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연탄쪽갈비에 묻힌 나의 벚꽃 연애기

“날 누나라 부르던 너, 잘 지내니?” [유복치의 솔로탈출 연대기]
[한경잡앤조이=유복치] “지금 신도림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한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지하철을 다섯 번이나 그냥 보낼 동안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앙다문 입술이 열릴락 말랑하다 이내 굳게 닫혔다. 갈 길 잃은 시선이 바닥에 꽂혔다. 하필이면 흰 바지를 입은 날이었다. 정강이 쪽에 떨어진 쌈장 자국이 도드라졌다. 여섯 번째 지하철이 막 선로로 들어올 때 녀석이 입을 뗐다. “누나, 근데 우리는 때를 놓친 것 같아요. 누나도 알고 있죠?

녀석을 만난 건 어느 학원에서였다. 서술형 답안지를 작성하고 다 같이 돌려보는 수업이었다. 어느날은 답안지를 쓰는데 앞자리에 자꾸만 눈이 갔다. 누군가 검은색 유광 단화에 새하얀 양말을 신고 왔는데, 발모가지가 댕강 드러나는 바지를 입었다. 고개를 들어 신발 주인을 봤는데, 그 녀석이었다. 새끼손가락 치켜 올린 채 옆머리를 귀에 꽂는 모습이 고독한 히피 예술가스러웠다.

답안지는 그 녀석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다. 글의 행간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궤적과 가치관과 취향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어 섣불리 가타부타를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 녀석의 것은 누가 봐도 무릎을 탁 칠 만큼 돋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강의실 뒷자리에서 매주 한 칸씩 옮겨왔다. 그 녀석 등에 자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바로 뒷자리까지 이끌려 온 날, 그가 뒤를 돌아봤다. “누나, 오늘 답안지 좋던데요. 오늘 뒤풀이 갈 거죠?”

그 녀석과 친해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나였다. 당연히 참석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취기가 빠르게 올랐고, 친해질 겨를도 없이 뒤풀이장을 몰래 빠져나와야 했다. 갈 지(之)자를 그리며 집으로 가는 중에 익숙한 조합이 눈에 들어왔다. 검정 유광 단화와 흰 양말, 그 녀석이었다.

“누나… 일찍 나왔네요. 왜 그렇게 땅만 보고 걸어요. 저기 좀 봐요. 벚꽃이 예쁘게 피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벚꽃잎이 그 녀석 콧망울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도. 녀석은 손등으로 무심하게 제 코에 묻은 벚꽃을 털어내더니 내 머리칼에 대곤 훅훅 입김을 불었다. “에이, 안 떨어지네” 녀석 손이 내 앞머리에 닿았다. 달랑거리던 벚꽃잎은 이내 그 녀석 손에 들렸다. “고..고마워요. 제 이름은...” “알아요. 유복치잖아요. 누나 답안지 좋았다니까요. 좀 걷고 싶은데, 오늘 제가 데려다 줄까요?”

그날 이후, 우리는 학원에 가지 않는 날도 북카페 같은 곳에서 만났다. 녀석은 내가 쓴 답안지를 살뜰히도 봐줬다. 나만 알고 싶은 이 순간이 녀석 때문인지, 녀석의 원포인트 족집게 강의 덕분에 점점 나아지는 내 답안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애써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 두둥실 떠올랐다. 어김없이 북카페에서 마주 보고 책을 보고 있던 때였다. 내가 조용한 공간을 곧 내가 지배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꼬아르르으으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탭댄스 리듬으로 바닥을 쿵쿵 굴렀다. 본능에 가까운 발놀림이었다.

‘들렸나?’ 헛기침을 하는 척 하며 동태를 살피고 있을 때, 녀석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곧장 돌아와서는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초코쿠키였다. 단숨에 귀가 불타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쿠키를 반으로 갈라 녀석에게 건넸다. 북카페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음악, ‘오도독, 오도독’ 쿠키 씹는 소리가 마음속 쿵쾅거림과 3중주를 이뤘다. 설렘을 소리로 들은 적이 있다면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당시는 내꺼인듯 내꺼아닌 내꺼같은 너를 외치는 ‘썸’ 노래가 메가히트를 날리던 때였다. 세상 모든 노래 가사가 내 이야기인 것 같은 시점이 있다는데, 나에게는 그때가 그랬다.

