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32호 (2008년 01월)



국내 와인 숍 1호…멤버십 클럽도 첫 도입


가을의 남산 소월길은 빼어난 경치 때문에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어느새 한 해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라는 뭇사람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면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길 따라 펼쳐진 은행나무 행렬이 끝날 때쯤이면 차는 어느새 하얏트호텔에 다다른다. 그리고 하얏트 호텔에서 반포로로 핸들을 돌려 내려오다 보면 짙은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보인다. ‘since 1992 젤(JELL).’

남산 자락에 위치한 젤은 국내 최초의 와인 숍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지난 1992년 처음 문을 연 이후 젤은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은 물론 초창기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겐 해방구와 같았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팔았던 와인이 프랑스 보르도 메독, 생줄리앙 지방 와인과 테이블 와인 등 총 5가지였습니다. 지금 1000여 가지 와인을 팔고 있으니 국내 와인 시장이 참 많이 커졌죠.”

와인 숍 젤을 운영하고 있는 이제춘 사장은 매장에 있는 와인을 1주일에 한 가지씩 다 맛보려면 20년은 걸린다고 자랑한다. 와인 종류에 있어선 국내 최대 규모다.

1969년 독일 유학 시절 와인을 처음 맛본 그는 1986년 귀국을 계기로 숍 오픈을 구상했다.

“운도 따랐던 것 같아요. 1987년 정부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와인 수입을 정식 허가했으니까요. 10대 시절부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는 생각을 해왔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무엇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이 바로 와인이었죠.”

그래서일까. 이 사장의 ‘젤 사랑’은 각별하다. 의류 매장으로 쓰이던 건물을 매입해 그는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했다. 유럽의 유명 샤토처럼 매장을 꾸미기 위해 벽돌 하나도 100년 된 제품을 구해 시공했다. 창문을 막고 거기서부터 5m를 벽으로 채워 외부 환경과 매장 내부를 철저하게 구분했다. 그러다 보니 젤 내부는 마치 지하에 있는 것처럼 사시사철 선선하다. 와인 보관에 있어선 최적의 조건이다. 그러나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일까. 그는 지금도 매장 리뉴얼에 여념이 없다. 최근엔 지하 1층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최고급 회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와인셀러 ‘로마네 콩티’를 오픈했다. 이 사장의 안내로 로마네 콩티에 들어가 보니 벽마다 부르고뉴 명품 와인 로마네 콩티와 보르도 5대 명품 와인인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라피트 로쉴드, 샤토 오브리옹, 샤토 무통 로쉴드로 가득하다. 안은 마치 유럽의 고성 지하에 온 듯 곰팡이 냄새로 진동한다.

그는 “지어진 지 100년 된 폐교에서 대부분의 벽돌을 구한다”며 “오랜 세월을 견딘 벽돌이라 제습 효과가 탁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그와 와인과의 만남은 숙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와인 사업은 운도 따랐다. 문을 연 지 며칠 만에 젤은 주한 외국인들에겐 필수 방문 코스가 돼 버렸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던 1998년 외환위기 때에도 이곳은 외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일부 외국인들은 자기 나라보다 싸게 와인을 구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젤에서 대량으로 와인을 구입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젤은 국내 근무하는 주한 외국사절과 외국계 기업 관계자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3~4년 전부터는 국내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2000~03년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젤에서 샤토 마고 등 프랑스 정통 고급 와인을 구입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선물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와인 시장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구대륙 와인이 선점하던 시기.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던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칠레 등 신대륙 와인들에 한국은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그러나 한국 와인 1세대인 이 사장은 신대륙 와인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예상했다. 대표적 칠레 와인인 몬테스 알파를 국내 처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이 사장이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수입상들이 저에게 찾아와 와인 수입을 의뢰했었죠. 젤에서 팔리지 않으면 대한민국 어디에 내놔도 안 된다면서 말이죠. 당시 처음으로 칠레 와인을 시음해 봤는데 중저가 전략을 펼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도 그는 처음 수입되는 와인은 2병가량을 직접 시음한 뒤 판매를 결정한다.

요즘 이 사장은 와인을 실생활과 어떻게 접목하느냐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초창기 올리브오일, 스파게티, 빵 등 식료품을 팔던 2층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멤버십클럽을 만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4년 전 국내 최초로 문을 연 젤의 멤버십 클럽은 현재 회원 수가 19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회원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이라고 해봐야 젤에서 와인을 구입할 때 포인트 점수를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다. 되레 평생 회원비가 500만 원이나 된다.

“젤의 멤버십 회원들에게는 남산 소월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와인 바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데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 클럽은 단순히 돈만 많다고 해서 가입되지 않습니다. 회원의 인품도 철저히 따집니다.” 또한 이 클럽에서는 매년 한 차례 로마네 콩티 시음회를 열기도 한다.

이 사장은 피노 누아 예찬론자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르고뉴 지방의 피노 누아는 ‘엄마의 포근한 품’이 느껴지는 포도 품종이다.

“피노 누아를 잔에 따르면 너무 거칠어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느껴지는 그 부드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죠. 강하면서도 섬세한 와인이 바로 피노 누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알코올 도수가 12.5~13.5인 와인을 선택할 것을 추천했다. 알코올 도수가 너무 높은 와인은 본연의 향미를 느끼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이 사장의 생각이다. 또 잔을 코끝에 대 달콤한 향이 느껴질 때가 가장 잘 숙성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와인은 어느 정도 신맛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보통 전문가들이 밸런스를 많이 강조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밸런스는 신맛과 타닌(떫은 맛), 알코올 도수입니다. 신대륙 와인들은 값은 저렴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고 신맛이 너무 강한 것이 단점입니다. 와인을 마실 때 이 세 가지 맛이 얼마나 적절히 안배됐느냐를 느끼며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와인 지식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맛과 향 그 자체를 즐겨야지 품종, 빈티지(생산 연도), 브랜드 등을 외우려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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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8-01-1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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