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수입 업체를 운영하는 김종만(55·가명) 씨는 ‘한 지붕 세 가족’살이를 하고 있다. 부모님, 그리고 결혼한 딸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 것. 김 씨 가족은 서울 삼성동의 3층짜리 단독주택에 거주하다 3년 전 보안이 뛰어나고 생활하기 편리한 인근 317㎡(분양 면적 기준, 전 96평형) 아파트로 옮겼다. 김 씨는 “아파트에 살면서 3~4가구가 독립적으로 거주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면서 “아파트 평면 구조가 각 가구 간 사생활 보호를 잘할 수 있도록 돼 있어 불편한 점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여러 가구가 같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많이 선보이고 있다. 핵가족화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이색 트렌드다. 주택 건설 업체들이 온 가족이 모여 살기를 원하는 ‘틈새’ 수요층을 자극한 결과다. 특히 대형·고급 주택 시장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 같은 ‘가구 통합형 주택’은 가변형 벽체 등을 활용한 대형 평형이나 복층형 펜트하우스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각 가구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하면서도 조부모·부모·자녀 가구가 한 집 살림을 할 수 있도록 평면을 짠 게 특징이다.2가구 이상이 함께 살기 편리한 평면으로 설계된 가구 통합형 아파트들이 인기리에 분양 중이다. 월드건설은 지난 3월 경기 파주 교하택지지구에서 타운하우스 ‘파주 월드메르디앙(143가구)’을 공급하면서, ‘가구 통합형 주택’을 콘셉트로 내세웠다. 결과는 청약 첫날 4.5 대 1의 경쟁률로 전 평형 1순위 마감. 월드건설 관계자는 “특히 공기 좋은 곳에서 부모를 모시고 싶어 하는 중·장년층의 청약 열기가 높았다”고 전했다.동일토건이 천안 쌍용동에서 선보인 ‘동일하이빌’은 3가구가 함께 살기 좋은 평면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05~287㎡(전 32~87평형) 964가구 중 228·261·287㎡ 411가구에 이 같은 가구 통합형 평면이 적용됐다. GS건설이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에서 분양하는 ‘하버뷰 자이(1069가구)’의 펜트하우스인 238~373㎡ 17가구와 포스코건설이 같은 곳에서 공급하는 ‘더샵 센트럴파크(729가구)’의 228·238㎡ 44가구에도 가구 통합형 평면 설계가 도입된다.가구 통합형 평면 설계는 대부분 165㎡ 이상 대형 평형에 적용되고 있다. 2~3가구가 함께 거주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내부 공간이 넓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구 여건에 맞게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가변형 벽체 시공을 늘리고 거실과 함께 응접실 개념의 가족실을 따로 마련하는 점도 특징이다. 가구 간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구 내 이동 통로인 복도에 대형 여닫이문을 만들고 욕실 공간도 3개 이상 확보하는 추세다.복층형 펜트하우스 역시 전형적인 가구 통합형 모델이다. 아파트 내부가 2층 구조여서 여러 가구가 함께 거주하기에 알맞다. 최근 선보이는 복층형 아파트는 실내를 2개 층으로 분리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출입구를 따로 설치해 사생활 보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롯데건설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선보인 고급 주택 단지 ‘롯데캐슬 로잔(112가구)’의 218㎡ 3가구는 2~3가구가 함께 거주할 수 있다. 다만 복층의 아래층에 주방과 거실을, 위층에 침실을 집중적으로 넣어 각 가구의 ‘사생활 보호’보다 ‘융합’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현대건설이 서울 성수동 서울숲 인근에서 공급해 화제를 낳은 ‘힐스테이트’ 역시 복층형 아파트(304㎡)가 있다. 아래층에 거실과 주방, 부부 공간을 넣어 부모 가구가 주로 생활하고, 위층에 거실과 침실 2개를 넣어 자녀 가구가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도록 꾸민 게 특징이다. 두산건설이 서울 군자동에서 공급한 ‘두산위브 파크’ 244·267·277㎡도 전형적인 복층형 펜트하우스다. 최소 2가구 이상 같이 거주할 수 있다.복층형 펜트하우스는 실내 공간을 상·하층으로 나눠 2개의 개별 주택으로 꾸민다. 단층 아파트에 비해 사생활 보호를 강화할 수 있다. 조망권이 뛰어난 것도 장점이다. 복층형 아파트는 꼭대기층 대신 1층에 자리 잡기도 한다. 다만 이때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별도 출입구를 설치하는 게 관례다. 