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기호에서 내면에너지 찾는 조상

미술과 현대미술의 차이는 ‘유머 일번지’와 ‘개그 콘서트’의 관계와 같다. 1980년대 대표적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전자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보여주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요소를 넣어 구성했다. 반면 후자는 희극적 요소를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적당히 상상을 더해서 보지 않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미술은 단풍이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 추수하는 농부들의 모습,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 등을 소설처럼 묘사한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은 이와 달리 난해하기 짝이 없다. 대표적 현대미술 작가 중 한 사람인 데미안 허스트. 포름알데히드가 담긴 커다란 수족관에 상어를 담가 놓은 그의 작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런 이유에서 고미술의 영역에 해당하는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 조상 씨는 뉴욕에서 수많은 현대 미술을 접하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지니고 있던 한국적 미감, 미적 가치만으로 현대미술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 결국 1년간 뉴욕서 ‘문화 놀음’하다 오겠다던 계획을 수정, 뉴욕대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와 미디어 아트를 공부했다. 그러나 동양적 사고와 교육에 길들여진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법을 모색하기란 쉽지 않았다.“현대미술을 하는 서양 작가들은 사물을 보는 시각이 나와 다른데, 왜 그런 걸까 궁금했습니다. 결국 직관과 추론의 차이라는데 생각이 미쳤지요. 즉, 나는 ‘동양적 직관’에 익숙하지만 그들은 ‘논리적 사고’가 배어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므로 각기 다른 요소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표현 방법이 다를 수밖에요. 그렇지만 사람은 논리와 직관을 모두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추론적인 사고는 논리적 발달을 가져다주고, 이는 물리학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유학 초기,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추론적 인식 체계를 깨우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책을 많이 읽었죠. 전문서여서 쉽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꽤 여러 권 보았어요. 그러던 중 아인슈타인이 강의하는 모습의 사진을 보았는데, 칠판에 쓴 복잡한 수식이 마치 드로잉 같더군요. 흥미로워서 처음에는 그림에 기호, 부호, 도형 등을 일부 차용해서 그렸어요. 이후에는 배경색을 칠하고 그 위에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수학적 도표를 삽입한 작품을 선보였죠.”그와 물리학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학 중에 읽었던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은 그의 작품 세계를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객관적인 과학 법칙에도 주관적인 사상이 개입된다는 내용을 다뤘는데, 이를 읽음으로써 객관적 사실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수묵 산수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고의 전환을 맞았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내 마음에 있는 것을 그리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 느끼고 체험하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자 뉴욕으로 향했던 것이다.그가 배경색으로 많이 사용하는 디프 블루 계열 혹은 레드 계열 컬러는 정신적 직관에 의해 창조된 색이다. 여러 번 붓질해 바탕 작업을 하는데, 이때 그는 마음속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색으로 표현한다고. 블루 계열의 경우 참선을 통해 심적 평온함을 얻었을 때, 잔잔한 호수, 바람결 같은 감성을 담고 있는 컬러다. 레드 계열이나 핑크의 경우는 꿈결 같은 느낌, 따사롭고 포근한 느낌, 달콤한 느낌이 묻어 나온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 사인 코사인 그래프,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 등 물리학의 여러 개념과 부호를 그려 넣는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동양화와 서양화가 공존한다는 평을 듣는다.“자를 대지 않고 그은 선이 반듯한 것은 고도의 긴장감과 공간에 떠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제대로 결합된 결과입니다. 저는 거시적인 천체의 세계로부터 미시적인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2, 3차원적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 공간을 창조하고자 합니다.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그런 경험과 구조를 가시화하고 작품의 개념을 조형 언어로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이죠. 분자 에너지의 분포, 두 원자 사이에 존재하는 잠재적 에너지,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곡선과 비율 같은 물리학의 데이터나 기호의 조형적 요소들…. 저의 작업은 데이터와 기호들에 대한 인상을 추출한 후 그것을 극단적으로 단순화, 극대화해 연역과 귀납의 과정을 통해 통합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전주에서도 2시간가량 차를 타고 가야 닿는 산골마을에서 살았던 조상 씨. 그가 도시 구경을 하게 된 것은 도에서 주최하는 미술 대회 본선에 참가하러 가면서였다. 이전까지 그가 본 것은 산에 새싹이 돋고, 녹음이 우거지고, 단풍이 지고, 눈에 덮인 산 등 시간대와 날씨,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뿐이었다. 늘 접하다 보니 눈을 감고도 그 모습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풍경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감정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예컨대 푸른 여름 산을 바라보며 진달래가 만발해 핑크빛으로 가득한 봄 산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런 장난기가 남아 있었던 것일까.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던 어느 날, 몇 개월 만에 용인에 있는 작업실에 갔더니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져 있더란다. 추운 겨울 와인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부피가 팽창해 흘러 넘쳐 캔버스가 얼룩 투성이였다.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와인이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에 와인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해 보았다. 병이나 잔에 담긴 와인의 색상은 진하지만 붓으로 칠하면 색이 엷어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100일간 100번을 덧칠했다.“형광등 불빛, 촛불, 태양 빛에 비추면서 매일 빛깔을 관찰했어요. 색을 칠하다 한 잔 마시기도 하고, 향도 맡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코르크 마개를 통해 숨을 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숙성되고…. 100일 동안 황홀한 경험을 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여러 가지 와인의 빛깔, 맛, 향을 살폈더니 어떤 색깔의 와인일 때 어떤 맛이 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에너지로 구성돼 있다고 본다. 그가 표현하는 그림, 드로잉, 비디오 영상 등의 작업은 이런 에너지의 파장을 느껴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동시에 회화와 설치 등 장르를 뛰어넘는 그의 예술 편력은 그가 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방식과 관점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회화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스틸 컷으로 정지시키듯 한 장면을 보여줘야 하지만, 영상 작업은 긴 호흡으로 자신의 생각을 생동감 있게 풀어갈 수 있어서 매력적이라는 조상 씨. 그래서 한동안 붓을 들지 않는 바람에 신작을 보기 위해 4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양화적 채색으로 바탕을 하고 그 위에 물리적 도상을 그린 기존 스타일의 평면 작업과 함께 여행 중 수집한 소품이나 소장하고 있는 오브제를 반으로 자르거나 쪼개서 화면에 붙인 작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10월 20일부터 11월 14일까지 가일 미술관에서 열린다. 문의 (031)585-7966Untitled, mixedmedia on canvas, 400×180cm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