태에 있는 외국인 환자와 보호자를 응대하는 일이라 초반에는 스트레스가 높은 편이다. 장점이자 단점을 꼽는다면 언어 외적으로 공부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의료 상식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의료통역사의 연봉은 어느 정도인가.
“통역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저는 시간당 6만 원 정도 받는다.”

의료통역사로서 앞으로의 비전은 어떨 것 같나.
“최근 들어 원격 진료를 많이 하고 있는 추세이고, 해외 환자들의 니즈도 많아 앞으로 의료통역사의 수요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더군다나 K-의료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긍정적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의료 통역을 열심히 하면서 유튜브, 기획 등 다른 분야에도 욕심이 있다. 영역을 넓혀가면서 새로운 분야를 접해보고 싶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