대림산업이 서울 신도림동에서 공급한 ‘e-편한세상’의 1층 복층 아파트(181㎡ 8가구) 역시 이 같은 별도 출입구가 설치됐다. 복층형 아파트의 경우 가구 통합형 주택의 대표적인 모델이지만, 냉·난방비가 일반 아파트보다 훨씬 많이 들며 관리비가 높다는 단점도 있다.앞으로 단지 형태의 가구 통합형 주택이 많이 선보일 전망이다. 국회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이 법안 12조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자녀와 동일한 주거 또는 동일 단지 안에 거주하는 부모를 위한 주거시설 공급을 장려해야 한다’고 명시해 ‘페어런츠 하우스(Parents House)’의 공급 근거를 마련했다. 페어런츠 하우스는 아파트 단지 내에 부모 가구가 사는 노인 전용 동을 따로 건설한다는 점에서 기존 아파트와 다르며 자식들과 같은 단지 안에 거주한다는 점에서 일반 실버타운과 차이가 있다.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도입돼 시행 중인 페어런츠 하우스는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여러 동 가운데 몇 개를 실버 전용 동으로 지어 부모와 자식 가구가 같은 단지의 다른 아파트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개 동이 건설되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면 전용면적이 작은 실버 전용 동을 1~2개 만들고, 자녀가 거주할 집과 실버 전용 동의 가구를 한데 묶어 분양하는 방식이다. 페어런츠 하우스의 가장 큰 장점은 부모와 자식간 각각 독립된 주거공간을 가지면서도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돌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노인 부모 가구가 따로 거주하는 실버타운과 달리 입주 병원과 전용 운동시설 등을 짓지 않아도 되고 별도 관리인을 둘 필요도 없어 실버타운에 비해 입주비와 관리비가 적게 들어간다.페어런츠 하우스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세제 지원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페어런츠 하우스를 분양받은 사람에게 1가구 2주택에 따른 보유세 및 양도세 중과 부담을 줄여주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페어런츠 하우스로 지어지는 아파트 단지에 대해서는 용적률을 높여주는 방법도 검토 중이다. 다만 입주 자격은 실버타운과 같이 만 60세 이상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노인 주거동의 가구만 따로 불법 매매되거나 임대돼 60세 이하의 가구가 거주하게 되는 등 실버타운의 부작용이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2가구가 함께 거래되는 만큼 다른 부동산에 비해 유동성이 떨어져 수요자가 예상보다 적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너도 나도 따로 살면서 독립성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세태. 가구 통합형 주택은 이 같은 주거 행태에 반기를 든 새로운 주택 트렌드다. ‘대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바라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경기도 용인에 거주하는 한택수(58) 씨는 “우리는 할아버지로부터 사교육을 받고 할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대가족 문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면서 “하지만 아파트에 대한 편리함 역시 포기할 수 없어 가구 통합형 주택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가구 통합형 주택에 여러 가구가 같이 거주할 경우 조부모가 어린 손자 손녀를 돌봐주면서 맞벌이 자녀 가구를 돕고 돈독한 가족의 정까지 나눌 수 있는 점이 큰 매력이다.박상언 유엔알컨설팅 사장은 “최근 잇따라 선보이고 있는 가구 통합형 모델은 현대 가족 형태와 반대되는 트렌드”라며 “하지만 가족과 행복을 중시하는 고급 주택 수요층을 중심으로 가구 통합형 주택이 틈새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고 진단했다.가구 통합형 주택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집값이 크게 오르면서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려워 부모 집에 얹혀사는 가구가 증가하고 있는 사회 현상과 관련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성한 자녀를 독립시키지 않고 ‘품 안의 자식’으로 감싸 안으려는 ‘적극적인’ 부모들의 간섭 행태로 해석될 수도 있다.조재길 한국경제신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