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없이 중국이 국제통화기금의 준비통화인 특별인출권(SDR)을 슈퍼 통화로 도입하자고 제안하면서 그동안 간헐적으로 논의돼 왔던 세계 기축통화 논쟁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특히 이 논쟁은 위기 이후 세계 주도권 확보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대외 환경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 입장에서도 대외정책 운용과 기업경영 계획수립에 아주 중요한 문제다.중국의 주장대로 새로운 기축통화를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전제돼야 한다. 하나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기축통화가 도입될 만큼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었는가와 그동안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해 왔던 미국 달러화가 과연 새로운 기축통화에 그 역할을 넘겨줄 수 있는 것인가를 점검해 봐야 한다.첫 번째 전제인 글로벌화 진전 여부에 있어서는 벌써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은 지 햇수로 10년째가 됐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습을 본다면 당초 예상대로 3대 광역경제권 체제로 재편되고 있다.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주경제권,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경제권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권 간의 견제와 균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뉴밀레니엄 시대의 세계경제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 최근 분위기다.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과 미주경제권 간에는 북대서양 자유무역지대(TAFTA)로, 아시아와 유럽경제권 간에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로, 아시아와 미주경제권 간에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의체(APEC)로 연결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이런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세계 국가를 하나로 묶는 지구촌 사회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된다.국제통화 질서도 달러화와 유로화, 아시아 단일통화를 축으로 하는 3극 통화체제가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전 세계를 하나의 화폐로 통용시키자는 세계단일통화 도입 논의가 일고 있어 주목된다.이런 점을 감안하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단일통화를 도입해야 하는 여건은 어느 정도 성숙돼 가고 있고 이미 많은 방안이 논의됐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이후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해 왔던 미국 달러화가 새로운 기축통화로 주도권을 넘겨줄 수 있는 여건이 성숙돼 있는가 하는 점이다.최근 들어 국제금융시장에서는 모기지 사태로 달러 가치가 흔들리면서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에 묵시적으로 유지돼온 ‘제2 브레튼 우즈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브레튼 우즈 체제란 1944년 국제통화기금(IMF) 창립 이후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 하에서는 미국의 달러화만이 금과 일정한 교환비율을 유지하고 각국의 통화는 기축통화와의 기준환율을 설정·유지함으로써 환율을 안정시키고 국제무역을 증진시켰다.같은 맥락에서 제2의 브레튼 우즈 체제란 1971년 닉슨의 금태환 정지선언 이후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를 골간으로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묵시적인 합의 하에 유지해온 환율제도를 의미한다. 미국이 자국의 절대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이 체제를 유지해온 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공산주의의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자 했던 숨은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일부에서 제2 브레튼 우즈 체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유럽의 부흥과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이 지원했던 마셜플랜의 또 다른 형태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그 후 제2 브레튼 우즈 체제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초다. 아시아 통화에 대한 의도적인 달러화 약세로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위험수준에 달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여러 방안을 동원했으나 결국은 선진국 간의 미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로 이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제2 브레튼 우즈 체제에 또 한차례 균열을 보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95년 4월 달러화 가치를 부양하기 위한 역플라자 합의와 아시아 외환위기다. 역플라자 합의에 따라 미 달러화 가치가 부양되는 과정에서 외환위기로 아시아 통화가치가 환투기로 폭락하면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간의 구도가 재현됐다. 특히 중국이 높은 성장을 기록하고 환율을 고정시킴에 따라 제2 브레튼 우즈 체제는 1970년대보다 더 강화된 모습을 띠었다.그 결과 2000년대 들어 미국의 경상수지적자가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초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특히 모기지 사태에 따른 글로벌 금융위기가 극복된다 하더라도 위기 극복과정에서 쌓인 쌍둥이 적자로 달러화 가치가 폭락할 경우 더 이상 기축통화 역할을 당하지 못하지 않느냐는 시각도 제기돼 주목된다.그렇다면 관심은 제2 브레튼 우즈체제가 붕괴되고 상당 수준의 달러 약세폭과 새로운 기축통화를 동시에 인정하는 플라자 체제(혹은 신브레튼 우즈 체제)가 다시 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앞으로 플라자 체제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명시적인 합의 형태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1980년대와 달리 세계 각국 간의 경기회복세 차이로 유럽, 일본 등은 더 이상의 달러화 약세를 용인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또 미국의 경상수지적자 내용도 많이 변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과의 무역불균형이 심해 플라자 합의도 엔화를 중심으로 한 미 달러화 약세 유도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미국의 경상수지적자의 약 40% 정도를 중국이 제공하고 있다.결국 이번에 플라자 체제가 다시 올 경우 명시적이기 보다는 묵시적으로,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는 중심통화도 중국의 위안화에 초점이 맞춰지는 ‘수정된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해 왔던 오바마 정부가 기존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출범 이후 줄곧 위안화 절상을 주장해 왔던 것도 이 같은 현실을 인식한 불가피한 조치다.지난 30년 동안 묵시적으로 유지돼온 제2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수정된 형태의 플라자 체제(혹은 신브레튼 우즈 체제)가 올 경우 우리 경제 입장에서는 크게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원화 가치의 안전판(safty valve)이 무너진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과의 높은 무역의존도를 감안할 때 고정환율제 포기 이후 위안화와 원화 가치 간의 동조화 현상이 심해질 가능성이다.따라서 우리 외환당국은 급격한 환율변동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smoothing operation)을 시급히 확보하고 시장참여자들은 환위험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 앞으로 외화운용과 원화 환율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는 위안화 가치변동을 참고지표로 삼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 논설위원겸 한국경제TV해설위원(schan@hankyung.com)