애석하게도 노래는 노래일 뿐, 썸 같은 것도 타본 사람이 잘 타는 법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타고난 개복치 심성에 상황까지 더해져 썸이라는 걸 어떻게 타야 잘 탄다고 소문이 나는 건지 도통 가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수험생 신분에 흔들리면 안 된다는 무의식도 커지는 마음을 꽉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 저 녀석이 나보다 더 빨리 붙을 것 같은 예감이 들면 한시가 급해졌다. 녀석에겐 내게 없는 시간과 재능이 있었다. 필기시험에 낙방한 날이면 녀석에 대한 부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좌절감이 한데 뒤섞여 증폭됐다. n번째 낙방 소식을 접한 날, 녀석을 두고 혼자 학원을 나선 것도 그래서였다. 어디냐는 메시지와 전화에도 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설레고 있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었다.

녀석은 영문도 모르고 학원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 후 데면데면해졌는데, 한차례 감정 폭풍우가 지나가니 미안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녀석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내 쪽이었다. 우리는 연탄 쪽갈비집에서 마주했다. 초벌구이를 마친 쪽갈비가 연탄불 위에 오르자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목장갑을 끼고, 말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녀석이 한 손에 쪽갈비를 쥐고 막 입에 넣으려던 차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 그때는 내가 미안했어. 그렇게 가는 게 아니었는데. 내일은 뭐해? 북카페에서 만날까?” 녀석은 별말 없이 고기만 뜯다가, 갑자기 최근에 본 영화 얘기를 했다가, 아무 얘기나 꺼내다가 비빔냉면까지 후식으로 해치웠다.

연탄쪽갈비 냄새에 잔뜩 절어 우리가 쪽갈비인지, 쪽갈비가 우리인지 모를 지경으로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하철을 수차례 보내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때’를 놓친 것 같다고. 나 또한 알고 있지 않느냐고. 기류는 달라졌고, 이전처럼 설렐 수 없다는 걸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생각과는 다른 말이 나가버렸다. “아니? 난 몰라. 모르는데?” 그 녀석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는지, 녀석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행선지를 향해 나아갔다.

봄바람이 불고 거리의 풍경이 바뀔 즈음이면 오래전 벚꽃비가 내리던 때가 문득 떠오른다. 벚꽃잎을 후후 불 때 떨리던 그 녀석 속눈썹과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시험지를 들고 손을 부르르 떨던 내 모습, 그걸 지켜보던 그 녀석과 어디에도 둘 곳 없던 불안한 내 마음을 생각하다 보면, 애틋함과 아득함이 뒤섞여 어쩐지 서글퍼진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내 인생도 피워보겠노라 발버둥 쳤으나 자꾸만 넘어졌고, 부푼 마음은 터뜨리지도 못했는데 이미 꽃은 다 져버린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벚꽃과 함께 온 인연도 봄바람을 타고 떠나버렸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때를 기다려야 이룰 수 있는 시절인연이 있다는 것도 이때 조금은 알아버린 것 같다.

차이는 게 일상인 유복치의 삶에서 이쯤이야, 별로 대수롭지 않다. 그럼에도 견딜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나에게 벚꽃의 동의어가 아직 연탄쪽갈비라는 것이다.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면 코끝에 연탄쪽갈비 냄새가 스미는 것만 같다. 이제는 벚꽃처럼 피고 지는 인연이 있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기에 진정 꽃말 ‘덮어쓰기’가 필요한 때라는 걸 새삼 느낀다. 벚꽃의 원래 꽃말은 ‘아름다운 정신, 정신적 사랑,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를 맞이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성공적인 덮어쓰기 벚꽃엔딩을 위하여, 그러니까 내일은 차이지 말아야지…

필명 유복치. 유리멘탈 개복치의 줄임말이다. 취미는 입덕, 특기는 덕질인 n년차 스타트업인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온마음을 쏟으며 살고 싶지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깨질지 모르는 멘탈을 부여잡다 보니 2보 전진, 1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부분 차인 날 투성이지만, 한 걸음씩 발걸음을 떼다 보면 두려움 마저도 함께 나누고 싶은 소중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산다. 그래서 오늘도 차이거나, 차인 날을 회상하며 까무룩 잠이 든다. 내일은 차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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